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덕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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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 건국포장 추서 |
1911년 11월 5일 전라남도 제주군 구좌면 하도리(現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1700번지)에서 아버지 부계준(夫啓俊, 1860 ~ 1935. 2. 23)과 어머니 평택 임씨(1861 ~ 1921. 4. 18)[4]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는 해녀로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당시 제주에는 관제조합인 해녀어업조합의 부정으로 해녀들이 극심한 피해를 보고 있었다. 이에 그녀를 비롯한 제주도 해녀들은 자생적으로 해녀회를 조직하고 부당한 해녀어업조합에 맞서 나갔는데, 이는 곧 시위투쟁으로 발전하였고 특히 구좌면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다.
1932년 1월 7일 및 12일 구좌면 세화리 장터에서는 부덕량의 주도 하에 1천여 명의 해녀들이 세화주재소의 저지를 뚫고 호미와 비창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시위가 끝난 후 같은 달 24일경, 그녀는 일본 경찰이 제주도 출신 민족운동가들을 체포하려는 것을 몸으로 맞서 저지하려다가 체포되었고, 제주도경찰서 유치장에 투옥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32년 6월 17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출옥했으나, 그 뒤 고문 후유증으로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졌고 이는 폐병으로 이어졌다. 결국 1939년 10월 4일 별세했다. 향년 27세.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그녀는 해녀로서 생계를 유지했는데, 당시 제주에는 관제조합인 해녀어업조합의 부정으로 해녀들이 극심한 피해를 보고 있었다. 이에 그녀를 비롯한 제주도 해녀들은 자생적으로 해녀회를 조직하고 부당한 해녀어업조합에 맞서 나갔는데, 이는 곧 시위투쟁으로 발전하였고 특히 구좌면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다.
1932년 1월 7일 및 12일 구좌면 세화리 장터에서는 부덕량의 주도 하에 1천여 명의 해녀들이 세화주재소의 저지를 뚫고 호미와 비창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시위가 끝난 후 같은 달 24일경, 그녀는 일본 경찰이 제주도 출신 민족운동가들을 체포하려는 것을 몸으로 맞서 저지하려다가 체포되었고, 제주도경찰서 유치장에 투옥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32년 6월 17일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출옥했으나, 그 뒤 고문 후유증으로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졌고 이는 폐병으로 이어졌다. 결국 1939년 10월 4일 별세했다. 향년 27세.
200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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