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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노르바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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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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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ine collega: 동료 없이 단독 선출
황제 겸 집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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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년
기원전 1년 보결
연도 불명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라틴어: Gaius Norbanus
생몰년도
미상 ~ 기원전 82년
출생지
사망지
지위
국가
가족
가이우스 노르바누스(아들)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손자)
직업
로마 공화정 집정관
임기
기원전 83년
전임
동기
후임
1. 개요2. 생애

1. 개요[편집]

로마 공화국집정관. 술라의 내전을 단행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 맞섰으나 패배를 면치 못하고 로도스로 망명한 뒤 술라가 로도스 시민들에게 자신을 넘기라고 협박한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자살했다.

2. 생애[편집]

로마 시민권을 획득한 이탈리아인으로 추정된다. 프리드리히 뮌처는 그가 볼스키인들의 영역에 있는 노르바 시 출신이라고 추정했다. 반면 에른스트 바디안은 그가 에트루리아 출신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기원전 103년 호민관으로 선출된 뒤 동료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와 함께 "로마 인민의 위대함을 모욕하는 것에 관한 법률"(lex Appuleia de maestate)을 통과시킨 뒤 이에 근거하여 아라우시오 전투의 참패를 초래한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그나이우스 말리우스 막시무스를 재판에 회부했다. 이때 그는 카이피오가 일전에 로마를 상대로 반기를 일으킨 툴루즈를 공략하고 그곳에 켈트 사원에 보관되었던 막대한 금은보화를 횡령했다고 비난했다.

많은 로마 귀족들은 사트루니누스와 노르바누스 등 평민 대표들의 공세로부터 동료 귀족인 카이피오를 옹호하려 했다. 그러나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가 카이피오를 변호하던 중 누군가가 던진 돌이 머리에 맞는 바람에 중상을 입는 사건이 벌어지자, 다들 겁을 먹고 나서지 않았다. 또다른 호민관 티투스 디디우스와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는 재판이 불법이라며 거부권을 행사하려 했다가 연설장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결국 카이피오와 막시무스는 유죄 판결을 받고 추방되었으며, 그들의 모든 재산은 몰수되었다.

기원전 102년 재무관에 선임된 그는 법무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와 함께 킬리키아로 가서 해적 토벌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이 임무가 어찌 되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킬리키아 해안을 따라 여러 요새를 세워서 속주민들이 해적에게 더 이상 시달리지 않게 했다는 것만 전해진다. 한편, 로마에서는 기원전 100년 12월 그의 동지였던 사투르니누스가 원로원으로부터 원로원 최종결의를 선고받고 추종자들과 함께 피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후 기원전 95년 집정관에 선임된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스스로 로마 시민이라고 자처하며 로마에 거주하는 모든 이탈리아인에 대해 조사를 엄격하게 실시해서 시민권을 증명하지 못한 사람들을 도시에서 추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크라수스와 동료 집정관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추종하는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려는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의 파벌의 지시를 수행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이로 인해 그는 더 이상 정치 경력을 이어가지 못할 위기에 몰렸다.

