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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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세에 100균(鈞)에 달하는 무게를 드는 괴력을 자랑했으며, 소리를 크게 지르면 몇 리 밖에서도 들을 수 있어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그러나 성격이 잔인하여 6월의 무더운 여름 날에도 여러 겹의 옷을 껴 입고는 부하에게 부채질을 시켰는데, 부채질이 전혀 시원하지 않다며 부채질하던 자를 곧잘 베어 죽이기도 하였다.
태안 연간(302년 ~ 303년)에 말목장을 운영하게 되면서 다수의 부하들을 휘하에 거느리게 되었다. 급상의 목장 인근에는 사환(師懽)이라는 자가 살고 있었는데, 당시 노예로 팔려갔던 갈족인 배(㔨)가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급상은 우연히 배와 친해져 그를 사환으로부터 사서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키고 목장에 고용하였다.
영흥 2년(305년) 8월, 성도왕 사마영이 폐출되자, 그의 옛 장수인 공사번(公師藩)이 사마영의 복권을 명분으로 조(趙)와 위(魏) 지역에 걸쳐 무리 수만 명을 모아 거병하였다. 급상은 배와 함께 유목민과 말 수백 필을 거느리고 청하(清河)로 이동해 공사번의 세력에 합류하였다. 이때 급상은 배에게 제대로 된 이름을 가질 것을 제안하여 성을 "석(石)", 휘를 "륵(勒)"이라 개명하게 하였다.
광희 원년(306년) 9월, 성도왕 사마영이 공사번에게 가기 위해 조가(朝歌)로 도망쳐 무리를 모으던 중 돈구태수 풍숭(馮嵩)에게 붙잡혀 업(鄴)으로 끌려가 유폐당하였다. 이에 공사번은 업을 습격해 사마영을 구출하고자 백마진(白馬津)에서 황하를 건너려 하였는데, 연주자사 구희의 공격을 받고 전멸하여 참수당하였다. 급상은 추격군을 뿌리치고 치평의 말목장으로 돌아가 다시 무리를 모으면서 힘을 길렀다.
영가 원년(307년) 3월, 급상이 마침내 거병하여 대장군을 자칭하고, 사마월, 사마등을 주살해 죽은 사마영의 원수를 갚겠다 선언하였다. 그리고 석륵을 선봉으로 삼아 다시 조와 위 일대의 군현들을 노략질하기 시작하니, 가는 곳마다 이기지 않는 곳이 없었다. 자신감을 얻은 급상은 석륵을 토로장군에 임명해 업으로 진공하였다. 업의 신채왕 사마등은 형 사마월로부터 많은 물자를 지원받았으나, 인색한 성품으로 인해 평소 장수와 병사들에게 베풀지 않았다. 그런데 급상의 반란군이 들이닥칠 위기에 놓이자, 그제서야 장병들에게 쌀과 비단을 뿌렸지만 이미 떠나간 인심을 돌이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영가 원년(307년) 5월, 급상은 사마등이 보낸 위군태수 풍숭을 대파하고 업을 함락시켰으며, 사마등은 단기로 도망치다가 급상의 부하인 이풍(李豊)에게 따라잡혀 살해당했다. 업에 입성한 급상은 과거 노지가 묻어놓은 사마영의 관을 땅 속에서 파내어 수레에 싣고 일이 있을 때마다 관 뚜껑을 열어 사마영의 시체 앞에 아뢴 후 실행에 옮겼다.[2] 급상은 병사와 백성 10,000여 명을 학살한 뒤 업궁(鄴宮)에 불을 놓았고, 그 화재는 10일이 지나도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마침내 전소되었다. 이로써 후한 말기의 군벌인 원소가 중건하기 시작해 조조가 완공시켰던 궁전이 동작대와 더불어 불타 없어졌다.
