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신기오로 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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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新覺羅 允禩 애신각라 윤사 | |
시호 | 화석염친왕(和碩廉親王) |
별호 | 다라패륵(多羅貝勒) ⇒ 관작 삭제 ⇒ 다라패륵(多羅貝勒) ⇒ 화석염친왕(和碩廉親王) / 팔현왕(八賢王) |
출생 | |
사망 | |
부친 | 청 성조 강희제 |
모친 | 양비 위씨 |
강희 20년 음력 2월 10일에 서비 위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생모인 위씨의 지위가 낮아 혜비 나라씨 슬하에서 자랐으며[1] 17세의 나이로 패륵에 책봉된다. 이는 작위를 받은 황자들 중에서 가장 어린 나이였다. 강희제 생전에 후계자 자리를 놓고 이복 형 옹정제와 대립하는 관계였다. 1722년에 옹정제가 즉위하자 불교 승려로 출가하였지만 뒤로는 이복동생인 혁군왕 윤당과 계속 내통하며 발호하였다. 결국 황실 법도로 징치되어 혁군왕과 나란히 사이좋게 작위를 추탈당해 서인으로 강등되었고, 자신은 만주어 아키나(阿其那)로 아들인 홍왕은 '보살보'로[2] 개명되는 수모를 겪는다.[3] 이후 윤당과 함께 종인부에 유폐되고 죄인 취급을 받으며 살다가, 윤당은 1726년 9월 22일에 훙서하였고 윤사도 같은 해 10월 5일에 훙서하였다.
- 적복진 곽락라씨(郭絡羅氏)[4]: 화석액부 명상(明尙)과 화석격격(和碩格格)의 딸 / 추탈[5]안화친왕 악락(岳樂 1625~1689)의 외손녀
윤사가 곽락라씨와 혼인할 무렵 생모 양비는 정식으로 후궁 봉작을 받지도 못했다. 한미한 궁녀 출신의 모친을 둔 윤사의 적복진이 만주족 최상류층 출신의 후궁들을 모친으로 둔 강희제의 다른 황자들이 맞이한 아내보다도 더 신분이 좋은 것이 상당한 의문이다. 하지만 곽락라씨는 이런 초명문가 출신인 것이 무색하게 남편인 윤사와 황위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한 시아주버님인 옹정제의 즉위 후 보복을 직격으로 맞아, 외할아버지인 안화친왕은 윤사를 황제로 지지한 전적 때문에 사후 공적과 작호를 모두 박탈당하고 후손도 서인으로 전락하면서 외가까지 싸그리 몰락하였다.
- 측복진 모씨(某氏 ?~?): 성씨 미상 / 옹정 연간에 졸함
- 서복진 왕씨(王氏)
- 첩 장씨(張氏): 장지벽(張之碧)의 딸
- 첩 모씨(毛氏): 모이격(毛二格)의 딸
- 1자 홍왕(弘旺 1708~1762): 첩 장씨 生 / 보살보(菩薩保)로 개명됨
- 1녀 군군(郡君 1708~1775): 첩 모씨 生 / 손오복(孫五福)[6]에게 출가
[1] 청나라는 빈(嬪) 이상의 후궁들만 자녀를 직접 키울 수 있었다.[2] '보살의 자비'라는 뜻으로 보살같은 황제인 옹정제가 자비를 베풀어, 자신의 아들만은 살려주기를 바라는 윤사의 뜻이었다고 한다.[3] 아기나의 뜻에 대해선 현재에도 해석이 분분하다. 개새끼라는 해석이 많지만 개는 만주어로 인다훈이고, 만주족은 개를 매우 사랑하고 신성시하는 종족이어서 멸칭의 의미로 썼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도마 위의 물고기라는 해석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4] 중드 보보경심의 등장인물인 곽락라 명혜의 실제 모티브다.[5] 윤사의 처외조부라는 이유만으로 옹정제에 의해 공적과 작위를 사후 추탈당했고 후손 또한 서인으로 전락했다.[6] 강희제의 14녀 화석각정공주와 화석부마 손승운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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