기원전 95년, 그는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에게 "호민관의 거부권을 묵살하고 폭행당하는 것을 방치"한 혐의로 고발당했다. 지난날 카이피오를 변호하려 했다가 머리에 돌을 얻어맞았던 스카우루스는 노르바누스를 파멸시키기 위해 기꺼이 당시 상황을 증언하려 했다. 그러나 노르바누스의 변호를 맡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오라토르는 그가 피고인에게 지극히 적대적이어서 증언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로 증인 채택을 거부했고, 재판관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 후 노르바누스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 후 동맹시 전쟁이 발발했고, 원로원은 동맹시들을 회유하기 위해 로마 시민권을 분배하고 정치 활동을 허가하기로 결의했다. 이리하여 정치 경력을 이어갈 수 있게 된 그는 기원전 87년 법무관이자 시칠리아 총독으로 선임되었다. 훗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시칠리아 속주민들을 심하게 착취한 가이우스 베레스를 법정에서 성토하면서, 노르바누스의 통치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했다.
"그 시칠리아 행정관은 농부가 준비한 만큼 농부에게 요구할 필요가 없었다. 농부는 호의로 유게룸(Jugerum: 고대 로마의 토지 측정 단위) 하나 당 메디므노스(medimnos: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곡물 측정 단위) 3개를 바치겠다고 했지만, 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농부는 추가로 수확한 밀이나 돈의 6%를 바치라고 강요받지 않았지만, 로마인들은 엄청난 양의 빵을 얻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동맹시 전쟁 당시 로마에 끝까지 저항했던 마르쿠스 람포니우스 등이 레기움 시를 공략한 뒤 시칠리아로 건너갈 계획을 세웠다. 노르바누스는 즉시 대규모 군대와 함대를 이끌고 레기움에 파견했고, 이탈리아인들은 엄청난 숫자의 적군이 몰려오자 공포에 질러 달아났다고 한다.

기원전 84년, 동료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를 토벌하기 위해 일리리아로 출정했다가 병사들의 폭동으로 살해된 뒤 유일한 집정관으로 군림하고 있던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는 주변의 강력한 권고에 못 이겨 이듬해 집정관 선거를 벌이기로 했다. 선거 결과 그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가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기원전 83년 초, 술라가 브룬디시움에 상륙하면서 술라의 내전이 발발했다. 그와 스키피오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술라를 토벌하고자 남하했다. 로마를 향해 천천히 진군하고 있던 술라는 티파타 산에서 가이우스 노르바누스의 군대와 처음으로 맞붙었다. 술라군은 이 전투에서 사상자 70명을 내면서 적병 6,000명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노르바누스는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카푸아로 후퇴했다. 이후 스키피오와 휴전 협상을 벌이는 척하면서 그의 병사들을 자기 편으로 회유해 별다른 전투 없이 스키피오를 제압한 술라는 카푸아에 있는 노르바누스에게 주의를 돌렸다. 술라는 그에게 대표단을 보내 회담을 요청했지만, 노르바누스는 아무런 회신 없이 대표단을 돌려보낸 뒤 술라군이 도착하기 전에 카푸아를 벗어났다.

그 후 북부 이탈리아 총독으로 부임한 그는 집정관 카르보의 휘하에 들어가 술라의 부관인 메텔루스 피우스와 대적했다. 그러나 파벤티아 시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9,000 ~ 10,000명 가량의 병사를 잃고 6,000명의 병사가 적에게 귀순하는 참패를 당한 뒤 1,000명의 병사를 수습해 리미니에 숨어서 메텔루스 피우스의 군대에 포위되었다. 이렇듯 상황이 나빠지자, 카르보의 부관 한 명이 술라와 내통했다. 그는 중요한 일을 완수해낼 경우 관대한 처분을 받는다는 약속을 받고, 카르보의 군관 한 무리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이중에는 노르바누스도 있었다. 노르바누스는 배반 가능성을 의심하고 참가하지 않았지만, 나머지 군관은 초대에 응했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모두 붙잡혀 처형되었고, 부관은 곧바로 술라 진영으로 달아났다. 노르바누스는 이제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로도스로 망명했다.

기원전 82년 로마에 입성한 술라는 대숙청을 단행하면서 로도스에 사람을 보내 그를 넘기지 않으면 엄중한 결과를 초래할 거라고 경고했다. 시민들이 이 문제를 놓고 고민에 빠지자, 노르바누스는 장터로 나가 자살했다.

그에게는 아들 가이우스 노르바누스가 있었다. 이 인물은 아버지의 부관으로서 술라와 맞섰으나 패배한 뒤 종적을 감췄다. 그의 아들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플라쿠스는 기원전 38년 집정관을 역임했으며,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아시아 총독에 부임하여 기원전 27년까지 아시아를 통치했다. 그는 페르가몬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자금을 보낼 수 있는 권리를 재확인해줬고, 유대인들은 그에게 보답하고자 동상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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