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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켈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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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료일 : 무기한
사유 : IDC(AS26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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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불명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켈리오
라틴어: Lucius Cornelius Lentulus Cruscellio
생몰년도
미상 ~ 미상
출생지
사망지
지위
국가
가족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아버지)
술피키아(아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아들)
직업
로마 공화정 집정관
임기
기원전 38년
전임
동기
후임

1. 개요2. 생애

1. 개요[편집]

2. 생애[편집]

고대 로마의 대표적인 파트리키 가문인 코르넬리우스 씨족 렌툴루스 지파의 일원이다. 기원전 49년 집정관이며 카이사르의 내전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맞섰지만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패한 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함께 이집트로 피신했다가 살해당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의 아들로, 아그노멘 '크루스켈리오(Cruscellio)'는 크루스의 아들을 의미한다.

기원전 54년 시리아 전임 총독 아울루스 가비니우스를 원로원의 동의 없이 이집트로 쳐들어가서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복위시키고,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보낸 1만 달란트를 갈취한 혐의로 고발했다. 첫 재판에서는 가비니우스의 후원자인 폼페이우스가 비호해주고 고발측 변호인을 맡았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도 폼페이우스와의 관계를 고려해 말을 아끼는 모습을 보이면서, 배심원 70명 중 38명이 무죄 판결을 내리면서 패소했다. 하지만 첫번째 재판 직후 테베레 강이 범람하여 여러 주거지를 덮치는 일이 벌어지자, 민중은 신들이 명백한 범죄자의 무죄를 선고한 것에 분노했다고 여겼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비난했다. 이 분위기를 등에 업고 다시 고발해 이번에는 유죄 판결을 받아냈고, 가비니우스는 막대한 벌금을 내지 못하게 되자 망명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진 후 로마의 정국이 혼란에 빠지던 기원전 44년 무렵에 법무관을 역임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한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에 의해 숙청 대상으로 낙인찍혔는데, 아마도 카이사르와 맞서 싸웠던 아버지 때문인듯 하다. 그는 추적을 피해 시칠리아로 피신해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보호를 받았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아내 술피키아는 남편을 따라가기로 마음먹고 노예 소녀처럼 옷을 입고 2명의 노예 소녀와 2명의 노예 소년과 함께 시칠리아로 향했다. 시칠리아에 막 도착한 그녀는 남편을 곧 발견했다. 당시 렌툴루스는 썩은 음식을 먹으며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 도랑에서 뒹굴고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39년 미세눔 조약이 체결되면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 망명했던 정치인들이 로마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즉시 로마로 귀환한 뒤 안토니우스의 지지자가 되었고, 기원전 38년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함께 보결 집정관에 선임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기원전 3년 집정관이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는 그의 아들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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