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리투아니아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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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3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프랑스인 헨리크 발레지를 국왕으로 선출하면서 헨리크 발레지가 리투아니아 대공직을 역임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폴란드-리투아니아 세임은 헨리크 발레지를 바지사장 수준으로 최대한 권리를 제한하였고 여기에 싫증이 난 발레지는 프랑스 왕위를 이어받은 후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자리를 넘겨주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리투아니아가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으로 독립하자, 리투아니아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쟁으로 인한 빌뉴스 관련 영토 분쟁 문제 및 독일과 클라이페다 일대 관련 국경 분쟁 문제 등으로 프랑스 측에 지속적인 외교적 지원을 요청했던 바 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측에서 프랑스에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가운데 프랑스는 계속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었다.관련 논문 체코와 리투아니아 관련한 프랑스의 소극적인 태도는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하게 되었다.
1992년 5월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리투아니아를 방문하는데, 이는 냉전 이후 서방 지도자가 리투아니아를 직접 방문한 최초의 사례이다.
1992년 5월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리투아니아를 방문하는데, 이는 냉전 이후 서방 지도자가 리투아니아를 직접 방문한 최초의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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