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국번
최근 수정 시각:
|
![]() | |
이름 | 증국번(曾國藩)[1] |
본명 | 증자성(曾子城, Céngzǐchéng, 쩡즈청) |
자 / 호 | 백함(伯函) / 척생(滌生) |
출생 | |
사망 | |
시호 | 문정(文正) |
군사 경력 | 군복무: 청나라 |
소속: 상군 | |
역임 지위 | 양강총독 1860년 ~ 1868년, 1870년 ~ 1872년 직례총독 1868년 ~ 1870년 |
1811년 11월 26일 호남성 장사부 상향현(湘鄕縣)[2]의 부농 집안에서 아버지 죽정공(竹亭公) 증육제(曾毓濟, 1790 ~ 1857)와 어머니 증강씨(曾江氏, 1785 ~ 1852) 사이에서 5남 4녀 중 장남,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머리가 너무 안 좋았다고 한다. 한 일화로, 밤을 새서 한 문장을 외우고 있었는데 도둑이 공부하던 증국번 때문에 숨어 있었다가 밤을 새도 한 문장을 외우지 못하는 증국번이 답답해서 뺨을 때리고 그런 머리로 공부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나왔다. 그러나 증국번은 열심히 공부해 여러 단계를 통과하는 과거시험을 모두 통과하고 진사[3]에 임용되었다. 조선의 과거도 어렵다고 정평이 나 있었지만, 청나라는 그보다 인구가 20배가 넘게 많기 때문에 대단한 학식이 없으면 이렇게 과거에 급제하기가 어려웠다.
이후 과거급제자의 경력코스이자 일종의 관립 학술기관인 한림원[4]에서 일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좀 더 갈고 닦았다. 이때 성리학에 대한 여러편의 논문을 남겼는데, 이 글들은 학문적으로 상당히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그리하여 후의 캉유웨이와 함께 공양학의 시조로 평가받고 있다. 이렇게 증국번은 학자로서도 무시못할 업적을 남겼다.
이후 예부 우시랑에 제수되었으나, 1849년 모친이 별세하자 3년상을 지내려 고향에 돌아갔다.
그는 어려서 머리가 너무 안 좋았다고 한다. 한 일화로, 밤을 새서 한 문장을 외우고 있었는데 도둑이 공부하던 증국번 때문에 숨어 있었다가 밤을 새도 한 문장을 외우지 못하는 증국번이 답답해서 뺨을 때리고 그런 머리로 공부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나왔다. 그러나 증국번은 열심히 공부해 여러 단계를 통과하는 과거시험을 모두 통과하고 진사[3]에 임용되었다. 조선의 과거도 어렵다고 정평이 나 있었지만, 청나라는 그보다 인구가 20배가 넘게 많기 때문에 대단한 학식이 없으면 이렇게 과거에 급제하기가 어려웠다.
이후 과거급제자의 경력코스이자 일종의 관립 학술기관인 한림원[4]에서 일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좀 더 갈고 닦았다. 이때 성리학에 대한 여러편의 논문을 남겼는데, 이 글들은 학문적으로 상당히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그리하여 후의 캉유웨이와 함께 공양학의 시조로 평가받고 있다. 이렇게 증국번은 학자로서도 무시못할 업적을 남겼다.
이후 예부 우시랑에 제수되었으나, 1849년 모친이 별세하자 3년상을 지내려 고향에 돌아갔다.
3년상을 지내는 도중, 1850년에 봉기한 태평천국이 세력을 뻗어 강남을 휩쓸게 되자, 그의 능력을 눈여겨 보았던 함풍제의 어명을 받고 곧 고향에서 의병을 모집하게 되었다. 이때 제자인 이홍장뿐만 아니라 호남성에서 초야에 묻혀있던 좌종당을 발탁하여 지휘관으로 삼았다.
그가 모집한 의병은 상군(湘軍)이라고 하는데, 상(湘)은 호남성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호남군이라는 이야기도 된다. 그리하여 영어권 자료에서는 Hunan army라고도 표기 된다. 어쨌든 그는 한족에게 군권을 주는 것을 꺼리는 만주족 고위 관리의 견제를 받으면서도, 태평군을 상대로 맞서싸운 공로로 양강총독 겸 강남 지역 군 통솔권을 가진 흠차대신에 임명되어 태평천국 토벌을 이끌게 된다. 이들의 일부는 이후 상계군벌로 이어졌다.
또한 그는 제자인 이홍장에게 안휘성으로 가서 회군(淮軍)을 조직하도록 했다. 회(淮) 또한 안휘성을 지칭하는 한자이다. 어쨌든 상군과 회군은 거의 쓸모 없어진 청나라의 관군인 팔기군과 녹영군 대신 태평천국의 토벌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태평천국의 본거지인 남경을 함락하였다. 이후 대륙에서 일어난 반(反) 청(淸) 운동인 염군(捻軍)의 토벌에도 큰 공을 세웠다.
