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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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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불명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라틴어: Gaius Aurelius Cotta
생몰년도
기원전 124년 ~ 기원전 74년 말 또는 기원전 73년 초
출생지
사망지
지위
국가
가족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아버지)
루틸리아(어머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형제)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형제)
아우렐리아 코타(사촌)
직업
로마 공화정 집정관
임기
기원전 75년
전임
동기
후임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1. 개요2. 생애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기원전 3세기부터 로마 정계에서 활약한 노빌레스 가문인 아우렐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는 파스티 카피톨리니에서 그의 아버지로 언급되었지만 그 외에 별다른 행적이 전해지지 않는다. 어머니 루틸리아는 기원전 105년 집정관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의 누이였다. 형제로 기원전 74년 집정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코타, 기원전 65년 집정관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가 있었다. 또한 사촌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어머니 아우렐리아 코타가 있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그가 기원전 88년 호민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와 "거의 같은 나이"였다고 밝혔다. 그는 술피키보다 앞선 기원전 91년 가을에 열린 호민관 선거에 입후보했기에 술피키우스보다 몇 달 더 많았을 것이다. 또한 키케로는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보다 10살 많았다고 기술했다. 학자들은 이 점을 근거로 그가 기원전 124년에 출생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그는 기원전 90년대부터 정치 경력을 시작했는데, 특히 변호사로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키케로는 그를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트라보 보피스쿠스와 함께 전대에 로마에서 가장 인기있는 6명의 변호사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키케로는 그와 술피키우스가 웅변에서 모든 동시대 사람을 능가했으며, 그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를 본받았고 술피키우스는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술피키우스를 추종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키케로는 그가 폐가 약했기 때문에 힘이 다소 떨어졌지만 가장 재치있고 미묘한 말을 구사해 청중의 이목을 사로잡았으며, 설득력이 매우 뛰어났다고 칭찬했다. 그는 자신의 연설문 일부를 출간했다고 전해지나 현존하지 않는다.

그는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와 절친한 관계를 맺었고, 기원전 91년 호민관이 된 드루수스가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을 때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개혁은 당해 집정관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등의 거센 반대로 인해 난항을 겪다가 드루수스가 암살당하면서 무산되었다. 이에 드루수스가 로마 시민권을 나눠주려 했던 이탈리아인들이 분노해 동맹시 전쟁을 감행했다.

드루수스의 정적들은 코타 등 드루수스의 추종자들이 이탈리아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도록 선동했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90년 호민관 퀸투스 바리우스 세베루스 히브리다가 동맹시들이 로마에 반기를 일으키도록 선동한 자들을 처벌하자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에 따라 드루수스를 지지했던 인사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코타 역시 재판에 회부된 뒤 추방되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그는 법정에 출두한 뒤 자신의 행동 방침에 대해 인상적인 연설을 하고 공개적으로 에퀴테스를 비난한 뒤 표결이 시행되기 전에 로마를 떠났다고 한다. 기원전 88년 호민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가 그를 포함한 망명자들이 로마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제시했지만 술라의 쿠데타로 인해 목숨을 잃으면서 실패했고, 그는 망명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기원전 82년 술라의 내전의 최종 승리자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망명지에서 복귀하는 것을 허락한 덕분에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이에 고마움을 느끼고 술라의 확고한 지지자가 되었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아우렐리우스 코타'를 비롯한 여러 인사들이 술라에게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숙청 명단에서 빼달라고 요청했다. 수에토니우스는 아우렐리우스 코타라는 이름의 프라이노멘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가이우스일 가능성이 있다. 술라는 투덜거리며 카이사르를 사면하겠다고 하면서도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고 한다.
"당신들 좋을 대로 그 친구를 데려가시오. 다만 당신들이 그리도 살리고 싶어하는 사람이 언젠가는 당신들이 나와 함께 지켜온 귀족층의 대의에 치명타를 날릴 거라는 점만 알아두시오. 이 카이사르라는 친구 안에는 마리우스가 여럿 들어 있으니까."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히스파니아 총독 '코타'는 기원전 80년 마우레타니아에서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간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와 맞섰지만 멜라리아 해전에서 패배했다고 한다. 학계에서는 이 인물에 대해 그 또는 형제 마르쿠스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학계에서는 행정관들의 법적 취임 가능 연령을 설정한 술라의 법에 의거해, 그가 기원전 78년 이전에 법무관을 맡았을 거라고 추정한다. 기원전 77년,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마케도니아 총독 기간 동안 속주민들을 상대로 착취를 일삼았다는 혐의로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를 고발하면서 열린 재판에 참석하여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와 함께 돌라벨라를 변호해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기원전 75년 루키우스 옥타비우스와 함께 집정관이 되었다. 당시 로마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히스파니아에서는 세르토리우스 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고, 국고는 텅 비어버렸고, 로마 시에는 기아의 위협이 엄습했다. 이에 빈민들은 각지에서 폭동을 일으키려 들었다. 그는 평민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연단에 서서 연설했지만, 그들이 오히려 그를 죽이려 들자 옥타비우스의 집으로 피신해야 했다. 이후 시칠리아 등 다른 지방에서 대규모의 밀을 수입해 민심을 가까스로 수습했다. 이후 술라파와 결별하기로 한 그는 술라가 호민관을 맡은 이가 다른 관직을 맡을 수 없게 한 조치를 폐지하자는 법안을 발의해 통과시켰다.

집정관 임기가 만료된 후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를 임지로 맡은 그는 소규모 폭동을 진압한 것 외에는 별다른 전투를 치르지 않았지만 개선식을 거행하길 희망했다. 기원전 74년 말 또는 73년 초 이탈리아로 돌아와서 원로원으로부터 개선식을 거행할 자격이 있다는 인정을 받고 즉시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개선식이 열리기 전날, 그는 망명 생활 동안 입었던 상처가 악화되는 바람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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