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 BACK << -|- >> HOME <<)

창덕궁 봉모당

최근 수정 시각:
편집
현재 사용중인 아이피가 ACL그룹 IDC #12915에 있기 때문에 편집 권한이 부족합니다.
만료일 : 무기한
사유 : IDC(AS26496)
토론 역사
분류
[ 펼치기 · 접기 ]
농포
소요암 옥류천
신선원전 진설청
사가정
천향각
산단
백운사
천성동
태청문
청연각
외삼문
척뇌당
관람정
반도지
부군당
반빗간
태일문
통벽문
우신문
국출신직소
수인문
장양문
장락문
어수당
애련지
불로문
석거문
금마문
영춘문
어수문
부용지
춘당대 서총대
서소
개유와 열고관
창송헌
습취헌
영모당
경훈각 징광루
수랏간
태화당
재덕당
요휘문
경극문
여춘문
병경문
선원전 진설청 내재실
만수문
건중문
영안문
만안문
관광청
건인문
책고
어휘문
연경문
만복문
향실
해당정 수방재
연영합 평원루
취명문
운한문
영의사
서방색
소주방
선화문
자시문
보화문
숭범문
선전관청
영현문
전의사
협문
훈국초관인직소
내삼청
광범문
내반원
훈국초관인직소
문서고
궁방 사옹원
등촉방
대은원
훈국군파수직소
정청
육선루
악기고
상서성
연영문
무예청
장락문
주명문
남소
위장청
+
대청
공상청
누국
수문장청
일영대
결속색
정색
내병조
(창덕궁관리소)
호위청
상서원
배설방
금위군번소
패장직소
별감방
전루
문기수번소
무비사
의장고
전설사
빈청
(어차고)
군옥재
춘방
수문장청
수문장청
교자고
상의원
치미각
계방
등룡문
원역처소
사주문

창덕궁 봉모당
昌德宮 奉謨堂
소재지
건축시기
1777년 (창건)
1857년 (이전 건립)
2004년 (복원)
external/dunggu....
봉모당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3D 영상
1. 개요2. 이름3. 역사4. 구조5. 향나무 (천연기념물 제194호)

1. 개요[편집]

창덕궁 궐내각사 구역에 있는 건물이다. 규장각의 부속 건물이다.

역대 임금들의 글씨, 어진, 도장, 족보, 고명, 유고, 장지 등을 보관하던 곳이었다.

2. 이름[편집]

'봉모(奉謨)' 뜻은 '모훈(謨訓) 자료를 봉안(奉)한다'이다.# 모훈은 ‘후대 임금들에게 귀감을 줄만한 교훈’이다.

3. 역사[편집]

정조는 즉위 직후인 1777년(정조 1년)에 창덕궁 후원에다 주합루를 짓고 그곳에 규장각을 두었다. 그리고 부용정 서북쪽에 있는 옛 열무정의 이름을 봉모당으로 바꾸고 선대왕들의 유품을 보관했다. 규장각의 규모가 커져서 1781년(정조 5년)에 옛 오위도총부 자리에 규장각을 옮겼을 때도 봉모당은 자리를 지켰다.
동궐도 봉모당
《동궐도》의 봉모당. 열무정 시절의 모습이다.
그러나 공간이 좁아 많은 유품을 보관하기 힘들어지자, 1857년(철종 8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동궐도 현재 봉모당 터
《동궐도》에 나온 현재 봉모당 일대. 붉은색 원 안이다.
1908년(융희 2년) 규장각 기구를 분과별로 나누면서 봉모당 관련 일은 전모과(典謨課)에서 담당했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에는 기존의 건물을 헐고 옛 소유재 터에 일본식 건물을 새로 지어 족보 종류를 뺀 왕실 자료를 보관했다.[1] 8.15 광복 이후 1969년 7월에 일본풍 전각을 철거하고 자료를 분산 배치했는데 그 중 일부는 창경궁 장서각에 두었다. 그리고 1981년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2]으로 옮겼다.#

문화재청에서 2000년 ~ 2004년에 복원했고 2005년부터 일반에 개방하여 오늘에 이른다.