증국번은 태평천국을 진압하여 구(舊) 질서를 회복시키려고 했지만, 단순한 수구파는 아니었고, 세금을 덜고 탐관오리를 척결하여 민생의 어려움을 개선하려는 등, 정치의 쇄신을 적극 주장했다. 즉, 증국번은 타락한 수구가 아닌 온건 보수인 셈이다. 이 때문에 이후 천하를 두고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였던 장제스나 마오쩌둥조차도 모두 증국번을 존경했다고 한다. 특히 마오쩌둥에게는 동향 선배이자 롤모델이었다.
그가 모집한 의병은 상군(湘軍)이라고 하는데, 상(湘)은 호남성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호남군이라는 이야기도 된다. 그리하여 영어권 자료에서는 Hunan army라고도 표기 된다. 어쨌든 그는 한족에게 군권을 주는 것을 꺼리는 만주족 고위 관리의 견제를 받으면서도, 태평군을 상대로 맞서싸운 공로로 양강총독 겸 강남 지역 군 통솔권을 가진 흠차대신에 임명되어 태평천국 토벌을 이끌게 된다. 이들의 일부는 이후 상계군벌로 이어졌다.
또한 그는 제자인 이홍장에게 안휘성으로 가서 회군(淮軍)을 조직하도록 했다. 회(淮) 또한 안휘성을 지칭하는 한자이다. 어쨌든 상군과 회군은 거의 쓸모 없어진 청나라의 관군인 팔기군과 녹영군 대신 태평천국의 토벌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고, 태평천국의 본거지인 남경을 함락하였다. 이후 대륙에서 일어난 반(反) 청(淸) 운동인 염군(捻軍)의 토벌에도 큰 공을 세웠다.
증국번은 태평천국을 진압하여 구(舊) 질서를 회복시키려고 했지만, 단순한 수구파는 아니었고, 세금을 덜고 탐관오리를 척결하여 민생의 어려움을 개선하려는 등, 정치의 쇄신을 적극 주장했다. 즉, 증국번은 타락한 수구가 아닌 온건 보수인 셈이다. 이 때문에 이후 천하를 두고 건곤일척의 대결을 벌였던 장제스나 마오쩌둥조차도 모두 증국번을 존경했다고 한다. 특히 마오쩌둥에게는 동향 선배이자 롤모델이었다.
- 10월: 형주(衡州)[5]에서 상군 해군 조직.
태평천국이 진압된 후, 구(舊) 질서 하에서 서양의 기술을 도입하여 체제를 강화하려는 양무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동치제 중후반에는 청나라는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고, 이를 "동치중흥"이라고 한다.[15] 한편 증국번의 상군(湘軍)과 회군(淮軍)은 이홍장이 건설한 북양군(北洋軍)의 주축이 되며, 북양군의 지휘관들은 신해혁명 후에 민국 초반을 주름잡는 군벌이 된다. 북양군의 해군인 북양함대는 나중에 동아시아 최대의 함대가 된다. 물론 청나라가 신해혁명으로 인해 중화민국에 망하게 된 뒤 북양함대뿐 아니라 북양군 자체도 쇠락해졌지만 말이다.
증국번은 몰락한 팔기군을 대신하여 청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무장집단이었던 상군(湘軍)과 회군(淮軍)을 실질적으로 지휘할 수 있었고, 이렇게 군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 한족 부하들에게 황제위에 오르라는 부추김을 많이 받았다. 실제로 당시 청 조정의 실권은 이미 증국번을 위시한 한족 세력에 넘어가 있었다. 증국번이 태평전쟁 진압을 지휘하면서 발탁한 각 성의 순무와 총독[16]으로 있었던 터라 이들의 반란 가담은 최소한 양쯔강 이남 지방에 한해서 한족 왕조가 세워질 가능성이 충분했다. 허나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청조의 충신으로 남았다. 비유하자면 본인이 가진 군사력으로 청조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지만, 위나라를 건국한 조비 대신 제갈공명의 길을 걸어서 끝까지 청조의 충직한 신하로 남았다.
사실 아무리 부하 총독들이 가담한다 한들 거의 다 군벌화가 완료된 상태이기에 언제든지 배신하고 청에 붙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거사의 기반이 될 강남 지역은 오랜 전란으로 황폐해졌고 향용의 학살 행위 때문에 민심은 바닥을 찍어 이런 상태에서 거병을 한다면 삼번의 난 시즌 2를 찍을 판이었다. 더욱이 베이징에서 제2차 아편전쟁을 치르던 서양 세력들이 남쪽에선 청을 도와 태평천국과 싸우는 것을 본 증국번으로써는 도저히 성공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또한 본인이 유교경전을 뼈속까지 공부해야 급제할 수 있는 과거를 통과해 올라온 정통 성리학자였고, 청조에 반기를 드는 것이 본인의 신념에 어긋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처음부터 제갈량처럼 야심이 없었을 수도 있다.
