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 알 바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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أبو جعفر محمد بن علي الباقر
아부 자파르 무함마드 빈 알리 알-바키르[1]
생몰: 676년 ~ 732년
열두이맘파의 5대 이맘. 알리 자인 알 아비딘의 아들로, 부친과 마찬가지로 메디나에존버 머물며 신앙과 교리 확립에 전념하였다. 이맘으로서 그는 쉬아 교리를 체계화하였고, 이라크 등지에 제자들을 보내어 지지 세력을 확보하였다. 비록 행동파였던 이복동생 자이드가 별도의 세력을 이루며 자이드파로 분리되긴 했지만, 무함마드의 이맘위는 본격적으로 후세인 직계 이맘의 권위가 구축된 시기로 평가된다. 한편 무함마드가 제창하고 후임 이맘 자파르가 정립한 타키야[2] 교리는 후일 쉬아 무슬림들에 있어 순니 정권의 박해를 피하는 데에 적극 이용되게 된다.
아부 자파르 무함마드 빈 알리 알-바키르[1]
생몰: 676년 ~ 732년
열두이맘파의 5대 이맘. 알리 자인 알 아비딘의 아들로, 부친과 마찬가지로 메디나에
알리 자인 알 아비딘의 장남으로, 713년 부친이 사망하자 이맘위를 계승하였다. 716년 하쉬미야 이맘인 아부 하쉼 압둘라가 사망하자 일부 세력이 무함마드를 지지하였다. 다만 대부분은 선지자의 숙부 압바스의 증손자인 무함마드 빈 알리 빈 압둘라를 이맘으로 모셨고, 나머지는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이복동생 자파르의 증손자인 압둘라 빈 무아위야 빈 압둘라를 이맘으로 모셨다. (하르비야)
무함마드는 비록 정치 활동을 삼갔지만, 쿠파 등 이라크의 지지자들이 찾아올 때마다 교리를 설파하며 세력 공고화를 꾀하였다. 또한 쉬아 세력에 온정적이던 칼리파 우마르 2세의 초대에 응하여 면담한 후, 그는 파다크 오아시스를 알리 가문의 영지로 환원해주었다. 다만 이후의 칼리파 히샴은 무함마드를 종종 다마스쿠스로 소환한 후 음식을 제대로 주지 않거나 감금하는 등 모질게 대하였다.
이에 분개한 동생 자이드는 우마이야 정권에 대한 무력 투쟁을 주장했지만, 무함마드는 부친의 예를 들며 반대하였다. 따라서 자이드는 지지자들을 모아 별개의 세력을 이루게 된다. 720년대 들어 본격화된 우마이야 조의 쇠퇴와 함께 무함마드는 쿠파를 중심으로 제자 혹은 대리인들을 통해 쉬아 교리를 퍼드렸다. 그러던 732년 무함마드는 메디나에서 사망하였고, 쉬아 전승에 따르면 히샴이 독살한 것이라 한다.
무함마드는 비록 정치 활동을 삼갔지만, 쿠파 등 이라크의 지지자들이 찾아올 때마다 교리를 설파하며 세력 공고화를 꾀하였다. 또한 쉬아 세력에 온정적이던 칼리파 우마르 2세의 초대에 응하여 면담한 후, 그는 파다크 오아시스를 알리 가문의 영지로 환원해주었다. 다만 이후의 칼리파 히샴은 무함마드를 종종 다마스쿠스로 소환한 후 음식을 제대로 주지 않거나 감금하는 등 모질게 대하였다.
이에 분개한 동생 자이드는 우마이야 정권에 대한 무력 투쟁을 주장했지만, 무함마드는 부친의 예를 들며 반대하였다. 따라서 자이드는 지지자들을 모아 별개의 세력을 이루게 된다. 720년대 들어 본격화된 우마이야 조의 쇠퇴와 함께 무함마드는 쿠파를 중심으로 제자 혹은 대리인들을 통해 쉬아 교리를 퍼드렸다. 그러던 732년 무함마드는 메디나에서 사망하였고, 쉬아 전승에 따르면 히샴이 독살한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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