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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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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료일 : 무기한
사유 : IDC(AS26496)
토론 역사
[ 제기(帝紀) ]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 열전(列傳) ]
31·32권 「후비전(后妃傳)」
33권 「왕상등전(王祥等傳)」
34권 「양호등전(羊祜等傳)」
35권 「진건등전(陳騫等傳)」
36권 「위관등전(衛瓘等傳)」
37권 「종실전(宗室傳)」
38권 「선오왕문육왕전(宣五王文六王傳)」
39권 「왕침등전(王沈等傳)」
40권 「가충등전(賈充等傳)」
41권 「위서등전(魏舒等傳)」
42권 「왕혼등전(王渾等傳)」
43권 「산도등전(山濤等傳)」
44권 「정무등전(鄭袤等傳)」
45권 「유의등전(劉毅等傳)」
46권 「유송등전(劉頌等傳)」
47권 「부현전(傅玄傳)」
48권 「상웅등전(向雄等傳)」
49권 「완적등전(阮籍等傳)」
50권 「조지등전(曹志等傳)」
51권 「황보밀등전(皇甫謐等傳)」
52권 「극선등전(郤詵等傳)」
53권 「민회태자전(愍懷太子傳)」
54권 「육기등전(陸機等傳)」
55권 「하후담등전(夏侯湛等傳)」
56권 「강통등전(江統等傳)」
57권 「나헌등전(羅憲等傳)」
58권 「주처등전(周處等傳)」
59권 「여남왕량등전(汝南王亮等傳)」
60권 「해계등전(解系等傳)」
61권 「주준등전(周浚等傳)」
62권 「유곤등전(劉琨等傳)」
63권 「소속등전(邵續等傳)」
64권 「무십삼왕원사왕간문삼자전(武十三王元四王簡文三子傳)」
65권 「왕도전(王導傳)」
66권 「유홍등전(劉弘等傳)」
67권 「온교등전(溫嶠等傳)」
68권 「고영등전(顧榮等傳)」
69권 「유외등전(劉隗等傳)」
70권 「응첨등전(應詹等傳)」
71권 「손혜등전(孫惠等傳)」
72권 「곽박등전(郭璞等傳)」
73권 「유량전(庾亮傳)」
74권 「환이전(桓彝傳)」
75권 「왕담등전(王湛等傳)」
76권 「왕서등전(王舒等傳)」
77권 「육엽등전(陸曄等傳)」
78권 「공유등전(孔愉等傳)」
79권 「사상등전(謝尙等傳)」
80권 「왕희지전(王羲之等傳)」
81권 「왕손등전(王遜等傳)」
82권 「진수등전(陳壽等傳)」
83권 「고화등전(顧和等傳)」
84권 「왕공등전(王恭等傳)」
85권 「유의등전(劉毅等傳)」
86권 「장궤전(張軌傳)」
87권 「양무소왕전(涼武昭王傳)」
88권 「효우전(孝友傳)」
89권 「충의전(忠義傳)」
90권 「양리전(良吏傳)」
91권 「유림전(儒林傳)」
92권 「문원전(文苑傳)」
93권 「외척전(外戚傳)」
94권 「은일전(隠逸傳)」
95권 「예술전(藝術傳)」
96권 「열녀전(列女傳)」
97권 「사이전(四夷傳)」
98권 「왕돈등전(王敦等傳)」
99권 「환현등전(桓玄等傳)」
100권 「왕미등전(王彌等傳)」

(1) 사마소 부인 왕원희와는 다른 인물로 효회태후로 추존된 사마치의 어머니.
[ 재기(戴記) ]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건안열후(建安烈侯)
毛穆之 | 모목지
시호
(烈)
작위
주릉현후(州陵縣侯) → 건안현후(建安縣侯)
(毛)
목지(穆之)
헌조(憲祖)
아명
호생(虎生)
생몰
불명
출신
형양군(滎陽郡) 양무현(陽武縣)
부친
모보(毛寶)
형제자매
2남 중 장남
자녀
6남
1. 개요2. 생애3. 기타

1. 개요[편집]

동진의 인물. 정로장군 모보의 장남. 모진(毛珍), 모거, 모구(毛球), 모번(毛璠), 모근(毛瑾), 모원(毛瑗)의 아버지.

2. 생애[편집]

모목지는 과감하고 의연하여 아버지 모보의 기풍이 있었다. 처음에는 안서장군 유익(庾翼)의 참군으로 임관했고, 아버지가 후조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그의 주릉현후(州陵縣侯) 작위 이었다.

건원 2년(344년) 11월, 거기장군, 강주자사 유빙(庾冰)이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은 동생 유익은 나랏일과 더불어 형의 장례식을 동시에 처리해야만 했다. 유익은 형이 사망한 장소인 무창(武昌)으로 향하면서 장남 유방지(庾方之)를 건무장군으로 삼아 양양(襄陽)을 지키게 했다. 하지만 유방지의 나이가 아직 너무 어린 것을 걱정하여, 휘하 장수 중 제일 믿음직스러운 모목지를 건무사마로 옮기고 유방지를 보필하게 했다.

영화 원년(345년) 7월, 유익이 등창으로 병사하자, 유익의 장수인 간찬(乾瓚), 대희(戴羲)가 관군장군 조거(曹据)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모목지는 안서장사 강반, 사마 주도(朱燾) 등과 함께 간찬의 난을 진압하였다. 이후 환온이 형주자사, 안서장군에 임명되어 유익을 대신해 형주로 부임하니, 모목지는 그의 밑에서 다시 참군을 지냈다.

