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선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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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선정전 昌德宮 宣政殿 | |
소재지 |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
수량 | 1동 |
지정연도 | 1985년 1월 8일 |
제작시기 | 조선시대, 1405년 창건, 1647년 중건 |
선정전[1] |
〈동궐도〉 선정전 일곽[5] |
자세한 내용은 창덕궁 선정문 문서 참고하십시오.
- 현재 남아있는 궁궐 건물 중 유일하게 청기와 지붕이다. 왜냐하면 1647년(인조 25년)에 다시 지을 당시, 인경궁의 편전 광정전 건물을 헐어다 지었기 때문이다. 인경궁은 광해군이 궁궐 건설에 집착하여 세운 새 궁궐[6] 중 하나로 대부분의 지붕을 염초를 사용한 청기와로 만들었다. 인조 시기 인경궁을 훼철하면서 대부분의 건물들을 창덕궁과 창경궁 재건 공사에 활용했는데 선정전도 그 중 하나였기에 청기와 지붕인 것이다. 이 때 옮겨온 창덕궁과 창경궁의 건물들은 이후 순조 때 일어난 화재로 거의 대부분이 불탔지만 선정전만큼은 옮겼을 때 모습 그대로이다. 즉, 유일한 청기와 건물일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인경궁 전각이다. 사족으로 같은 청기와 건물인 인경궁의 정전 홍정전은 몸체가 많이 바뀐 후[7] 내전의 경훈각 건물이 되었는데 1917년에 불에 타 없어졌다.
- 1956년, 한국전쟁 직후에 찍은 선정전의 모습바뀐 선정전 외부(1980년대의 모습)바뀐 선정전 내부(1980년대의 모습)
- 내부 복원 이전 선정전내부 복원 이후 선정전내부는 칸막이 없이 하나의 공간으로 뚫려있으며 대들보 위를 우물천장으로 가려 서까래가 바로 보이지 않게 했다. 그리고 실내에도 단청을 칠하여 보존성을 높임과 동시에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제일 북쪽 중앙에 옥좌가 있으며 당가[9]를 설치하여 왕의 권위를 돋보이게 했다. 옥좌는 경복궁 사정전처럼 단 위에 있다. 일제 시기에 단이 철훼되었고, 1997년 선정전 일곽 복원 시에도 단순하게 옥좌만 놓였을 뿐, 단은 복원되지 못했다가 2021년 ~ 2022년에 와서야 복원되었다. 다만 기본적인 단청만 칠해져 있고, 세세한 부분은 아직 도색되지 않았다. 당가 위에는 봉황 두 마리 조각이 걸려있다.
[1] 첫 번째 사진 출처 - 내 손안에 서울.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세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조선시대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고 고치를 거두던 의례.[3] 존호를 올릴 때 함께 올리던 옥책과 금보를 말한다.책담는 보따리 말고[A] 4.1 4.2 혼전(魂殿): 임금과 왕비 신위를 임시로 봉안하던 곳. 빈전(殯殿): 상여가 나갈 때까지 왕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던 곳.[5] 붉은 원이 원래의 선정문이고 푸른 원이 현재 선정문이다.[6] 인경궁, 경덕궁(영조 연간에 경희궁으로 바뀐다.), 자수궁.[7] 이런 전각을 옮길 경우엔 옮긴 후에도 원래 용도와 비슷하게 사용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창덕궁엔 이미 인정전이 있었기 때문에 같은 용도로 사용할 수 없어 건물의 골격을 바꾼 뒤 다른 용도로 사용한 듯 하다.[9] 옥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 모형.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세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조선시대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고 고치를 거두던 의례.[3] 존호를 올릴 때 함께 올리던 옥책과 금보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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