1872년 양강총독 재직중 홍수전의 이전 거처인 남경에서 사망하였다. 1870년에 양강총독으로 갓 부임한 마신이가 장문상의 칼에 찔려 죽는 사건이 생기고 마신이가 죽은 뒤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증국번이 양강총독으로 재부임하여 사건을 마무리한다. 살인자인 장문상은 능지형을 받고 죽게 되었으나 민심은 어수선했다. 양강총독 마신이 살해 사건은 자마(刺馬) 사건이라 부르며 청나라 말기의 미스테리한 사건으로 남게 되었고 여러 편의 영화[17]로도 만들어진다. 직예총독의 자리에서 양강총독으로 자리를 옮기며 급히 마신이 사건을 수습한 증국번은 1872년에 사망하고 만다.
증국번은 몰락한 팔기군을 대신하여 청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무장집단이었던 상군(湘軍)과 회군(淮軍)을 실질적으로 지휘할 수 있었고, 이렇게 군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 한족 부하들에게 황제위에 오르라는 부추김을 많이 받았다. 실제로 당시 청 조정의 실권은 이미 증국번을 위시한 한족 세력에 넘어가 있었다. 증국번이 태평전쟁 진압을 지휘하면서 발탁한 각 성의 순무와 총독[16]으로 있었던 터라 이들의 반란 가담은 최소한 양쯔강 이남 지방에 한해서 한족 왕조가 세워질 가능성이 충분했다. 허나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청조의 충신으로 남았다. 비유하자면 본인이 가진 군사력으로 청조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지만, 위나라를 건국한 조비 대신 제갈공명의 길을 걸어서 끝까지 청조의 충직한 신하로 남았다.
사실 아무리 부하 총독들이 가담한다 한들 거의 다 군벌화가 완료된 상태이기에 언제든지 배신하고 청에 붙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거사의 기반이 될 강남 지역은 오랜 전란으로 황폐해졌고 향용의 학살 행위 때문에 민심은 바닥을 찍어 이런 상태에서 거병을 한다면 삼번의 난 시즌 2를 찍을 판이었다. 더욱이 베이징에서 제2차 아편전쟁을 치르던 서양 세력들이 남쪽에선 청을 도와 태평천국과 싸우는 것을 본 증국번으로써는 도저히 성공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또한 본인이 유교경전을 뼈속까지 공부해야 급제할 수 있는 과거를 통과해 올라온 정통 성리학자였고, 청조에 반기를 드는 것이 본인의 신념에 어긋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처음부터 제갈량처럼 야심이 없었을 수도 있다.
1872년 양강총독 재직중 홍수전의 이전 거처인 남경에서 사망하였다. 1870년에 양강총독으로 갓 부임한 마신이가 장문상의 칼에 찔려 죽는 사건이 생기고 마신이가 죽은 뒤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증국번이 양강총독으로 재부임하여 사건을 마무리한다. 살인자인 장문상은 능지형을 받고 죽게 되었으나 민심은 어수선했다. 양강총독 마신이 살해 사건은 자마(刺馬) 사건이라 부르며 청나라 말기의 미스테리한 사건으로 남게 되었고 여러 편의 영화[17]로도 만들어진다. 직예총독의 자리에서 양강총독으로 자리를 옮기며 급히 마신이 사건을 수습한 증국번은 1872년에 사망하고 만다.
태평천국의 공격으로부터 청나라를 구해낸 명장이고 대국을 보는 안목이나 전략적 능력에서 당대 중국 제일의 군략가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직접 전투를 지휘하면 반드시 진다는 희한한 징크스를 가진 인물이다. 전투를 지휘할 때의 상대가 태평천국을 대표하는 명장 석달개나 이수성이었다보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징크스는 본인도 대단히 신경쓰였는지 태평천국의 난 최후의 전투라고 할 수 있는 남경 공략전에는 자신이 지휘를 맡지 않고 셋째 남동생 증국전(曾國荃)이 총지휘를 맡게 된다.
증국번과 그의 동생 증국전, 그리고 호남인으로 주축이 된 상군(湘軍)은 반란 진압 후에 가담여부를 불문하고 현지 주민을 처형하는 청나라의 전통에 근거하여, 태평천국의 난 진압 후 포로[18]들을 모두 처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수는 20~30만에 달한다고 추정되고 있으며[19], 그리하여 현재도 남경의 호남성 출신에 대한 인식은 100년후 비슷한 규모의 학살을 저지른 일본만큼이나 나쁘다. 다만 호남성은 호남성대로 400년전 남경을 근거지로 삼은 주원장군이 진주하면서 진우량군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수만명이 학살당한 원한이 있기 때문에(홍무도상), 그랬다는 설도 있다.