영가 원년(307년) 6월, 업 함락으로 군사들의 사기를 한껏 끌어올린 급상은 다음 목표인 허창(許昌)의 사마월도 죽이기 위해 석륵에게 군대를 주어 연진(延津)에서 황하를 건너 연주를 침범하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북쪽으로 나아가 서진의 유주(幽州)자사 석선(石尟)이 지키는 낙릉(樂陵)을 공격해 점령하고 석선을 전사시킴으로써 또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연주로 보낸 군대의 전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석륵은 연주자사 구희가 이끄는 관군과 황하 북쪽 강변에서 30여 차례 접전을 벌여 서로 승패를 주고 받았지만 승패가 나지 않아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져있었다.
영가 원년(307년) 7월, 허창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사마월이 군대를 움직여 관도(官渡)에서 구희를 원조하자, 급상도 낙릉에서 내려와 석륵과 합류해 동무양(東武陽)에서 총공격을 펼쳤다. 하지만 급상과 석륵은 관군에게 크게 패하고 북쪽으로 패주하여 청연(淸淵)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지켰다.
영가 원년(307년) 9월, 구희의 추격군으로부터 공격을 받고는 또 대패하여 10,000여 명이 전사하고, 급상이 세워둔 보루 8개를 모두 허물어졌다. 급상은 석륵과 함께 살아남은 패잔병을 수습해 흉노족의 한왕(漢王) 유연에게로 귀순하려 했으나, 이번엔 적교(赤橋)에서 기주자사 정소에게 패하여 급상의 무리는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급상은 치평의 말목장으로 잠시 돌아갔다가 낙릉으로 갔고, 석륵은 그와 헤어져 병주로 가 유연에게 항복하였다.
영가 원년(307년) 12월 2일[3], 당시 병주에는 기근이 잦아 병주의 백성과 병사 10,000여 명이 유민이 되어 기주로 들어갔고, 이들은 곧 '살 길을 구걸한다'는 의미로 "걸활(乞活)"이라는 이름으로 기주의 유민 무리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걸활군에는 사마등이 병주자사를 지내던 시절의 부하들이 많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들 중 전견(田甄), 전란(田蘭), 박성(薄盛) 등이 사마등의 원수를 갚겠다며 급상을 습격해 참수하였다. 아울러 급상이 항상 끌고 다니던 사마영의 관은 우물에 던졌다.[4]
태안 연간(302년 ~ 303년)에 말목장을 운영하게 되면서 다수의 부하들을 휘하에 거느리게 되었다. 급상의 목장 인근에는 사환(師懽)이라는 자가 살고 있었는데, 당시 노예로 팔려갔던 갈족인 배(㔨)가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급상은 우연히 배와 친해져 그를 사환으로부터 사서 노예 신분에서 해방시키고 목장에 고용하였다.
영흥 2년(305년) 8월, 성도왕 사마영이 폐출되자, 그의 옛 장수인 공사번(公師藩)이 사마영의 복권을 명분으로 조(趙)와 위(魏) 지역에 걸쳐 무리 수만 명을 모아 거병하였다. 급상은 배와 함께 유목민과 말 수백 필을 거느리고 청하(清河)로 이동해 공사번의 세력에 합류하였다. 이때 급상은 배에게 제대로 된 이름을 가질 것을 제안하여 성을 "석(石)", 휘를 "륵(勒)"이라 개명하게 하였다.
광희 원년(306년) 9월, 성도왕 사마영이 공사번에게 가기 위해 조가(朝歌)로 도망쳐 무리를 모으던 중 돈구태수 풍숭(馮嵩)에게 붙잡혀 업(鄴)으로 끌려가 유폐당하였다. 이에 공사번은 업을 습격해 사마영을 구출하고자 백마진(白馬津)에서 황하를 건너려 하였는데, 연주자사 구희의 공격을 받고 전멸하여 참수당하였다. 급상은 추격군을 뿌리치고 치평의 말목장으로 돌아가 다시 무리를 모으면서 힘을 길렀다.
