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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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 안혜련(安惠連) |
본관 | |
출생 | |
사망 | |
묘소 | |
배우자 | |
자녀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1884년 4월 21일 평안도 강서현 보원방 화학리(현 남포시 강서구역 서학동)에서 서당 훈장이던 아버지 이석관(李錫觀)의 2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이후 한성부 정신여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2]
1902년 안창호와 결혼하였으며, 결혼 직후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05년 안창호를 도와 공립협회를 결성하여 미주 한인사회의 민족운동을 지도하였다. 이후 대한인국민회를 지원하였고 부인친애회, 대한여자애국단 등의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 분들의 부인들이 그러했듯, 바깥에서 큰 일하고 남 도와주는 남편을 내조하기 위해 생활고를 겪으며 어렵게 생활하였다. 더욱이 안창호선생이 남 일 지나치지 못하고 잘 도와주는 편이었기에 더더욱. 증언에 따르면 미국에서도 삯바느질을 하며 돈을 모았다고 한다. 안창호 선생은 주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미국에 잘 오지 못했기에 자녀양육을 거의 혼자 전담해야 했다. 1926년 안창호가 임시정부 국무령으로 발병받으며 상하이로 떠나면서 두 부부는 헤어지게 되었고, 이 후 안창호는 활동 중 조선총독부에 의해 검거되어 5~6년여간 수감생활을 하다가 건강악화로 1938년 사망하게 되었다.
1963년 막내 안필영(당시 36세)과 함께 61년 만에 고국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남편을 대신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1969년 4월 21일, 본인의 85세 생일에 미국 로스앤젤레스 세인트 빈센트 병원(Saint Vincent Medical Center) 205호실에서 심장질환으로 별세하였다.# 1973년 안창호의 유해와 함께 서울특별시 도산공원에 안장되었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902년 안창호와 결혼하였으며, 결혼 직후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1905년 안창호를 도와 공립협회를 결성하여 미주 한인사회의 민족운동을 지도하였다. 이후 대한인국민회를 지원하였고 부인친애회, 대한여자애국단 등의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많은 독립운동가 분들의 부인들이 그러했듯, 바깥에서 큰 일하고 남 도와주는 남편을 내조하기 위해 생활고를 겪으며 어렵게 생활하였다. 더욱이 안창호선생이 남 일 지나치지 못하고 잘 도와주는 편이었기에 더더욱. 증언에 따르면 미국에서도 삯바느질을 하며 돈을 모았다고 한다. 안창호 선생은 주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미국에 잘 오지 못했기에 자녀양육을 거의 혼자 전담해야 했다. 1926년 안창호가 임시정부 국무령으로 발병받으며 상하이로 떠나면서 두 부부는 헤어지게 되었고, 이 후 안창호는 활동 중 조선총독부에 의해 검거되어 5~6년여간 수감생활을 하다가 건강악화로 1938년 사망하게 되었다.
1963년 막내 안필영(당시 36세)과 함께 61년 만에 고국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남편을 대신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1969년 4월 21일, 본인의 85세 생일에 미국 로스앤젤레스 세인트 빈센트 병원(Saint Vincent Medical Center) 205호실에서 심장질환으로 별세하였다.# 1973년 안창호의 유해와 함께 서울특별시 도산공원에 안장되었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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