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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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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
라틴어: Marcus Cornelius Cethegus
생몰년도
미상 ~ 기원전 196년
출생지
이탈리아 로마
사망지
지위
국가
가족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조부)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아버지)
직업
로마 공화정 집정관
임기
기원전 204년
전임
동기
후임
1. 개요2. 생애

1. 개요[편집]

로마 공화국 집정관, 감찰관.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시칠리아와 북이탈리아에서 활약했다.

2. 생애[편집]

고대 로마의 저명한 파트리키 가문인 코르넬리우스 씨족의 일원이다. 그는 기원전 197년 집정관 가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와 함께 고대 사료에서 언급된 코그노멘 케테구스(Cethegus)의 첫번째 사용자였다. 기원전 5세기부터 아우구스투스 통치 시기까지 이어지는 로마 공화국의 최고 행정관 목록을 담은 파스티 카피톨리니(Fasti Capitolini)에 따르면, 그의 조부와 아버지 모두 마르쿠스라는 프라이노멘을 사용했다고 한다. 기원전 197년 집정관 가이우스의 조부 역시 마르쿠스였다. 학자들은 두 케테쿠스가 할아버지를 공유했으며 서로 사촌 관계라고 추정한다.

그는 젊은 시기에 유피테르 신전의 플라멘 디알리스(Flamen Dialis)에 선임되었지만 규정 위반으로 인해 해임되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희생제를 치른 동물의 내장을 파헤치는 동안 적절한 조치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면 발레리우스 막시무스에 따르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로마 시 바깥으로 평생 나가사는 안 되는 규정을 어겼다가 쫓겨났다고 한다.

기원전 231년 집정관이자 친척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카브디누스가 기원전 213년에 사망한 뒤, 그가 카브디누스를 대신해 사제단의 일원이 되었다. 같은 해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함께 조영관을 맡았다. 폴리비오스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형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가 형과 함께 조영관에 선출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그를 전혀 언급하지 않지만, 학자들은 폴리비오스가 오류를 범했다고 본다. 그들은 호화로운 로마 경기를 조직하고 올리브 오일을 시민들에게 보급한 것으로 전해진다.

기원전 211년 법무관을 맡은 그는 먼저 아풀리아에 갔다가 다시 시칠리아로 보내졌다. 당시 이 섬에서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시라쿠사 공방전에서 승리한 후에도 혼란이 끝나지 않았다. 카르타고군이 잇따라 파견되어 여러 도시를 점령했고, 누미디아 기병대가 시칠리아 각지를 황폐화시켰으며, 현지 군인들은 싸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군대의 기강을 재정비한 뒤 카르타고에게 잃어버린 많은 도시를 탈환했다. 이후 마르켈루스가 시칠리아인들에게 지나치게 잔인하게 굴었고 착취를 일삼았다고 주장하며, 이를 입증하기 위해 많은 그리스계 시칠리아인을 로마로 보내 마르켈루스의 만행을 증언하게 했다. 하지만 원로원한니발 바르카를 상대할 적임자는 마르켈루스 뿐이라고 여겼기에 고발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원전 209년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와 함께 감찰관에 선출되었다. 집정관을 아직 역임하지 않은 두 사람이 감찰관에 선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티투스 리비우스 파타비누스에 따르면, 카테구스는 티투스 만리우스 토르콰투스를 프린켑스 세나투스에 선정하려 했지만 투디타누스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프린켑스 세나투스에 선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는 투디타누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파비우스를 프린켑스 세나투스에 선정했다. 한편 마르쿠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등 8명을 도덕적 해이 혐의[1]로 원로원에서 추방했으며, 칸나이 전투 때 기병대로 복무했으나 적 기병을 상대로 무기력하게 무너진 자들의 말을 몰수하고 복무 기간을 늘렸다.