4. 구조[편집]

  • 장대석 2단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다. 기단 상부에는 전돌을 깔고 기단 앞에는 댓돌을 3개 두었다.
  •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 공포는 초익공[4]이다. 창방과 장여 사이에 소로를 두었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로 마감했다. 용두는 용마루 위에 2개, 추녀마루 위에 2개 올렸다. 지붕 측면의 합각은 나무판으로 마감했다.
  • 정면 5칸, 측면 3칸, 총 15칸이다. 전체 실내 바닥에 마루를 깔았다.
  • 정면 외면에는 띠살을 달았다. 교창과 머름은 없다. 나머지 칸 외면은 전부 중인방을 두고 위, 아래를 으로 마감한 형태이다.
  • external/www.dap...
    봉모당 북쪽 책고[5]
    봉모당 서쪽과 북쪽에 각각 을 보관하던 책고가 있다. 책고는 맞배지붕에 홑처마, 민도리 양식이며 출입문과 교창을 제외하고 전부 붉은 나무판으로 벽을 마감했다. 고막이벽 가장자리에는 구멍을 뚫어 환풍 기능을 하게 했다. 《동궐도형》을 보면, 두 책고 다 6칸이었으나, 지금은 아래의 향나무로 인해 복원할때 서쪽 책고가 5칸으로 한 칸 줄었다.

5. 향나무 (천연기념물 제194호)[편집]

봉모당 향나무
봉모당 향나무[6]
동궐도 향나무
《동궐도》의 봉모당 향나무. 초록색 원 안이다.
봉모당 마당에 향나무가 있다. 그러나 현재 일반인이 봉모당 마당으로 들어갈 수 없는 관계로, 창덕궁 후원 관람의 마지막 코스로써 볼 수 있다.

수령을 700년 ~ 750년 정도로 추정한다고 한다. 추정이 맞다면 무려 조선 건국 이전부터 살아있는 나무이다. 그래서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1968년 3월 4일에 천연기념물 제194호로 지정한 후 보호하고 있다.

나무의 모양이 일반 나무들처럼 곧게 뻗지 않고, 구부러져있다. 높이는 6m, 뿌리부분 둘레는 5.9m, 가슴높이 둘레는 4.3m이다.[7] 가지 역시 위가 아닌 수평으로 뻗어있다. 동서남북으로 1개 씩 뻗었는데, 동서길이 11.5m, 남북길이 5.5m이다. 단, 북쪽 가지는 현재 죽었고 남쪽 가지는 잘렸으며##, 동쪽 가지는 꼬불꼬불하다.

2010년 태풍 곤파스의 영향으로 손상을 입었다. 향나무의 윗부분이 반 정도 꺾이고 가지 일부도 부러졌지만, 다행히 나무 자체는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다. 부러진 가지는 왕실 제사 때 향피우는 용도로 사용한다고 한다.#
[1] 족보는 새 건물 보각(譜閣)을 지은 후 그곳에 보관했다.[2]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3] 보통 전통 건축에선 단층으로 표현한다.[4] 창방과 직접 만나 보를 받치는, 쇠서(소 혀 모양의 자재)를 두 겹으로 낸 공포.[5] 사진 출처.[6] 사진 출처 - 문화유산채널: 문화유산칼럼 〈조선왕조 500년을 함께 한 창덕궁 향나무〉.[7] 원래는 높이 12m, 뿌리부분 둘레는 6.8m이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니며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이거나, 잘못된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문서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원할 경우 직접 토론을 발제할 수 있습니다.

  •  
  •  
  •  
  •  
  •  
  •  
  •  
  •  
  •  
  •  
  •  
  •  
  •  
  •  
  •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