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 BACK << -|- >> HOME <<)

1
편집
현재 사용중인 아이피가 ACL그룹 IDC #12915에 있기 때문에 편집 권한이 부족합니다.
만료일 : 무기한
사유 : IDC(AS26496)
토론 역사
 
[ 펼치기 · 접기 ]
라틴어 문구
색상 범례
  • sine collega: 동료 없이 단독 선출
황제 겸 집정관
기원전 100년
기원전 99년
기원전 98년
기원전 97년
기원전 96년
기원전 95년
기원전 94년
기원전 93년
기원전 92년
기원전 91년
기원전 90년
기원전 89년
기원전 88년
기원전 87년
기원전 87년 보결
기원전 86년
기원전 86년 보결
기원전 85년
기원전 84년
기원전 83년
기원전 82년
기원전 81년
기원전 80년
기원전 79년
기원전 78년
기원전 77년
기원전 76년
기원전 75년
기원전 74년
기원전 73년
기원전 72년
기원전 71년
기원전 70년
기원전 69년
기원전 68년
기원전 68년 보결
기원전 67년
기원전 66년
기원전 65년
기원전 65년 보결
기원전 64년
기원전 63년
기원전 62년
기원전 61년
기원전 60년
기원전 59년
기원전 58년
기원전 57년
기원전 56년
기원전 55년
기원전 54년
기원전 53년
기원전 52년
기원전 51년
기원전 50년
기원전 49년
기원전 48년
기원전 47년
기원전 46년
기원전 45년
sine collega
기원전 45년 보결
기원전 45년 보결
기원전 44년
기원전 44년 보결
기원전 43년
기원전 43년 보결
기원전 43년 보결
기원전 42년
기원전 41년
기원전 40년
기원전 40년 보결
기원전 39년
기원전 39년 보결
기원전 39년 보결
기원전 38년
기원전 38년 보결
기원전 38년 보결
기원전 37년
기원전 37년 보결
기원전 36년
기원전 36년 보결
기원전 36년 보결
기원전 35년
기원전 35년 보결
기원전 35년 보결
기원전 34년
기원전 34년 보결
기원전 34년 보결
기원전 34년 보결
기원전 33년
기원전 33년 보결
기원전 33년 보결
기원전 33년 보결
기원전 33년 보결
기원전 33년 보결
기원전 32년
기원전 32년 보결
기원전 31년
기원전 31년 보결
기원전 31년 보결
기원전 31년 보결
기원전 30년
기원전 30년 보결
기원전 30년 보결
기원전 30년 보결
기원전 29년
기원전 29년 보결
기원전 28년
기원전 27년
기원전 26년
기원전 25년
기원전 24년
기원전 23년
기원전 23년 보결
기원전 22년
기원전 21년
기원전 20년
기원전 19년
기원전 19년 보결
기원전 18년
sine collega
기원전 17년
기원전 16년
기원전 16년 보결
기원전 15년
기원전 14년
기원전 13년
기원전 12년
기원전 12년 보결
기원전 12년 보결
기원전 11년
기원전 10년
기원전 9년
기원전 8년
기원전 7년
기원전 6년
기원전 5년
기원전 5년 보결
기원전 5년 보결
기원전 4년
기원전 4년 보결
기원전 3년
기원전 2년
기원전 2년 보결
기원전 2년 보결
기원전 2년 보결
기원전 1년
기원전 1년 보결
연도 불명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라틴어: Marcus Licinius Crassus
생몰년도
미상 ~ 미상
출생지
사망지
지위
국가
가족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조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아버지)
카이킬리아 메텔라(어머니)
이름미상의 여자형제(누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양자)
직업
로마 공화정 집정관
임기
기원전 30년
전임
동기
후임

1. 개요2. 생애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평민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여 집정관직이 평민에게도 개방되는 데 크게 기여한 저명한 노빌레스 집안인 리키니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조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당대 최고의 부자이자 정계의 거물로, 술라의 내전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승리에 크게 기여하고 집정관을 2차례 역임했으며,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제1차 삼두정치를 결성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기원전 53년 파르티아 원정에 착수했다가 카르헤 전투에서 패사했다.

아버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기원전 54년 재무관을 맡아 갈리아 전쟁을 수행하던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에 들어가 여러 임무를 수행했고,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했을 때 카이사르의 지지자로서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을 역임했다. 어머니 카이킬리아 메텔라는 기원전 69년 집정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의 딸이다.