증자의 70세손(69대손)이다.
차남 증기택(曾紀澤[병음], 1839 ~ 1890)은 아버지의 후광으로 청나라의 고위 외교관으로 일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의 공사를 역임하였고, 야쿱 벡의 난의 와중에서 러시아와의 일리 조약을 개정하여 잃었던 영토를 조금 찾아오기도 했다. 증기택은 불평등 조약의 개선에 힘썼지만 이 당시의 청나라는 이미 서양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매운 음식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전속 요리사가 은퇴하면서 후임 요리사에게 "매운 고춧가루만 뿌리면 어떤 음식이든 좋아하시니 고춧가루만 준비하면 된다."고 당부했다는 기록이 있다.[21][22]
증국번과 그의 동생 증국전, 그리고 호남인으로 주축이 된 상군(湘軍)은 반란 진압 후에 가담여부를 불문하고 현지 주민을 처형하는 청나라의 전통에 근거하여, 태평천국의 난 진압 후 포로[18]들을 모두 처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수는 20~30만에 달한다고 추정되고 있으며[19], 그리하여 현재도 남경의 호남성 출신에 대한 인식은 100년후 비슷한 규모의 학살을 저지른 일본만큼이나 나쁘다. 다만 호남성은 호남성대로 400년전 남경을 근거지로 삼은 주원장군이 진주하면서 진우량군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수만명이 학살당한 원한이 있기 때문에(홍무도상), 그랬다는 설도 있다.
증자의 70세손(69대손)이다.
차남 증기택(曾紀澤[병음], 1839 ~ 1890)은 아버지의 후광으로 청나라의 고위 외교관으로 일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의 공사를 역임하였고, 야쿱 벡의 난의 와중에서 러시아와의 일리 조약을 개정하여 잃었던 영토를 조금 찾아오기도 했다. 증기택은 불평등 조약의 개선에 힘썼지만 이 당시의 청나라는 이미 서양 열강의 반식민지로 전락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매운 음식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전속 요리사가 은퇴하면서 후임 요리사에게 "매운 고춧가루만 뿌리면 어떤 음식이든 좋아하시니 고춧가루만 준비하면 된다."고 당부했다는 기록이 있다.[21][22]
[1] 간체자로는 曾国藩(Zēng Guófān)[2] 現 중화인민공화국 후난성 샹탄시 샹샹시(湘鄕市).[3] 조선의 진사와는 사회적 지위가 다르다. 조선에서 진사는 향시에 합격한 대과응시자격이 있는 사람을 의미하지만 명나라, 청나라 시대의 진사는 중국 전체에서 수십명 안에 드는 수재 중에 수재였다. 즉, 조선과 비교하자면 조선의 진사와 달리 한 단계 시험(회시)을 더 통과해서 임금 앞에서 최종 순위를 가리는 전시에 올라있는 급이라고 봐야한다. 또한 중국의 진사는 일개 성을 대표하는 급의 수재였으며 벼슬에 임용되지 않더라도 진사라는 신분 자체로 지방 행정에 관여할 수 있었다.[4] 조선으로 치면 집현전이나 규장각 정도의 위치이다.[5] 현 헝양시[6] 현 황강시 황저우구 두청진[7] 현 황저우구[8] 다만 호북순무(湖北巡撫) 숭륜의 책임이 컸다. 오문용을 견제한 나머지, 군수물자도 지원 안 해주고 핍박해 강제로 나가게 했다.[9] 현 어저우시[10] 현 웨양시 샹인현[11] 현 우한시 한양구[12] 현 창사시 왕청구 징강진[13] 현 샹탄시[14] 만주어: ᡨᠠᠣᡤᡳᠶᠠ ᠲᠠᠴᡞᠪᡠ, 타오기야 타치부 / 중국어: 陶佳 塔齊布, 도가 탑제포[15] 물론 양무운동의 성과는 청불전쟁과 청일전쟁 이후 쇠락했고, 청나라는 더 막장화되지만...[16] 주로 남중국 지역[17] 자마, 명장(영화) 등[18] 태평천국군도 포함되었지만 실제로는 상당수가 양민들[19] 태평천국의 수도 천경의 인구가 100만이었는데, 전란 이후 인구 조사에서 50만으로 줄어든 것에 근거.[병음] Céngjìzé, 쩡지저[21] 출처: 공자의 식탁, 장징 저, 박해순 역, 뿌리와이파리[22] 호남성 사람들의 특징이다. 동향인인 마오쩌둥도 매끼니 식탁에 고추를 놓을 정도로 매운 음식을 좋아했다.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니며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이거나, 잘못된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문서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원할 경우 직접 토론을 발제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