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 BACK << -|- >> HOME <<)

웅원

최근 수정 시각:
편집
현재 사용중인 아이피가 ACL그룹 IDC #12915에 있기 때문에 편집 권한이 부족합니다.
만료일 : 무기한
사유 : IDC(AS26496)
토론 역사
[ 제기(帝紀) ]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 열전(列傳) ]
31·32권 「후비전(后妃傳)」
33권 「왕상등전(王祥等傳)」
34권 「양호등전(羊祜等傳)」
35권 「진건등전(陳騫等傳)」
36권 「위관등전(衛瓘等傳)」
37권 「종실전(宗室傳)」
38권 「선오왕문육왕전(宣五王文六王傳)」
39권 「왕침등전(王沈等傳)」
40권 「가충등전(賈充等傳)」
41권 「위서등전(魏舒等傳)」
42권 「왕혼등전(王渾等傳)」
43권 「산도등전(山濤等傳)」
44권 「정무등전(鄭袤等傳)」
45권 「유의등전(劉毅等傳)」
46권 「유송등전(劉頌等傳)」
47권 「부현전(傅玄傳)」
48권 「상웅등전(向雄等傳)」
49권 「완적등전(阮籍等傳)」
50권 「조지등전(曹志等傳)」
51권 「황보밀등전(皇甫謐等傳)」
52권 「극선등전(郤詵等傳)」
53권 「민회태자전(愍懷太子傳)」
54권 「육기등전(陸機等傳)」
55권 「하후담등전(夏侯湛等傳)」
56권 「강통등전(江統等傳)」
57권 「나헌등전(羅憲等傳)」
58권 「주처등전(周處等傳)」
59권 「여남왕량등전(汝南王亮等傳)」
60권 「해계등전(解系等傳)」
61권 「주준등전(周浚等傳)」
62권 「유곤등전(劉琨等傳)」
63권 「소속등전(邵續等傳)」
64권 「무십삼왕원사왕간문삼자전(武十三王元四王簡文三子傳)」
65권 「왕도전(王導傳)」
66권 「유홍등전(劉弘等傳)」
67권 「온교등전(溫嶠等傳)」
68권 「고영등전(顧榮等傳)」
69권 「유외등전(劉隗等傳)」
70권 「응첨등전(應詹等傳)」
71권 「손혜등전(孫惠等傳)」
72권 「곽박등전(郭璞等傳)」
73권 「유량전(庾亮傳)」
74권 「환이전(桓彝傳)」
75권 「왕담등전(王湛等傳)」
76권 「왕서등전(王舒等傳)」
77권 「육엽등전(陸曄等傳)」
78권 「공유등전(孔愉等傳)」
79권 「사상등전(謝尙等傳)」
80권 「왕희지전(王羲之等傳)」
81권 「왕손등전(王遜等傳)」
82권 「진수등전(陳壽等傳)」
83권 「고화등전(顧和等傳)」
84권 「왕공등전(王恭等傳)」
85권 「유의등전(劉毅等傳)」
86권 「장궤전(張軌傳)」
87권 「양무소왕전(涼武昭王傳)」
88권 「효우전(孝友傳)」
89권 「충의전(忠義傳)」
90권 「양리전(良吏傳)」
91권 「유림전(儒林傳)」
92권 「문원전(文苑傳)」
93권 「외척전(外戚傳)」
94권 「은일전(隠逸傳)」
95권 「예술전(藝術傳)」
96권 「열녀전(列女傳)」
97권 「사이전(四夷傳)」
98권 「왕돈등전(王敦等傳)」
99권 「환현등전(桓玄等傳)」
100권 「왕미등전(王彌等傳)」

(1) 사마소 부인 왕원희와는 다른 인물로 효회태후로 추존된 사마치의 어머니.
[ 재기(戴記) ]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1. 개요2. 생애

1. 개요[편집]

熊遠
(? ~ 322)

서진동진의 인물로 자는 효문(孝文). 양주 예장군(豫章郡) 남창현(南昌縣) 출신. 조부 웅교(熊翹)는 본래 석숭 집안의 종이었으나, 그를 범상치 않게 본 황문랑 반악 덕에 풀려나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2. 생애[편집]

현에서 웅원을 불러 공조에 임명하려 했으나, 웅원이 이에 불응하자 사람을 보내 강제로 관복을 입히고 관청에 출근시켰다. 10여일 후, 군(郡)의 문학연(文學掾)으로 천거되었지만 웅원은 이렇게 말하며 현에 남기를 간청했다.
"큰 것을 말하되, 작은 것을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태수는 그를 효렴으로 천거해 저족강족 토벌에 종군하게 했다. 웅원은 이번에도 따르지 않으려 했지만, 태수가 직접 농우(隴右)까지 그를 끌고 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토벌에 참여한 뒤 귀환했다. 이후 회계태수 하정(夏靜)의 초빙을 받고 그의 공조로 들어갔고, 하정이 퇴직할 때는 배웅까지 해줬다. 웅원은 계속 승진해 주(州)에서 주부, 별가를 지내다가, 수재로 천거되어 강주자사 화일의 사마, 영남창태수, 영원호군을 역임했다.