기원전 43년 로마를 장악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그를 숙청 대상에 넣었는데, 아마도 크라수스 가문의 막대한 재산을 노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추적자들을 피해 시칠리아로 도주한 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휘하의 장군으로 활동했다. 그러다 기원전 39년 미세눔 협약이 체결되면서 사면되자 로마로 귀환했고, 안토니우스의 추종자가 되었다. 기원전 37년 안토니우스의 지원에 힘입어 크레타와 키레네 총독을 맡았고 기원전 35년 비티니아 총독을 맡았다. 이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간의 갈등이 심각해지자 옥타비아누스의 편으로 넘어갔고, 기원전 31년 고위 사제 계급인 아우구르(Augur)의 일원이 되었다.

기원전 30년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가 몇 달 후 사임한 뒤 마케도니아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마케도니아 총독으로서 눈부신 군공을 세웠다. 다키아인들의 반란을 모조리 제압했고, 모이시아와 트라키아를 침공한 바스타르네 족과 격돌해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 도중 바스타르네 족의 왕 델도(Deldo)와 결투를 벌인 끝에 처단하고 그의 갑옷을 탈취했다. 그 후 모이시아 대부분을 로먀의 영토로 귀속시켰고, 기원전 62년 마케도니아 총독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가 바스타르네 족에게 참패하면서 잃어버렸던 군기를 탈환했다.

이렇듯 눈부신 군공을 세운 그는 기원전 29년 군대로부터 임페라토르로 선언되었고, 기원전 27년 로마로 귀환한 뒤 스폴리아 오피마를 거행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스폴리아 오피마는 전투에서 적군 지휘관과 일대일 결투를 벌여 죽이고 빼앗은 갑옷을 유피테르 신전에 바치는 의식으로, 그 이전에 이 의식을 수행한 인물은 고대 로마의 전설적인 건국자 로물루스, 아울루스 코르넬리우스 코수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등 3명 뿐이었다.

당시 지중해 세게의 1인자였던 옥타비아누스는 그가 스폴리아 오피마를 수행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명성이 지나치게 높아져서 장차 자신의 경쟁자가 될 것을 우려했기에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떤 근거로 거부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모든 로마군의 임페리움을 쥐고 있으며 크라수스 역시 자신의 지휘하에서 임무를 수행했으니 그가 세운 공적은 자신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근거를 댔다고 한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가 모든 총독들을 통제하고 군대를 지휘할 권리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은 기원전 19년 원로원이 임페리음 프로콘술라리 마이우스(imperium proconsulare maius)를 수여했을 때의 일이고, 그 이전에는 총독들이 독자적으로 군대를 이끌 수 있었다. 물론 옥타비아누스는 국방 문제를 이유로 자신이 여러 속주를 별도로 통제할 권리를 인정받았지만, 마케도니아 속주는 여기에 속하지 않았다. 많은 학자들은 카시우스가 모든 장군이 황제의 지휘하에 놓인 것을 상식으로 여기는 당대의 사고관을 옥타비아누스 시대에 그대로 적용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본다.

일부 학자들은 옥타비아누스가 삼두의 일원으로서 크라수스의 요청을 기각했다고 추정한다. 삼두의 권한은 기원전 32년 1월 1일에 공식적으로 만료되었지만,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에 맞서 로마 세계를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비상 권한을 5년 더 연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체제에서는 지휘관이 임페라토르로 선포되고 개선식을 행사할 권리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삼두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아무튼 크라수스는 스폴리아 오피마를 수행할 권리를 인정받지 못하고, 그 대신 개선식을 허락받았다. 그가 확보한 델도의 갑옷은 다른 전리품처럼 개선식 후 봉헌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옥타비아누스가 그를 위험인물로 간주하고 숙청했다는 가설을 제기하지만, 대다수 학자들은 숙청되었다는 근거가 부족하다며 옥타비아누스의 은근한 견제를 받으며 일개 원로원 의원으로서 조용히 지냈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는 기원전 44년 법무관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의 아들로 혈연상 외조카인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를 양자로 삼았다. 이 결과 탄생한 새로운 귀족 가문이 크라수스 피소 프루기 가문인데, 이 가문 출신의 루필리아 파우스티나는 대 파우스티나 황후의 어머니이자 트라야누스 황제의 조카손녀로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처제이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친할머니로 유명하다. 기원전 30년 집정관 크라수스와 그 양자 크리수스 프루기를 시작으로 한 이 귀족 가문은 이런 배경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시대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방계 황족 뻘로 대우받았고, 서기 3세기 군인황제시대발레리아누스, 갈리에누스 시대까지 위세가 대단했다. 양자, 상속자이자 혈연상 외조카인 크라수스 프루기는 기원전 14년 집정관을 역임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니며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이거나, 잘못된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문서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원할 경우 직접 토론을 발제할 수 있습니다.

  •  
  •  
  •  
  •  
  •  
  •  
  •  
  •  
  •  
  •  
  •  
  •  
  •  
  •  
  •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