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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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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불명

1. 개요2. 생애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고대 로마의 오래된 평민 씨족인 도미티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여러 지파 중 개인이름으로 루키우스를 선호해 물려 사용한 아헤노바르부스 가 사람이다. 도미티우스 씨족은 모든 지파들이 개인이름으로 그나이우스를 사용했다. 그런데 아헤노바르부스 가문 사람들은 씨족 가문 전통대로 이 개인이름과 함께 루키우스를 사용했고, 이 개인이름을 그나이우스와 함께 대대로 아들 중 한명에게 물려줬다. 수에토니우스가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도미티우스 씨족에 속한 한 사람이 신성한 모습의 쌍둥이 청년을 만나서 그들에게 뺨을 어루만져지자 수염이 붉게 변했다. 이 인물은 아헤노바르부스(Ahenobarbus, "빨간 수염")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것이 그의 후손들에게 통칭이 되었다고 한다.

증조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기원전 192년에 아헤노바르부스 가문 최초로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조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기원전 162년 보결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아버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기원전 122년 집정관을 맡아 친로마 성향의 부족 아이두이 족에게 해를 입힌 알로브로게스 족과을 상대로 빈달리움 전투에서 알로브로게스 족을 격파했다. 그 후 기원전 121년 신임 집정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알로브로기쿠스와 함께 알로브로게스 족-아르베르니족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그러나 원로원은 현직 집정관으로서 그보다 높은 직위인 파비우스를 더 높게 평가해 두 사람이 개선식을 거행할 때 파비우스에게는 개선문을 수여했지만 도미티우스에게는 그러지 않았다. 이후 기원전 118년 식민도시 콜로니아 나르보 마르티우스(나르본)를 건설했으며, 이탈리아와 히스파니아를 연결하는 도로인 도미티아 가도를 건설했고, 기원전 115년 감찰관으로서 원로원 의원 32명을 추방했다. 형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기원전 96년 집정관, 기원전 92년 감찰관을 역임했다.

기원전 100년 12월 원로원에 의해 국가의 적으로 규정된 호민관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의 추종자들을 토벌하기 위해 포로 로마노에 모인 귀족 무리에 형과 함께했다. 기원전 97년 법무관에 선임되어 시칠리아에 파견되었다. 당시 시칠리아는 제2차 노예 전쟁이 막 진압되어 민심이 몹시 흉흉했다. 그래서 시칠리아에서 노예들이 무기를 소지하는 것이 금지되었는데, 그는 한 노예가 사냥용 창으로 멧돼지를 죽이자 즉시 체포한 뒤 십자가형에 처해, 너무 잔혹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이 일로 별다른 정치적 타격을 입지 않았고, 기원전 94년 노부스 호모(Novus Homo: 신참자)인 가이우스 코엘리우스 칼두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집정관 재임 동안 어떤 행적을 벌였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술라의 내전이 한창 진행중이던 기원전 82년, 프라이네스테에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군대와 맞서고 있던 소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지지자인 법무관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다마시푸스에게 전령을 보내 로마에 남아있는 인사들에게 로마를 떠나 카르보와 합류하라는 지령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대피하기 전에 처리해야 할 사람들의 명단도 함께 보냈다. 브루투스는 숙청 명단을 확인한 뒤 원로원을 소집한 후, 자객들을 풀어 명단에 든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그 중에는 그도 있었다. 그의 유해는 다른 희생자들과 함께 티베레 강에 던져졌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희생자들의 잘린 머리는 희생제에 쓰인 동물들의 머리와 함께 전시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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