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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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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라틴어: Marcus Claudius Marcellus
생몰년도
미상 ~ 기원전 177년
출생지
사망지
지위
국가
가족
직업
로마 공화정 집정관
임기
기원전 196년
전임
동기
후임

1. 개요2. 생애

1. 개요[편집]

로마 공화국집정관. 인수브레스족, 보이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식을 거행했다.

2. 생애[편집]

고대 로마의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 중 하나인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평민 지파인 마르켈루스 가문 출신이다. 아버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시라쿠사 공방전을 승리로 이끌고 한니발 바르카와의 대결에서 선전하며 5차례 집정관을 역임했다. 고대 사료는 아버지가 조영관을 맡던 시절에 벌어진 에피소드를 다룰 때 그를 처음으로 언급했다. 호민관 또는 보조 조영관을 맡던 가이우스 스칸티니우스 카피톨리누스가 어린 아들을 타락시키려 하자, 아버지 마르켈루스가 격분해 소송을 제기했다. 스칸티니우스는 이를 부인했지만, 그는 눈물을 흘리며 모든 걸 털어놨고, 원로원은 순수한 어린이가 거짓말을 할 리 없다고 보고 스칸티니우스에게 무거운 벌금을 부과했다. 아버지 마르켈루스는 스칸티니우스로부터 받은 배상금으로 은 그릇을 제작한 뒤 신들에게 바쳤다고 한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208년, 그는 아풀리아에서 한니발 바르카에 대적하던 아버지의 트리부누스 밀리툼이었다. 양군은 나무가 우거진 언덕에 분리된 채 한동안 대치하고 있었다. 아버지 마르켈루스는 개인적으로 정찰을 수행하기로 하고, 250명의 분견대와 동료 집정관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 그리고 아들과 함께 언덕으로 향했다. 그런데 한니발이 전날에 언덕에 매복해뒀던 기병대가 그들을 덮쳤고, 아버지 마르켈루스와 로마 기병 40명이 전사했다. 크리스피누스와 아들 마르켈루스는 가까스로 달아났는데, 크리스피누스는 중상을 입은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며칠 만에 사망했다. 그 역시 부상을 입었지만 살아남았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한니발은 아버지 마르켈루스의 시신을 화장한 뒤 재를 담아서 아들에게 보내도록 했다. 아들 마르켈루스는 아버지의 유골함을 받은 뒤 장례식 연설을 발표했는데, 루키우스 코엘리우스 안티파테르의 역사서에 그 내용이 실렸고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가 이를 인용했다. 기원전 205년, 아들 마르켈루스는 아버지 마르켈루스가 집정관을 처음 맡았던 기원전 222년에 한 서약을 이행하기 위해 아버지가 세운 명예와 미덕의 사원(Aedes Honoris et Virtutis)의 봉헌식을 개최했다.

기원전 204년 호민관에 선출된 그는 아프리카 원정을 떠날 준비를 하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레가투스인 퀸투스 플레미니우스가 이끄는 분견대가 이탈리아의 로크리 시에서 잔학 행위를 저지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조직된 위원회의 일원이 되었다. 위원회는 필요하다면 스키피오를 체포하고, 이미 아프리카로 출발했다면 돌아오라고 지시하려 했다. 그러나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를 비롯한 다른 원로원 의원들이 스키피오를 옹호했기 때문에 실제로 시행되지 않았다. 기원전 200년 조영관에 선임된 그는 빈민들에게 낮은 가격으로 곡물을 판매하고 검투사 대회를 대규모로 조직했으며, 우라노스 사원에 5개의 동상을 세웠다. 기원전 198년 법무관에 선임되었고 시칠리아를 통제하는 임무를 맡았다.

