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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타바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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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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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타바 전투
Marten's Poltava
시기
1709년 6월 27일
장소
원인
대북방전쟁 중 시작된 칼 12세의 러시아 원정
교전국
지휘관
스웨덴 해군기 칼 구스타브 렌셸드
병력
30,000명
75,000명
피해
6,900명 사망 및 부상 2,800명 포로
1,345명 사망 3,290명 부상
결과
루스 차르국의 결정적 승리
영향
스웨덴의 우위 상실, 칼 12세오스만 제국으로 도피로 인한 제5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발발, 루스 차르국이 전쟁의 우위를 가져가 스웨덴 제국의 종말의 시작을 알림
1. 개요2. 배경3. 전개4. 결말5. 영향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러시아어: Полтавская битва
스웨덴어: Slaget vid Poltava

폴타바 전투는 대북방전쟁이 진행되던 1709년 6월 27일, 동우크라이나의 폴타바에서 루스 차르국스웨덴 제국 사이에 벌어진 최대의 전투이다.

루스 차르국의 결정적인 승리로 끝났으며, 이후 전쟁에 전환점이 바뀌었다.

2. 배경[편집]

대북방 전쟁 초기 나르바에서 대패한 표트르 1세루스 차르국군스웨덴 국왕 칼 12세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싸우고 있는 틈을 타서 잉그리아 지역을 점령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세워 해군력을 증강하는 한편 군사력을 재정비하는데 성공하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를 굴복시켜 아우구스트 2세작센 선제후국으로 내쫓는 한편 친스웨덴파 귀족인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를 새 국왕으로 선출시킨 칼 12세는 표트르 1세가 점거한 잉그리아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고, 표트르 1세가 이를 거부하며 스웨덴과 루스 차르국의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1708년 그로드노에서 약 9,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친정한 표트르 1세는 소규모 부대만 이끌고 나온 칼 12세에게 쪽도 못쓰고 발린 후 이대로 가면 승산이 없다 판단하여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제외한 잉그리아 전역을 반환하고 도르파트와 나르바도 적절한 배상금을 지불하면 돌려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칼 12세는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내놓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고 엄포를 놓았고 이로서 양국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스웨덴군리투아니아 대공국벨라루스 일대를 가로질러 러시아 중부의 스몰렌스크를 공략하였으나 표트르 1세의 초토화전술과 강력한 방어에 휘말려 제대로 공략은 성공 못하고 군사력만 낭비하였다. 이에 방향을 돌려 우크라이나로 남하했는데 당시 우크라이나의 카자크 헤트만인 이반 마제파가 칼 12세를 적극 지원하여 루스 차르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일제히 봉기하였다. 허나 레스나야 전투에서 아담 루드비그 레벤하웁트(Adam Ludwig Lewenhaupt 1659~1719)가 이끌던 스웨덴 별동대가 루스 차르국군에 패배하면서 보급이 끊겼고 카자크 근거지가 제압당하면서 일부 카자크는 마제파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하고 루스 차르국에 충성을 다짐했다. 따라서 마제파가 약속했던 2만이 넘는 지원군은 5~7천 밖에 오지 않았다.

이와중에 1708년 말에서 1709년 초에 찾아온 엄청난 대한파 때문에 한동안 전투를 치르지 못 하고 전황이 지체되었던데다, 군량도 슬슬 떨어져가고 표트르 1세가 풀도 태워서 시간이 촉박해진 스웨덴-카자크 연합군은 결전을 위해 1709년 폴타바를 포위하였고 이에 표트르 1세는 자신이 직접 이끄는 정예병을 이끌고 우크라이나 폴타바로 진격하였다.

3. 전개[편집]

4. 결말[편집]

5. 영향[편집]

이 전투는 대북방 전쟁의 전환점이었다. 이 전투 후, 덴마크가 전선에 복귀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폐위된 아우구스트 2세가 복위하여 스웨덴에 대항했다. 그리고 발트해 지역은 1년 만에 루스 차르국에게로 넘어갔다. 전쟁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으나, 스웨덴의 우위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았다. 이 전투는 스웨덴에게 있어서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의미가 담긴 전투였다. 이후 루스 차르국은 1721년에 대북방전쟁에서 승리하여 러시아 제국이 되었다.

이 전투 후 스웨덴으로 돌아갈 길이 없어진 칼 12세는 패잔병과 함께 오스만 제국으로 도망쳤다. 표트르 1세는 칼 12세를 넘길 것을 요구했으나 파디샤 아흐메트 3세는 이를 거부 하였고, 칼 12세 또한 전쟁에 참여 할 것을 촉구해 결국 결국 루스 차르국과 전쟁을 하게 된다.

전쟁은 몰다비아 공국프루트 강 일대에서 주로 전투가 벌어졌다. 표트르 1세가 친정했으나 1711년 프루트 강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군에게 포위당했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왈라키아 등 정교회 신민들이 궐기할 것을 가정하고 일으킨 전쟁이었으나 이들이 모두 호응하지 않아 중과부적이었기 때문에 표트르 1세는 빠르게 항복하여 강화를 요청했다.

그래서 이 전쟁은 오스만 제국의 승리로 돌아갔다. 전후 처리를 위해 체결된 '프루트 조약'의 결과, 오스만 제국은 아조프의 영유권을 되찾고 몰다비아 일대의 루스 차르국 요새들을 점거하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군은 이 정도에서 만족하고 물러났기 때문에, 대북방전쟁 전체의 전황은 계속 루스 차르국에게 유리했고 결국 루스 차르국은 1721년 뉘스타드 조약으로 스웨덴 제국을 해체하고 발트해 진출에 성공했다.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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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만 표트르 1세는 얼굴마담이었고 실제로는 보리스 셰레메테프(Бори́с Петро́вич Шереме́тев 1652~1719)가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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