영가 원년(307년) 3월, 급상이 마침내 거병하여 대장군을 자칭하고, 사마월, 사마등을 주살해 죽은 사마영의 원수를 갚겠다 선언하였다. 그리고 석륵을 선봉으로 삼아 다시 조와 위 일대의 군현들을 노략질하기 시작하니, 가는 곳마다 이기지 않는 곳이 없었다. 자신감을 얻은 급상은 석륵을 토로장군에 임명해 업으로 진공하였다. 업의 신채왕 사마등은 형 사마월로부터 많은 물자를 지원받았으나, 인색한 성품으로 인해 평소 장수와 병사들에게 베풀지 않았다. 그런데 급상의 반란군이 들이닥칠 위기에 놓이자, 그제서야 장병들에게 쌀과 비단을 뿌렸지만 이미 떠나간 인심을 돌이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영가 원년(307년) 5월, 급상은 사마등이 보낸 위군태수 풍숭을 대파하고 업을 함락시켰으며, 사마등은 단기로 도망치다가 급상의 부하인 이풍(李豊)에게 따라잡혀 살해당했다. 업에 입성한 급상은 과거 노지가 묻어놓은 사마영의 관을 땅 속에서 파내어 수레에 싣고 일이 있을 때마다 관 뚜껑을 열어 사마영의 시체 앞에 아뢴 후 실행에 옮겼다.[2] 급상은 병사와 백성 10,000여 명을 학살한 뒤 업궁(鄴宮)에 불을 놓았고, 그 화재는 10일이 지나도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마침내 전소되었다. 이로써 후한 말기의 군벌인 원소가 중건하기 시작해 조조가 완공시켰던 궁전이 동작대와 더불어 불타 없어졌다.
영가 원년(307년) 6월, 업 함락으로 군사들의 사기를 한껏 끌어올린 급상은 다음 목표인 허창(許昌)의 사마월도 죽이기 위해 석륵에게 군대를 주어 연진(延津)에서 황하를 건너 연주를 침범하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북쪽으로 나아가 서진의 유주(幽州)자사 석선(石尟)이 지키는 낙릉(樂陵)을 공격해 점령하고 석선을 전사시킴으로써 또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연주로 보낸 군대의 전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석륵은 연주자사 구희가 이끄는 관군과 황하 북쪽 강변에서 30여 차례 접전을 벌여 서로 승패를 주고 받았지만 승패가 나지 않아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져있었다.
영가 원년(307년) 7월, 허창에서 상황을 주시하던 사마월이 군대를 움직여 관도(官渡)에서 구희를 원조하자, 급상도 낙릉에서 내려와 석륵과 합류해 동무양(東武陽)에서 총공격을 펼쳤다. 하지만 급상과 석륵은 관군에게 크게 패하고 북쪽으로 패주하여 청연(淸淵)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지켰다.
영가 원년(307년) 9월, 구희의 추격군으로부터 공격을 받고는 또 대패하여 10,000여 명이 전사하고, 급상이 세워둔 보루 8개를 모두 허물어졌다. 급상은 석륵과 함께 살아남은 패잔병을 수습해 흉노족의 한왕(漢王) 유연에게로 귀순하려 했으나, 이번엔 적교(赤橋)에서 기주자사 정소에게 패하여 급상의 무리는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급상은 치평의 말목장으로 잠시 돌아갔다가 낙릉으로 갔고, 석륵은 그와 헤어져 병주로 가 유연에게 항복하였다.
영가 원년(307년) 12월 2일[3], 당시 병주에는 기근이 잦아 병주의 백성과 병사 10,000여 명이 유민이 되어 기주로 들어갔고, 이들은 곧 '살 길을 구걸한다'는 의미로 "걸활(乞活)"이라는 이름으로 기주의 유민 무리로서 활동하고 있었다. 걸활군에는 사마등이 병주자사를 지내던 시절의 부하들이 많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들 중 전견(田甄), 전란(田蘭), 박성(薄盛) 등이 사마등의 원수를 갚겠다며 급상을 습격해 참수하였다. 아울러 급상이 항상 끌고 다니던 사마영의 관은 우물에 던졌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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