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폰 자이틀리츠-쿠르츠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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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독소전쟁이 일어나자 보병사단장으로 종군한 폰 자이틀리츠쿠르츠바흐는 데미얀스크 전투에서 포위망을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포병대장으로 승진한 후 제51군단장으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상급대장의 제6군 휘하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참전한 폰 자이틀리츠쿠르츠바흐는 제6군이 포위되자 적극적으로 항복을 주장해 파울루스와 함께 포로가 되었다.
1943년 1월에 소련군에 항복한 그는 적극적으로 반나치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독일장교동맹[3]을 결성하여, 비협조적인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에른스트-에버하르트 헬 등의 국방군 장성급 포로들을 여기에 가담시켰다. 나중에 독일 자유국민 위원회에 흡수되어 멤버가 되었다.
이 때문에 폰 자이틀리츠쿠르츠바흐의 전 재산과 명예는 나치 독일에 의해 반역자로 규정되어 몰수당하고 궐석재판에서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폰 자이틀리츠쿠르츠바흐는 소련군 포로를 거느리고 아군과 싸운 안드레이 블라소프 중장처럼 독일군 포로로 이루어진 의용부대를 이끌고 소련측에 가담하여 베를린에 공수낙하한 뒤 독일 국방군 내부의 반 히틀러 동지들과 함께 히틀러 타도를 주장했지만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한 장군들 및 소련의 비협조로 실제로 이행되지는 못했다.[4]
이 때문에 폰 자이틀리츠쿠르츠바흐의 전 재산과 명예는 나치 독일에 의해 반역자로 규정되어 몰수당하고 궐석재판에서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폰 자이틀리츠쿠르츠바흐는 소련군 포로를 거느리고 아군과 싸운 안드레이 블라소프 중장처럼 독일군 포로로 이루어진 의용부대를 이끌고 소련측에 가담하여 베를린에 공수낙하한 뒤 독일 국방군 내부의 반 히틀러 동지들과 함께 히틀러 타도를 주장했지만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한 장군들 및 소련의 비협조로 실제로 이행되지는 못했다.[4]
말년의 폰 자이틀리츠쿠르츠바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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