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신기오로 푸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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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新覺羅 溥儁 애신각라 부준 | |
묘효 | 없음 |
시호 | 없음 |
연호 | |
봉호 | 불입팔분보국공(不入八分補國公) |
호 | 산강초(山岡樵) |
출생 | |
청나라 순천부 | |
사망 | |
재위 | 청 대아가 |
청 황제 | |
부왕 | 단군왕 애신각라 재의 |
모후 | 대복진 이이근각라씨 |
정실 | 대복진 보르지기트씨 |
단군왕 애신각라 재의의 차남으로 어머니는 자희태후의 아우인 엽혁나랍(葉赫那拉) 계상(桂祥)의 딸이며 도광제의 증손으로 함풍제의 종손, 동치제,광서제의 종질, 선통제의 재종형이다.
무술정변이 일어난 후 서태후는 광서제에게 부준을 따아커(大阿可, 대황자)[1]로 책봉하게끔 하였다. 이후 서태후가 광서제를 폐위시켜 푸쥔이 황제로 등극하기 일보 직전 이홍장 등 대신들과 서양 열강의 반대로 곧 황자에서 폐위되어 보국공으로 강등되었다. 이에 분노한 부친 재의는 양무파와 서양 열강에 적대하는 의화단과 접촉해 의화단 운동 당시 청 조정이 의화단과 손을 잡도록 만들어버렸다. 서양쪽 의화단 운동 사료에 등장하는 '단군왕'이 바로 재의이다.
그 후 생활도 곤궁해지고 신세 또한 황족답지 않게 가난해졌다. 의화단 운동이 진압된 이후에 책임을 묻는 서양 열강의 요구에 따라 아버지 재의와 함께 신장으로 귀양보내졌다.
귀양지에서 결혼했지만 그 땅에 싫증이 나서 아내를 데리고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일변하여 아편을 피우고 방탕한 생활을 했지만 정변으로 벼슬을 잃으면서 연수입이 끊기고 재산도 바닥났다. 그래도 생활태도는 바뀌지 않아 아들 부부의 보살핌을 받다가 만년에는 거동이 불편해졌고, 중일전쟁 이후 아들이 매국노 혐의로 체포되자 빈곤 속에서 1942년 사망하였다.향년 57세.
그 후 생활도 곤궁해지고 신세 또한 황족답지 않게 가난해졌다. 의화단 운동이 진압된 이후에 책임을 묻는 서양 열강의 요구에 따라 아버지 재의와 함께 신장으로 귀양보내졌다.
귀양지에서 결혼했지만 그 땅에 싫증이 나서 아내를 데리고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일변하여 아편을 피우고 방탕한 생활을 했지만 정변으로 벼슬을 잃으면서 연수입이 끊기고 재산도 바닥났다. 그래도 생활태도는 바뀌지 않아 아들 부부의 보살핌을 받다가 만년에는 거동이 불편해졌고, 중일전쟁 이후 아들이 매국노 혐의로 체포되자 빈곤 속에서 1942년 사망하였다.향년 57세.
- 아버지 : 단군왕 아이신기오로 자이이(愛新覺羅 載漪).
- 어머니 : 엽혁나랍 정방(엽혁나랍 계상(葉赫那拉 桂祥)의 딸).
- 형 : 아이신기오로 푸좐
- 부인: 대복진 보르지기트씨
- 보국공 아이신기오로 푸쥔(차남).
[1] 강희제 시절 황태자 윤잉이 폐위 된후 청나라는 태자를 세우지 않았다. 다만 광서제는 아들이 없기 때문에 황자로 책봉된 이상 황태자나 다름 없었다.[참고1] 郭廷以《近代中國史事日誌》,中華書局,北京,1987年5月,第1062-1063頁[참고2] 孫昉、孫向群《己亥建儲與晚清政治危機》,北方論叢 (哈爾濱市: 哈爾濱師範大學). 2009年第5期(總第217期): 75–79. ISSN 1000-3541[참고3] 吳仁安《晚清光緒季年的「己亥建儲」醜劇和愛新覺羅·溥儁的「大阿哥」之「立」與「廢」》,江南大學學報:人文社會科學版 (無錫市: 江南大學). 2014年1月(第13卷第1期): 49–53. ISSN 1671-6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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