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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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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불명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라틴어: Appius Claudius Pulcher
생몰년도
미상 ~ 미상
출생지
사망지
지위
국가
가족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아버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형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아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바르바투스 아피아누스(아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손자)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손자)
직업
로마 공화정 집정관
임기
기원전 38년
전임
동기
후임

1. 개요2. 생애

1. 개요[편집]

로마 공화국 집정관. 종신독재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열혈 지지자 출신으로, 아우구스투스 초기 지지자이다.

본래는 카이사르 사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따르다가, 옥타비아누스로 불린 시절 아우구스투스가 정치적 위기에 빠졌을 때부터 그를 진심으로 도왔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배경으로 옥타비아누스와 결혼한, 그의 혈연상 친척 리비아 드루실라 역시 그를 크게 신뢰했다.

2. 생애[편집]

로마 공화국클라우디우스 씨족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위세를 자랑하던 지파로, 파트리키 계급에 속한 풀케르 가문의 일원이다. 아버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일찍 사망했고, 그 또는 형제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에게 입양되어 양아버지의 프라이노멘을 본땄다. 이 때문에 두 형제 모두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라고 불렸기에, 현대 학자들은 그를 '가이우스의 아들 아피우스' 또는 '대 아피우스'로 구별하곤 한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기원전 58년 9월 4일 친구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아피우스가 그의 형제와 함께 키케로의 형제이자 아시아 총독인 퀸투스 툴리우스 키케로를 고발하려 한다는 우려를 표했다. 기원전 52년, 그는 삼촌인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를 살해하는 데 관여한 티투스 안니우스 밀로를 고발한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 키케로는 밀로의 변호를 맡았다. 허나 재판에 참석한 푸블리우스 추종자들의 거센 압력과 반발에 굴복하듯이 기세에 눌렸다. 그 결과, 키케로는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결국 그의 간접적 협력자인 밀로는 유죄 판결을 받고 추방되었다. 밀로가 추방되자, 아피우스는 자신의 유일한 목표는 삼촌의 원수를 갚는 것뿐이었다며 보상금을 받기를 거부했다.

기원전 50년,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라는 인물이 폼페이우스 휘하에 있다가 카이사르에게 넘어갔던 제1 군단과 제15 군단을 파르티아 정벌에 투입한다는 명목으로 로마로 송환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그 군단들은 시리아 전선에 가지 않고 이탈리아에 남았고, 나중에 카이사르의 내전 때 폼페이우스 휘하에서 활동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인물이 기원전 38년 집정관 아피우스와 동일인물이라고 추정 중이다. 그러나 그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이후 내전이 발발했는데, 아피우스가 어느 편을 들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수에토니우스가 두 클라우디우스 형제가 그리스에 머물렀다는 기록을 남긴 걸 볼 때 폼페이우스를 따라 발칸 반도로 넘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폼페이우스가 패망한 뒤, 그는 로마로 귀환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 이후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편을 들었다. 이는 그가 일찍부터 옵티마테스로 분류된 친인척이 많았음에도, 원로원 중심 공화정 체제와 전면으로 맞선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지지했던 것도 한몫했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가 이렇게 행동한 이유에는 그가 카이사르의 주장과 개혁 방향에 심정적으로 동조하고 진심으로 따랐기 때문이었다. 이는 그의 혈연상 아주 먼 친척으로 카이사르 밑에서 명예로운 경력을 처음부터 밞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기원전 42년 법무관)[1],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동년배 친구들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쿠리오, 폴리오 등과 다른 부분이었다.

이런 까닭에 그가 안토니우스를 지지한 배경 역시 본인의 거취 등을 놓고 고민에 빠진 카이사르파 젊은 귀족들과 차이가 있었다. 이에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기원전 43년 1월 친척들에게 자신이 안토니우스와 맞서고 있는 데키무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알비누스에게 이번에 무티나 내전에서 승리하고 안토니우스를 꺾은 뒤에는 풀케르 형제를 살려달라고 요청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키케로 계산과 달리, 데키무스 브루투스는 안토니우스에게 패했다. 그래서 키케로는 방향을 바꾸는데, 이때 제안을 받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본인 일가를 그동안 나쁘게 묘사해 중상모략하고, 자신과 본인 일가 전체를 정쟁에서 이용하려고 한 키케로의 제안을 일부만 수용했다. 하여 그는 키케로와 실리를 이유로 손을 잡은 옥타비아누스(후일의 아우구스투스)의 등장부터 안토니우스 대신 그를 진심으로 도우면서, 키케로와는 갈라서게 됐다.

기원전 38년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하지만 자리만 차지했을 뿐 별다른 역할은 하지 않다가, 그 해 중반에 보결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켈리오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로 교체되었다. 이후 몇 년간 히스파니아 총독을 맡다가 로마로 귀환한 뒤 기원전 32년 6월 1일 개선식을 거행했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옥타비아누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와 친분이 두터웠고, 이들의 재혼과 결혼 등에서 여러 도움을 줬다. 내전 기간 내내 옥타비아누스 부부가 내전 기간 동안 평민들에게 지지를 얻고, 그에 필요한 재산을 축적하는데, 여러 역할을 했다. 또 그는 같은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으로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남성 황족들인 마르켈루스,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등이 자리잡는 부분에서도 헌신했다.

이름 미상의 아내와의 사이에는 최소 두 아들이 있었다. 이중 첫째 아들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이다. 그는 기원전 8년 화폐 주조관을 지냈다. 그는 티베리우스가 기원전 6년 로도스 섬으로 가출하고, 이후 아우구스투스가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후계자로 데뷔시키면서 벌인 조치들이 문제가 생기면서 위기에 빠지자, 아우구스투스의 정치적 위기를 극복할 목적의 정치적 숙청 속에서 희생자가 됐다. 그는 기원전 2년 대 율리아와 간통했다는 모함을 받고, 아우구스투스의 명령 아래 불명예스럽게 처형됐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중 기원전 38년 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장손이 같은 이름을 물려받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이다. 그는 아버지가 누명을 쓰고 처형될 때 추방 혹은 자결형 선고를 받았다. 그렇지만 이 사람의 동생으로 해당 문서의 또 다른 손자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살아 남았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가 벌인 조치의 목적이 잠재적 정적인 풀케르 가문을 완전히 몰락귀족으로 만들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확립 목적이 뚜렷해, 이후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은 위세를 완전히 잃어버린다. 이는 살아남은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의 아들인, 제정 중기의 재무관을 지낸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2] 경력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의 또 다른 아들은 다른 집안의 대를 잇고자 입양됐다. 기원전 32년 보결 집정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의 양자가 된 뒤 기원전 12년 집정관에 선임된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바르바투스 아피아누스가 그인데, 이 사람의 손녀가 발레리아 메살리나이다.
[1]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되는 아주 먼 친척이다.[2] 마르켈루스 극장에서 발굴된 유골항아리의 주인공으로, 위세 등등했던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이 이 사건으로 몰락한 뒤, 신참자, 기사계급, 신흥부자들보다 못한 처지가 된 상황을 보여주는 경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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