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알렉산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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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킴스탄케비치 Александра Петровна Ким-Станкевич Alexandra Petrovna Kim-Stankevich |
출생 | |
사망 | |
직업 | 사회운동가 |
당적 | |
자녀 | 3남[2] |
서훈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2009) |
1869년 오랜 기간 여름장마로 인하여 6진 등지에서는 대흉년으로 추수할 것이 없어져서 1869~1870년에 조선인들이 대거 국경을 넘어 노령[3]으로 넘어갔다. 아버지 김두서가 노령으로 이주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 시기로 보인다.
1885년 연해주 시넬니코보에서 이주민 자녀로 태어났다. 1896년께 아버지 표트르 세묘노비치[4]가 러시아와 청나라를 연결하는(블라디보스토크-하얼빈-만저우리) 동청철도 공사 통역관[5]으로 만주로 차출됐으며 1902년에 갑자기 사망했다.
김알렉산드라는 아버지의 친구이자 폴란드계 러시아인 철도기술자인 마르크 이오시포비치 스탄케비치에게 입양되었고 그의 아들과 결혼했다. 1903년 10월 24일 하얼빈에서 첫아들을 낳았으나 곧 죽었고, 1905년 9월 6일 둘째 아들이 하얼빈에서 출생했다. 무위도식에 술과 도박에 찌든 첫 남편과 이혼하고 둘째 아들을 데리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러시아어 교사이자 러시아 정교회 신부인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오가이(오 바실리)를 만나 1910년 7월 6일 셋째 아들을 낳았으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여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교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1914년 우랄 산맥 일대로 이주했는데 철도 노동자(중국인, 조선인)들의 밀린 임금을 받아내는 등 통역사이자 노동 협상가 역할을 하면서 노동권 재판을 승소로 이끌었다.
그러다가 1916년에 한 정당에 가입했는데 이 정당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었다. 이후 멘셰비키보다 더 급진적인 노선인 볼셰비키에 가담했다.[6] 블라디미르 레닌과 협력 관계가 된 그녀는 극동 지역의 공산주의 확산을 위해 떠나 한국계 중에서 최초의 공산주의자로 꼽히게 되었다. 먼저 독일의 밀정으로 오해받아 체포되었던 이동휘를 구명 활동으로 석방되게 한 그녀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김립, 이동휘와 함께 한인사회당을 결성했다. 이는 한국 최초의 볼셰비키 정당으로 1918년이다. 직책은 "극동인민위원회 외무인민위원". 비록 짧은 시간 존속했던 임시 조직이었지만[7] 볼셰비키 측에서 "인터내셔널리스트"로 분류했던 인물이기도 하며 볼셰비키당 하바롭스크 시 위원회 사무국원[8]이었는데 소비에트 러시아의 특성을 볼 때 김알렉산드라가 정말로 시 위원회 사무국장, 책임 비서(서기장)였다면 하바롭스크 시장이나 다름없다.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위협을 느끼자 6월부터 100여 명의 조선인 적위대를 구성해 반일 항쟁에 돌입했으며 한인사회당 창당 단 5개월 만에 백군과 일본군에게 체포되었고 1918년 9월 16일 처형당했다. 이때의 유언은 아직도 전해진다.
1885년 연해주 시넬니코보에서 이주민 자녀로 태어났다. 1896년께 아버지 표트르 세묘노비치[4]가 러시아와 청나라를 연결하는(블라디보스토크-하얼빈-만저우리) 동청철도 공사 통역관[5]으로 만주로 차출됐으며 1902년에 갑자기 사망했다.
김알렉산드라는 아버지의 친구이자 폴란드계 러시아인 철도기술자인 마르크 이오시포비치 스탄케비치에게 입양되었고 그의 아들과 결혼했다. 1903년 10월 24일 하얼빈에서 첫아들을 낳았으나 곧 죽었고, 1905년 9월 6일 둘째 아들이 하얼빈에서 출생했다. 무위도식에 술과 도박에 찌든 첫 남편과 이혼하고 둘째 아들을 데리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러시아어 교사이자 러시아 정교회 신부인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오가이(오 바실리)를 만나 1910년 7월 6일 셋째 아들을 낳았으며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여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교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1914년 우랄 산맥 일대로 이주했는데 철도 노동자(중국인, 조선인)들의 밀린 임금을 받아내는 등 통역사이자 노동 협상가 역할을 하면서 노동권 재판을 승소로 이끌었다.
그러다가 1916년에 한 정당에 가입했는데 이 정당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었다. 이후 멘셰비키보다 더 급진적인 노선인 볼셰비키에 가담했다.[6] 블라디미르 레닌과 협력 관계가 된 그녀는 극동 지역의 공산주의 확산을 위해 떠나 한국계 중에서 최초의 공산주의자로 꼽히게 되었다. 먼저 독일의 밀정으로 오해받아 체포되었던 이동휘를 구명 활동으로 석방되게 한 그녀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김립, 이동휘와 함께 한인사회당을 결성했다. 이는 한국 최초의 볼셰비키 정당으로 1918년이다. 직책은 "극동인민위원회 외무인민위원". 비록 짧은 시간 존속했던 임시 조직이었지만[7] 볼셰비키 측에서 "인터내셔널리스트"로 분류했던 인물이기도 하며 볼셰비키당 하바롭스크 시 위원회 사무국원[8]이었는데 소비에트 러시아의 특성을 볼 때 김알렉산드라가 정말로 시 위원회 사무국장, 책임 비서(서기장)였다면 하바롭스크 시장이나 다름없다.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위협을 느끼자 6월부터 100여 명의 조선인 적위대를 구성해 반일 항쟁에 돌입했으며 한인사회당 창당 단 5개월 만에 백군과 일본군에게 체포되었고 1918년 9월 16일 처형당했다. 이때의 유언은 아직도 전해진다.
- 수요기획(2002.3.6)
- 역사저널 그날(2019.3.10)
- 김금숙 웹툰#
[1] 한국식 이름이 김애림이라고 나온 자료가 있는데 진짜 이름이라기보단 알렉산드라의 음차로 보인다. 허가이의 사례와 같다.[2] 장남은 태어나고 얼마 안 가 사망했다.[3] 연해주, 발해 기준으로는 솔빈부 행정구역.[4] 김두서의 러시아어식 이름. 개명했다.[5] 그녀의 아버지 표트르 세묘노비치는 러시아 관리들을 위해 철도 노동자에게 여러 언어를 통역해 주는 통역사 일을 했다 보니 한국어와 러시아어뿐만 아니라 중국어에도 능통했는데 이 영향으로 김알렉산드라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여러 외국어 사용에 능통했다고 알려졌다.[6] 멘셰비키가 일본군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에서 활동한 한인 독립운동가들은 그들과 대립하던 볼셰비키에 가담하였다. 대표적으로 홍범도 장군이 있다.[7] 정확히는 1920년 설립되는 극동공화국의 전신이다. 그녀는 한국계 최초의 외국 장관이다.[8] 일부 국내 기록에서는 책임 비서라고도 한다.[9] 김알렉산드라의 사후 한인 공산당 세력은 둘로 분열되었고 심지어 자유시 참변,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등으로 나락에 이르게 되었다.[10] 페이지를 보면 특이하게도 남북한 대사관이 둘 다 협조한 것으로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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