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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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순창과 옥천이 있으나, 옥천은 순창의 옛 지명이므로 옹씨의 본관은 순창(옥천) 하나로 볼 수 있다. 2015년 조사 결과 약 인구 837명.
흔히들 중국에서 온 성씨라고 오해하기도 하지만 현재 한국의 옹씨는 무려 삼한시대부터 시작된 성씨이다.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워 대대로 높은 관직과 훈작으로 영화를 누리던 명문으로, 시조 옹병태는 고려시대에 병부상서까지 지냈다. 그러나 이성계의 역성혁명 당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대다수의 옹씨가 은둔하였고, 후에 정읍, 순천 등으로 차례로 유배되는데, 이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가승(족보)이 사라졌다. 이 과정에서 성씨를 바꾸거나 감추는 이들도 많았고, 귀양갔다가 사망한 이들도 많았기 때문에 현재는 희귀 성씨 취급을 받고 있다.
허나 적은 인구수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순창군의 공생(貢生)으로 1546년(명종 1) 증광 진사시에 3등 64위로 입격하고 1553년(명종 8) 별시 문과에 병과 6위,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로 1556년(명종 11) 중시(重試) 문과에 병과 2위로 급제해 시정(寺正)에 오른 옹몽신(邕夢辰)[1]을 비롯한 과거 급제자 6명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도 2명 배출했다.
동학 농민 혁명 당시 옹방규(邕方奎)는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1894년 7월 경상도 하동도호부(現 경상남도 하동군)를 점령했고, 옹택규(邕宅圭)는 군의관 출신 대접주로서 1894년 8월 전라도 고부군에서 동학 농민 혁명에 참여했다.
흔히들 중국에서 온 성씨라고 오해하기도 하지만 현재 한국의 옹씨는 무려 삼한시대부터 시작된 성씨이다.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워 대대로 높은 관직과 훈작으로 영화를 누리던 명문으로, 시조 옹병태는 고려시대에 병부상서까지 지냈다. 그러나 이성계의 역성혁명 당시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대다수의 옹씨가 은둔하였고, 후에 정읍, 순천 등으로 차례로 유배되는데, 이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가승(족보)이 사라졌다. 이 과정에서 성씨를 바꾸거나 감추는 이들도 많았고, 귀양갔다가 사망한 이들도 많았기 때문에 현재는 희귀 성씨 취급을 받고 있다.
허나 적은 인구수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는 전라도 순창군의 공생(貢生)으로 1546년(명종 1) 증광 진사시에 3등 64위로 입격하고 1553년(명종 8) 별시 문과에 병과 6위,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로 1556년(명종 11) 중시(重試) 문과에 병과 2위로 급제해 시정(寺正)에 오른 옹몽신(邕夢辰)[1]을 비롯한 과거 급제자 6명을 배출하기도 하였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도 2명 배출했다.
동학 농민 혁명 당시 옹방규(邕方奎)는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1894년 7월 경상도 하동도호부(現 경상남도 하동군)를 점령했고, 옹택규(邕宅圭)는 군의관 출신 대접주로서 1894년 8월 전라도 고부군에서 동학 농민 혁명에 참여했다.
중화권의 성씨. 중국어 발음은 웡(Wōng).
중국에서는 100위 안에도 못 들 정도로 흔한 성은 아니지만, 대만에서는 약 9만 3000명 47위로 꽤 흔하다.
중국에서는 100위 안에도 못 들 정도로 흔한 성은 아니지만, 대만에서는 약 9만 3000명 47위로 꽤 흔하다.
- 옹고집 - 옹고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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