기원전 204년, 그는 푸블리우스 셈프로니우스 투디타누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그는 아프리카 원정을 준비하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분견대가 로마의 동맹시인 로크리 시를 약탈한 사건을 조사하는 위원회를 주관했다. 위원회는 사건 조사를 위해 스키피오를 로마로 소환하기로 결의했지만, 전령이 이를 알리기 전에 스키피오가 아프리카로 떠나면서 소환 명령은 흐지부지되었다. 그 후 기원전 205년 보병 12,000명과 기병 2000명을 이끌고 리구리아에 상륙한 뒤 갈리아인들을 포섭하여 에트루리아로 진군할 태세를 보이던 마고 바르카를 막기 위해 북이탈리아로 보내졌다. 그는 마고의 선동에 따라 반란을 일으킨 에트루리아인들을 진압하고 마고를 지지하던 많은 에트루리아 귀족들을 처형했지만, 마고가 주둔지로 삼은 제노바로 함부로 진격하지 않았다.

기원전 203년, 로마는 공세를 감행하기로 결의했다. 전직 집정관으로서 갈리아 키살피나 총독이 된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와 법무관 푸블리우스 퀸틸리우스 바루스는 4개 군단을 이끌고 제노바로 진격했다. 그러다가 인수브리아(현재 밀라노 인근)에서 마고의 군대와 마주쳤다.(인수브리아 전투) 당시 마고에게는 21,000명의 군대와 7마리의 코끼리가 있었으며, 로마군은 4개 군단 35,000명에 달했다. 마고는 병력이 열세한 데다 갈리아인들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승리하기 어려울 거라고 보고, 갈리아 신병들과 몇 마리의 코끼리를 후방에 배치해 퇴로를 열어두게 하고, 카르타고인과 코끼리들을 최전방에 배치했다.

카르타고군은 로마군의 강력한 공세에 굳건히 버텨서 여러 차례의 공격을 모조리 물리쳤다. 이에 바루스는 3천에서 4천 가량의 기병대에 돌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마고는 코끼리들을 최전선으로 이동시켰고, 로마 기마들은 코끼리를 보고 공포에 질려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이리하여 로마 기병들이 혼란에 빠지자, 누미디아 기병들이 출격해 로마 기병들을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히고 사방으로 도주하게 했다. 이후 코끼리들은 최전선의 로마 보병대를 공격해 막심한 피해를 입혔다.

여기까지는 마고의 생각대로 되었지만, 케테구스가 후방에 있던 2개 군단을 투입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코끼리들은 투창 세례를 받고 대부분 죽었고, 남은 코끼리들은 매우 흥분해 날뛰다가 카르타고군의 전열을 흐트러놨다. 로마군은 이 틈을 타 총공격했고, 카르타고군은 심한 압박을 받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고는 후방에 있던 갈리아인을 출격해 로마군의 공세를 저지하게 한 뒤,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제노바로 철수했다. 로마군은 힘겨운 전투를 치른 데다 기병대가 무너졌기 때문에 추격하지 못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카르타고군은 이 전투에서 5,000명의 병사가 전사했고 마고가 허벅지에 창이 찔려 중상을 입었다고 한다. 반면 로마군은 2,300명의 병사를 잃었고 수많은 이가 중상을 입었으며, 3명의 트리부누스 밀리툼이 전사했다. 특히 기병대가 완전히 붕괴되어 더 이상 전투에 투입될 수 없었다.

그 후 제노바에서 농성하는 마고와 대치하다가 마고가 카르타고 본국으로부터 소환 명령을 받고 아프리카로 귀환하자 로마로 돌아왔다. 기원전 196년에 사망했다고 전해지며, 후손은 알려진 바 없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저서 <웅변가에 대하여>에서 그를 로마 최초의 웅변가라고 밝혔다. 다만 그의 연설문은 전혀 전해지지 않으며, 오직 퀸투스 엔니우스의 다음 시에서만 그가 웅변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덧붙었다.
그의 동지에게 충실한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케테구스는
달쿰한 연설로 투디타누스를 구해냈다.
마르쿠스는 연설가로 태어났도다.
[1] 칸나이 전투 후 해외로 망명하려 했고, 전시에 사치를 부렸다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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