기원전 196년, 루키우스 푸리우스 푸르푸레오와 함께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당시엔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두 지휘관은 마케도니아 방면 지휘권을 맡아서 군공을 세우길 갈망했다. 하지만 전직 집정관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국왕 필리포스 5세를 격파한 뒤 휴전을 맺었고, 기원전 196년 초 마케도니아 사절이 로마에 도착하여 최종 협약을 체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집정관은 마케도니아의 지휘권을 갈망해, 필리포스 5세를 이 기회에 끝장내야 하니 전쟁을 재개하자고 강력히 권했다. 그러나 호민관 퀸투스 마르키우스 라일라와 가이우스 아티니우스 라베오는 민회에서 35개 부족을 소집해 모든 부족이 평화 조약 체결을 찬성한다는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결국 두 집정관은 북이탈리아 방면에서만 군사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 후 마르켈루스는 보이족의 영역을 침공했다. 처음에는 보이족의 예상치 못한 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지만, 전열을 재정비한 뒤 인수브레스족을 물리치고 콤 시 및 28개 요새를 공략했다. 뒤이어 동료 집정관 루키우스 푸리우스 푸르푸레오의 군대와 연합해 보이족을 격파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이 전투 이후 자기들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동족에게 전할 수 있었던 보이족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는 마르켈루스와 푸리우스가 보이족을 거의 마지막 사람까지 몰살시켰다고 기록했다. 현대 학자들은 고대 역사가들이 과장했다고 보지만 보이족이 막심한 피해를 입은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기원전 196년 로마로 귀환한 마르켈루스는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 후 카르타고에서 온 사람이 한니발 바르카가 셀레우코스 왕조안티오코스 3세와 동맹을 맺고 로마를 대적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전하자, 원로원은 막 집정관 임기가 만료된 그와 퀸투스 테렌티우스 쿠리오, 그나이우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 등을 카르타고에 사절단으로 파견해 한니발을 로마에 인도할 것을 요구하게 했다. 한니발은 이 소식을 듣고 동방으로 도주했다. 기원전 193년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메룰라 휘하의 레가투스(Legatus: 군단장)로서 갈리아인들과의 전투에 참여했다. 이 전투는 승리로 끝났지만, 마르켈루스는 많은 원로원 의원에게 보내는 사적인 편지에서 메룰라를 비판했다. 이에 따르면 메룰라는 예비대를 투입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상황에서 끝까지 투입하지 않았으며 기병대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메룰라가 이 문제로 인해 로마로 소환된 후, 그는 대리로 메룰라의 군대를 이끌었다.

기원전 189년, 그는 감찰관 후보로 출마했다. 이 선거엔 그 외에도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플라쿠스, 대 카토,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가 참여했다. 이중 기원전 191년 안티오코스 3세를 상대로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글라브리오의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아보였다. 이때 카토가 전 사령관이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횡령했다고 비난했다. 이에 두 명의 호민관이 글라브리오를 재판에 회부했고, 카토는 증인석에 서서 자신이 그리스에서 본 금은 그릇 중 일부가 개선식이 벌어지는 동안 사라졌다고 주장했다. 이에 글라브리오는 카토를 위증 혐의로 고발했지만 곧 감찰관 입후보를 취소했고, 카토에 대한 고발 역시 취소되었다. 그러나 사령관으로 모셨던 이를 가차없이 고발한 그에 대한 유권자들의 반감이 커졌고, 결국 대 카토는 낙선했다. 선거 결과 그와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감찰관에 당선되었다. 두 감찰관은 원로원 의원 명단에서 4명을 제외하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프린켑스 세나투스로 세웠다. 또한 도로를 포장하고 원로원 건물을 요새화했으며, 에퀴테스을 받은 이들의 자격을 조사했다.

기원전 186년, 마르켈루스는 바커스를 모시는 비밀 의례인 바카날리아에 가담한 인사들 처리를 집정관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와 스푸리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에게 일임한다는 원로원 법령에 서명했다. 이후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 않다가 기원전 177년에 사망했다.

아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는 집정관을 3번 역임했으며, 명예와 미덕의 사원에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자신의 조각상을 세우고 "9번 집정관을 역임한 3명의 마르켈루스(tres Marcelli novies consules)"라고 적힌 비문을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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