영화 3년(347년) 3월, 환온의 성한 토벌에 종군해 공을 세운 것이 인정되어, 그의 차남이 도향후(都鄉侯)에 봉해졌다. 이후 양무장군, 영천태수를 역임했다.

영화 12년(356년) 2월, 환온이 낙양의 강족 요양을 정벌할 때도 종군하여 관중으로 들어갔다. 환온은 요양을 격파하고 낙양을 수복한 뒤, 조정에 상표해 진서장군 사상으로 하여금 낙양을 수비하게 할 것을 청했다. 환온은 조정의 명을 받고 귀환하면서 군사 2,000명과 모목지, 독호 진오(陳午), 하남태수 대시(戴施)를 남겨, 사상이 도착할 때까지 낙양에서 진나라 황릉을 보위하게 했다.

승평 원년(357년), 도독영주제군사(都督寧州諸軍事), 양위장군, 영주자사로 승진하였다.

승평 4년(360년) 11월, 환온이 남군공(南郡公)에 봉해질 때, 모목지는 건안현후(建安縣侯)로 개봉되고, 태위참군, 관군장군을 겸하였다.

태화 4년(369년) 4월, 환온은 세번째 북벌에 나서면서 수로를 이용해 전쟁 준비를 했는데, 하필 가뭄으로 인해 강물이 메말라 함선을 띄울 수 없게 되었다. 이에 환온은 모목지에게 수로를 파서 거야택(巨野澤)과 문수(汶水)의 물을 청수(淸水)까지 끌어오도록 명했다. 모목지는 병사들을 동원해 2개월 가까이 대규모 공사를 벌인 끝에 100리 가량의 수로를 뚫고, 거야택과 문수의 물을 청수로 끌어왔다. 환온의 함대는 청수에서 황하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전연 정벌을 개시하였다.

태화 4년(369년) 9월, 전연의 명장 모용수의 활약으로 동진군은 대패하고, 배와 병장기를 모두 불태운 뒤에 육로로 퇴각했다. 환온은 퇴각하면서 모목지를 동연(東燕)에 남게 하고, 도독동연4군제군사(都督東燕四郡諸軍事), 영동연태수(領東燕太守)로 삼았다.

태화 4년(369년) 11월, 예주자사 원진이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환온은 이를 토벌하기 위해 떠나면서 모목지를 영회남태수(領淮南太守)로 삼고 역양(歷陽)을 진수하게 했다.

태화 6년(371년) 정월, 원진, 원근이 모두 토벌된 후에는 도독양주지강서제군사(都督揚州之江西諸軍事), 영동군태수(領陳郡太守)로 옮겨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독양주지의성형주5군옹주지경조제군사(都督揚州之義成荊州五郡雍州之京兆諸軍事), 양양, 의성, 하남 3군태수로 옮겨졌고, 관군장군 직책은 이전과 같이 하였다. 이후 영양주자사(領梁州刺史)도 겸했다가 병에 걸려 해직되었으나, 조정에서 다시 불러 금방 관군장군으로 복권되었다.

태원 3년(378년) 8월, 전진의 장수 팽초(彭超)가 팽성(彭城)을 공격하니, 모목지는 가절, 감강북제군사(監江北諸軍事)에 임명되어 광릉(廣陵)을 진수했다. 이후 우장군, 선성내사, 가절이 되어, 50,000 군대를 이끌고 고숙(姑孰)에 주둔해 전진군을 막았다.

태원 4년(379년) 2월, 양양 내성에서 전진군의 공세를 버티고 있던 주서를 구원하기 위해 출진했으나, 모목지가 도착하기 전에 양양이 함락되자 군을 물렸다.

태원 4년(379년) 3월, 거기장군 환충은 모목지를 도독양주지3군제군사(都督梁州之3郡諸軍事), 서만교위, 익주자사, 건평태수로 삼아 파군(巴郡)을 지키게 했다. 또, 모목지의 아들인 모구(毛球)를 재동태수로 임명했다. 모목지와 모구는 전진에게 빼앗긴 익주를 되찾고자 군사 30,000명을 이끌고 파서(巴西)로 향했는데, 선봉군을 이끌던 전봉독호 조복(趙福)이 전진의 장수 장소(張卲)에게 패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군량도 다 떨어지자, 모목지와 모구는 어쩔 수 없이 파동(巴東)으로 물러났다. 오래지 않아 모목지는 그곳에서 병을 얻고 사망했다.

사후 조정에서 그를 중군장군으로 추증하였다. 시호는 '열(烈)'. 아들 모진(毛珍)이 작위를 이었고, 관직은 천문태수에 이르렀다. 그에게는 총 여섯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모거(毛據)가 명성이 제일 높았다고 한다.

3. 기타[편집]

  • 사서에 나오는 모헌조, 모호생이라는 인물도 모두 모목지와 동일 인물이라 보면 된다. 생전에 애정황후 왕목지(王穆之)와 같은 휘를 가지고 있어 자(字)인 "헌조(憲祖)"로 불리다가, 환현이 잠시 황위를 찬탈했을 때는 환현의 할머니 공헌(孔憲)의 '헌(憲)'자 때문에 그 뒤로 아명인 "호생(虎生)"으로 불렸기 때문. 여담으로 사후에는 아명마저 당태조 이호(李虎)의 '호(虎)'자가 같아서 "무생(武生)" 고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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