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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트 폰 티펠슈키르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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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료일 : 무기한
사유 : IDC(AS26496)
토론 역사
나치 독일 국장(화이트) 독일 국방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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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과대장 OF-8
General der Waffengattung / Admiral
Si 4b / 200px-WMacht Lw ... / AA-3A

공병대장
발터 쿤체
중장 OF-7
Generalleutnant / Vizeadmiral
Si 5a / 1256px-WMacht Lw... / AA-4A
-
소장 OF-6
Generalmajor / Konteradmiral
Si 6a / 200px-WMacht Lw ... / AA-5A
-
※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독일 국방군의 상급대장과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 독일 국방군 해군, 즉 크릭스마리네에만 있는 준장 계급은 미군의 대령에 상응
※ 윗 첨자 : 전사
Kurt von Tippels...
이름
Kurt von Tippelskirch
쿠르트 폰 티펠슈키르히
출생
사망
최종 계급
Si 4b 육군 보병 대장
주요 참전
주요 서훈
백엽 기사십자 철십자장

1. 개요2. 제2차 세계 대전
2.1. 동부전선 초기2.2. 데미얀스크 전투2.3. 이탈리아 8군2.4. 동부전선 말기2.5. 베를린 전투2.6. 이후
3. 여담

1. 개요[편집]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나치 독일 독일 국방군의 군인. 최종계급은 보병 대장이다.

2.1. 동부전선 초기[편집]

1941년 1월 5일, 제30사단장으로 임명된 티펠슈키르히는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전하게된다. 이후, 티펠슈키르히의 30사단은 폴라강(Reka Pola)에 주둔한 돌격하는 소련군을 막아낸 후, 반격을 시도했고, 전투는 일주일동안 지속되었다, 조금씩 조금씩 밀고나가 마침내 소련군을 격퇴시키고 폴라강을 건너 목표를 달성하였다. 이에 공로를 인정받아 티펠슈키르히는 30사단을 대표해,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여받았다.
1942년 초, 이후 계속 별 전투 없이, 진군만하던 제30사단은 데미얀스크 전투에서 포위되었고, 티펠슈키르히는 데미얀스크에서 빠져나오라는 지시를 받았고, 이후 탈출했다.

2.3. 이탈리아 8군[편집]

1942년 8월, 티펠슈키르히는 돈강 근처 이탈리아 8군의 연락 장교가 되었고, 이는 티펠슈키르히 인생에서 힘든 시기가 되었는데, 고집불통 이탈리아군은 티펠슈키르히의 전략적 조언을 무시하였고, 그해 말 이탈리아 8군은 그 악명높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그후 티펠슈키르히는 1943년 2월, 12군단 사령관으로 재배치 되었다.

2.4. 동부전선 말기[편집]

1944년 6월 4일, 지휘관이 점점 부족해지던 독일은 티펠슈키르히를 제4군 사령관 고트하르트 하인리치의 후임으로 재배치하였다. 4군 사령관에 부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44년 6월 22일 동부전선에서 바그라티온 작전이 개시된다. 압도적인 제2벨라루스전선군의 공격으로 중부집단군의 4군은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된다. 모길레프 지역을 방어 중이던 티펠슈키르히의 4군은 점점 포위당할 위험이 증가하자 반복적으로 후퇴를 요청을 했다. 하지만 히틀러의 고집으로 후퇴허가가 너무 늦어지게 된다. 뒤늦은 허가 이후 독일 제4군 병력은 큰 피해를 입으면서 드네프르 강과 베레지나강을 건너 간신히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후퇴작전 동안 제4군은 사방에서 소련군의 공격과 추격을 받았고 군단장 2명을 비롯해 고위장교들이 소련군의 공습에 노출되어 전사했다. 제4군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고 예하 부대들간에 통신과 연락마저도 불안정해졌다. 티펠슈키르히는 직접 슈토르히 정찰기에 탑승하여 동분서주하며 후퇴작전을 통제하고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소련군이 제공권을 장악한 상태였기 때문에 큰 위험을 감수한 행동이었는데 이 와중에 그가 탑승한 슈토르히기는 대공사격에 피격되어 격추될 뻔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소련군 3개 전선군이 4군을 쫓아가 포위했고, 결국 1944년 7월 1일 민스크 동쪽에서 4군 병력 대부분이 포위되었다. 4군은 1944년 7월 8일 항복했고 한명을 제외한 군단장 및 사단장 전원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는 비참한 운명을 맞았다. 앞서 7월 1일 무렵 제4군의 전멸이 확실해지자 티펠슈키르히는 부하들에 합류하여 최후를 함께 하려했다. 하지만 제4군 참모장인 에리히 데슬레펜 대령이 포위망에서 같이 죽거나 항복할 게 아니라 살아남아 계속 싸울 것을 강권했고 티펠슈키르히는 이를 받아 들여 뜻을 접었다.

1944년 7월 18일 그는 비행기 추락으로 부상을 입었고, 7월 30일, 모길레프 지역 지연전 공로로, 백엽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여받았다. 10월 31일, 로레인에 있는 1군으로 재배치된 티펠슈키르히는, 오토 폰 크노벨스도르프의 후임으로 1군 사령관으로 배치되었다.

이후, 12월 13일, 이탈리아 전선의 14군 사령관으로 배치되었고, 1945년 2월 말까지, 지휘했다. 1945년 4월 말, 브란덴부르크에 주둔한 급조된 국민돌격대로 이루어진 21군으로 다시 배치되었다.
항복 직전 4월 29일, 고트하르트 하인리치가 비스툴라 집단군 사령관에서 해임되고, 빌헬름 카이텔 원수는 임시로 비스툴라 집단군 티펠슈키르히를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그후 연합군과 협상을 하게되고, 1945년 5월 2일 미군에게 항복했다.
이후는 책을 쓰며 평범한 동네 할아버지처럼 살다가 1957년 사망했다.

3. 여담[편집]

위에 사진만 봐도 알겠지만, 엄청난 노안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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