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굴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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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굴젓 |
충청남도 서산시와 태안군의 향토음식의 하나로 간한 굴에 고춧가루를 섞어 삭혀 담근 굴젓이다. 굴 특유의 향이 젓갈에도 반영된 탓인지 호불호가 있다. 밥에 쓱쓱 비벼 먹으면 밥도둑이 된다. 젓갈이 냉장을 하면 어느 정도 오래두고 먹을 수 있지만 굴젓은 예외. 될 수 있으면 구입 후 빨리 먹는게 좋고, 1인 가구라면 조금씩 사다놓고 먹기를 권한다. 안 그러면 거품이 나면서 시큼해진 굴젓을 맛볼 수도 있다. 물론 적당히 새콤해졌을 땐 오히려 입맛을 돋우지만 좀 더 지나면 술 냄새 나는 신김치 저리가라 할 정도가 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굴의 제철이 겨울인 만큼, 겨울에 나온 어리굴젓이 최상품이다. 충청남도 서산시의 특산품이기도 하다.
양념이 진하게 배어들어가 있기 때문에 굴 요리임에도 비린내가 상대적으로 덜하다.
양념이 진하게 배어들어가 있기 때문에 굴 요리임에도 비린내가 상대적으로 덜하다.
'모자란', '적은' 따위의 의미를 지니는 접두어 '얼-'[1]을 활용한 표현 중 '얼간'이라는 것이 있는데, 소금을 적게 사용한 간을 의미한다. 어리굴젓은 타 젓갈류와는 다르게 소금을 적게 쓰기 때문에 '얼간을 한 굴젓', 즉 '어리굴젓'이 되었다.
간월도에서 언제부터 굴젓을 담그기 시작하였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임금에게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600년 이상이라는 설이 있다.
조선 후기문신 심노숭[2]의 남천일록에 '지금쯤 서울 시장에서 파는 어리굴젓은 내가 즐기는 것으로 늘 생각이 간절하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도 유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수라상에 어리굴젓이 없으면 수라를 못 먹었다는 일화가 있다.
다만 고추의 기원설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조선 초 세종이 맛보았다는 어리굴젓에는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극히 높다.있어야 집어넣지 오늘날처럼 빨간 어리굴젓은 넉넉잡아 조선 중~후기 이후에 탄생한 것이고, 그 전에는 하얀 젓갈류에 해당했을 것이다.
1980년대 초에 간월도 일대가 간척지가 되어 간월도 어리굴젓이 사라졌다가 1980년대 후반에 간월도 주민들이 방조제 바깥쪽에 굴을 양식하기 시작해서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약간의 공백기와 식생활의 서구화가 진행되며 인지도가 많이 낮아졌다.
조선 후기문신 심노숭[2]의 남천일록에 '지금쯤 서울 시장에서 파는 어리굴젓은 내가 즐기는 것으로 늘 생각이 간절하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도 유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수라상에 어리굴젓이 없으면 수라를 못 먹었다는 일화가 있다.
다만 고추의 기원설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조선 초 세종이 맛보았다는 어리굴젓에는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극히 높다.
1980년대 초에 간월도 일대가 간척지가 되어 간월도 어리굴젓이 사라졌다가 1980년대 후반에 간월도 주민들이 방조제 바깥쪽에 굴을 양식하기 시작해서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약간의 공백기와 식생활의 서구화가 진행되며 인지도가 많이 낮아졌다.
- 굴국밥집에 가면 높은 확률로 반찬으로 나온다.
- 서산시 학교에서는 사회과목 수업을 할 때 지겹도록 나오기 때문에 이 동네 출신자들 중에서는 이것의 존재를 모르는 학생이 없다.
- 앞서 나왔듯이 어리굴젓은 타 젓갈 대비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 시큼해진 어리굴젓은 잘게 잘라서 김치볶음밥의 부재료로 활용해 보자. 시큼한 맛이 김치맛과 섞여 중화되면서 어리굴젓 특유의 향이 볶음밥에 배여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단, 어리굴젓은 싱싱할 때 가장 맛있으니 일부러 해 먹을 필요는 없다. 어디까지나 맛이 변한 어리굴젓의 재활용 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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