건흥 원년(313년) 8월, 강주자사 화일을 제거한 좌승상 낭야왕 사마예가 웅원을 불러 주부로 삼았다. 당시 서진의 회제 사마치전조의 황제 유총에게 피살되었다는 소식이 막 강동에 전해져, 낭야왕 사마예는 상복을 입고 애도를 표했다. 웅원은 상소를 올려 낙양 복원을 주창했으나 하필 그때 두도의 난이 일어나 기각되었다. 당시 낭야왕 사마예는 강동에 한창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였고, 그의 정권은 이제 막 세워진 터라 국가의 농업이 이폐하니, 웅원이 건의했다.
"입춘 날, 황제는 상제께 곡식을 기원한 뒤, 길일을 택해 삼공, 구경, 제후, 대부를 거느리고 친히 밭을 경작하면서 백성들에게 농사를 권면했습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정사를 친히 돌보지 않으면, 서민들이 믿지 않는다(弗躬弗親,庶人不信).」라 했습니다. 국상 이래 농경을 돌보지 아니한다면 놀고 먹는 자들만 많아져 모두 멸망을 향해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웅원의 건의는 의자(議者)들 사이에서 아름답다 칭송받았다.

건흥 원년(313년) 12월, 원제가 음악을 연주하게 하며 본격적으로 새해를 즐길 준비를 하자 웅원이 간했다.
"삼가 아뢰오니, 《상서》에 따르면 요 임금이 승하하자 사해(四海)에서 팔음(八音)의 연주를 막았다 합니다. 《예기》에 이르기를, 「흉한 일이 일어난 해에 천자는 음악을 끊고 반찬을 줄여야 한다」 하였습니다. 효회황제의 재궁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며, 되려 승냥이와 이리 같이 탐욕스러운 자들이 당도하여 인신(人神) 모두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공명과 덕을 무성히 하고, 사직을 올바르게 세우는 일에 힘써야만 합니다. 지금 두도의 무리가 상천(湘川)에 개미떼처럼 몰려들어 몇 해째 정벌을 행하고 있음에도, 백성들이 피폐하여 의(義)의 무리를 봉영하지 않아 반군을 제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침 곧 있을 이단(履端)[1] 시기에 남북에서 사람들이 운집할 터이니, 그때 유식한 선비들에게 명해 예(禮)를 권하게 하시옵소서. 과거 제환공이 관택(貫澤)에서 회맹을 열었을 때, 뭇 제후들도 중국을 걱정하는 마음이 있어 부르지 않았음에도 모두 모였습니다. 이리하여 제환공은 제후들을 거느리고 규구(葵丘)에서 주나라에 반역한 9개국을 벌할 수 있었습니다. 인심을 귀의하게 만드는 것은 오직 도(道)와 의(義) 뿐입니다. 황위를 이으신 폐하께서는 패권을 회복해 현재에 이르셨으니, 도덕의 궤도를 보이시고 충효의 의를 천명하셔야 합니다. 또, 인의를 밝히시고 예약의 근본을 널리 알려, 사방에 선비들을 파견해 법을 지키게 해야 합니다. 허나, 지금 폐하께서 하시려는 것이 선비들의 눈에는 놀이와 희롱을 숭상하는 것처럼 보일까 두렵습니다. 《운(雲)》, 《소(韶)》, 《아(雅)》, 《송(頌)》의 아름다움을 받아들이지 마시고 속세를 크게 교화시켜 주시옵소서. 정단날에는 군신들에게 음식을 하사하는 것만으로도 족합니다."
원제가 이에 따랐다.

건흥 2년(314년), 웅원은 승상참군으로 옮겨졌다. 두도가 왕돈, 도간, 감탁 등과 혈전을 벌이며 쉽사리 제압당하지 않았다. 시랑 왕감은 낭야왕 사마예에게 두도를 친정할 것을 건의했지만 웅원이 반대해 그만두었다. 과연 웅원의 예상대로 두도가 이듬해에 관군에 의해 제압당하니, 웅원은 누차 승진해 태자중서자, 상서좌승, 산기상시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낭야왕 사마예는 매번 그의 충심을 치하하고 탄식하며 이르길,
"경(卿) 덕분에 조정은 진지한 분위기로 여유를 부리지 않고 강건함을 드러내며, 그대는 충량(忠亮)까지 지극하니 가히 왕신(王臣)이라 할 수 있소. 그러므로 나는 기꺼이 경에게 의지하고 부지런히 격려해주겠소!"
라 하였다.

태흥 원년(318년) 3월, 서진의 마지막 황제 민제 사마업마저 피살되었다는 소식이 강동에 도착했다. 사마예는 마침내 황제에 올라 그동안 자신을 도왔던 관리와 백성들에게 과도한 상을 하사하려 했는데, 그 수만 무려 20여 만 명이나 되었다. 웅원은 진나라한나라의 예를 들며 간했지만 원제 사마예는 따르지 않았다. 동진이 본격적으로 세워지자 어사중승에 임명되어, 술에 취해 사고를 친 조협의 파면을 주청했지만 이번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시중으로 옮겨졌다가 회계내사로 부임했다.

영창 원년(322년) 정월, 대장군 왕돈이 무창(武昌)에서 거병하니, 왕돈의 심복 심충도 이에 호응해 들고 일어났다. 심충은 웅원에게 장군을 더했으나, 웅원은 반란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국경을 지키며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데에 힘썼다. 이후 왕돈이 석두성에서 원제 사마예의 항복을 받아내고, 황제의 명령을 사칭해 웅원을 태상경(太常卿)에 임명하고 산기상시를 더했다. 그러나 왕돈은 웅원이 본래 정직하고 모략이 있는 것을 두려워 해, 그를 불러 자신의 장사로 삼고 곁에 두었다. 웅원은 수 개월간 왕돈을 섬기다가 병사했다.

[1] 음력 1월 1일로, 새해 명절을 말한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니며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이거나, 잘못된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문서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원할 경우 직접 토론을 발제할 수 있습니다.

  •  
  •  
  •  
  •  
  •  
  •  
  •  
  •  
  •  
  •  
  •  
  •  
  •  
  •  
  •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