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보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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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의 72대 태위 皇甫嵩 | 황보숭 | |
이름 | 황보숭 |
자 | 의진(義眞) |
출생 | ? ~ 195년 |
출신 | 양주 안정군(安定郡) 조나현(朝那縣) |
주요 참전 | 황건적의 난, 양주의 난 |
젊었을 때 재능이 이미 조정에까지 널리 알려져 일찍이 효렴과 무재로 천거되었으며, 낭중을 역임하여 패릉과 임분의 현령에 승진했지만, 곧 아버지의 상 때문에 관직을 사퇴하였다. 대장군 두무와 태부 진번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영제 때 의랑에 임명되었고 곧이어 북지태수로 전임되었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조정은 황보숭을 좌중랑장에 임명하여 노식, 주준과 함께 황건적 토벌에 나설 것을 명하였다. 황보숭은 장사를 수비할 때 화공을 구사해 당시 파재가 이끌고 있던 황건적을 혼란에 빠지게 하였고, 때 마침 장사에 도착한 조조와 협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황보숭은 도향후에 봉해졌고 계속 황건적 소탕에 공을 세웠다.
그가 올린 전과는 그야말로 대단하였다. 파재를 양적까지 추격하였고, 곧 이어 여남 그리고 진국의 황건적들을 토벌하였다. 또한 서화의 팽탈을 격파하고 복사(卜巳)가 이끌던 동군의 황건적도 격파한 뒤 우두머리 복사를 생포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그리고 장각 부대와 싸우던 노식은 연승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좌풍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벼슬에서 쫓겨났는데, 그 뒤를 이은 후임 동탁은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하여 황보숭이 조정으로부터 명령을 받아 동탁을 대신하여 장각의 본진을 상대하게 되었다.
황보숭은 거록군 광종에서 야습으로 장량 부대를 대파해 장량을 참하였고, 이미 병사한 장각의 사체를 발견했다. 또한 장각의 동생인 장보의 세력도 격파하고 장보를 살해하였다. 이렇듯 황보숭은 연달아 큰 공적을 세워 기주목 겸 좌거기장군이 되었고 괴리후로 봉해져 식읍 팔천 호를 하사받았다.
《후한서》에 당시 황보숭의 대인군자적인 모습이 잘 기술되어 있다. 그가 기주목이 되었을 때 한해 간의 조세를 백성들에게 나누어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황제가 이를 허락하여 백성들은 황보숭의 은덕을 칭송하는 노래를 불렀다. 더불어 그는 부하 사졸들의 식사가 끝난 후에야 식사를 하는 등 솔선수범을 행하였다. 특히 그의 주변에는 뇌물을 받은 부하가 몇 명 있었는데, 이를 파악한 황보숭은 도리어 자신이 소지하던 금품을 그 부하들에게 내어줬다고 한다. 이를 받은 어떤 부하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조정은 황보숭을 좌중랑장에 임명하여 노식, 주준과 함께 황건적 토벌에 나설 것을 명하였다. 황보숭은 장사를 수비할 때 화공을 구사해 당시 파재가 이끌고 있던 황건적을 혼란에 빠지게 하였고, 때 마침 장사에 도착한 조조와 협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황보숭은 도향후에 봉해졌고 계속 황건적 소탕에 공을 세웠다.
그가 올린 전과는 그야말로 대단하였다. 파재를 양적까지 추격하였고, 곧 이어 여남 그리고 진국의 황건적들을 토벌하였다. 또한 서화의 팽탈을 격파하고 복사(卜巳)가 이끌던 동군의 황건적도 격파한 뒤 우두머리 복사를 생포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그리고 장각 부대와 싸우던 노식은 연승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좌풍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벼슬에서 쫓겨났는데, 그 뒤를 이은 후임 동탁은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하여 황보숭이 조정으로부터 명령을 받아 동탁을 대신하여 장각의 본진을 상대하게 되었다.
황보숭은 거록군 광종에서 야습으로 장량 부대를 대파해 장량을 참하였고, 이미 병사한 장각의 사체를 발견했다. 또한 장각의 동생인 장보의 세력도 격파하고 장보를 살해하였다. 이렇듯 황보숭은 연달아 큰 공적을 세워 기주목 겸 좌거기장군이 되었고 괴리후로 봉해져 식읍 팔천 호를 하사받았다.
《후한서》에 당시 황보숭의 대인군자적인 모습이 잘 기술되어 있다. 그가 기주목이 되었을 때 한해 간의 조세를 백성들에게 나누어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황제가 이를 허락하여 백성들은 황보숭의 은덕을 칭송하는 노래를 불렀다. 더불어 그는 부하 사졸들의 식사가 끝난 후에야 식사를 하는 등 솔선수범을 행하였다. 특히 그의 주변에는 뇌물을 받은 부하가 몇 명 있었는데, 이를 파악한 황보숭은 도리어 자신이 소지하던 금품을 그 부하들에게 내어줬다고 한다. 이를 받은 어떤 부하는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양주 한양군 사람 염충이 황보숭에게 고하기를, "장군님의 기세는 한신보다 더 강하며, 지금 황제는 유방 발끝에도 못 미치는 사람이니 한신과 같은 참혹한 말로를 걷지 마시고 장군께서 부패한 정권을 몰아내고 새 왕조를 여십시오."라며 권유했다. 조정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던 황보숭은 이런 제안을 물리쳤다.
그러나 그는 조정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말았다. 장양은 황건적을 토벌하던 중에 황보숭에게 뇌물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했고, 조충은 대저택을 지었다가 황보숭이 이를 조정에 고발하는 상소를 올렸는지라 이 둘은 황보숭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미워하였다. 결국 황보숭은 장양과 조충이 벌인 공작에 의하여 모함당하여 좌거기장군의 인수를 조정에 반납하게 되었고, 식읍은 이천 호로 줄었다.
그러나 그는 조정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말았다. 장양은 황건적을 토벌하던 중에 황보숭에게 뇌물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했고, 조충은 대저택을 지었다가 황보숭이 이를 조정에 고발하는 상소를 올렸는지라 이 둘은 황보숭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미워하였다. 결국 황보숭은 장양과 조충이 벌인 공작에 의하여 모함당하여 좌거기장군의 인수를 조정에 반납하게 되었고, 식읍은 이천 호로 줄었다.
한수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1] 조정에서는 황보숭을 좌장군에 임명하여 이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동탁도 이 토벌에 참여토록 명하였다. 전투에 앞서 작전회의 중 공격시기에 대한 그 두 사람의 의견이 엇갈렸다. 결과적으로 양주(涼州)의 왕국(王國)이 이끄는 퇴각하는 적을 섬멸하는 공을 황보숭이 취하였는데, 이로써 그는 동탁과 사이가 나빠졌다. 사실 동탁은 총 4만의 군세 중 2만을 거느렸으며, 전투에 참여하지 않아서 이 군세를 고스란히 자신의 세력에 편입시켰다.
여하튼 그동안 동탁이 숨겨왔던 악한 본심을 알게 된 황보숭에게 조카 황보력이 동탁을 제거하자며 강하게 주장했지만, 황보숭은 조정의 명령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며 이를 조정에 보고했다. 조정은 동탁을 책망하며 그의 휘하에 있던 부대를 황보숭에게 넘기고 황보숭의 부장으로서 황보숭의 명령을 따르라는 내용의 칙서를 내렸다. 그러나 동탁은 그 병졸들이 자신을 따르기를 원한다고 답하며 조정의 명령에 수긍하지 않았다. 동탁은 이렇게 크고 작은 군세를 흡수해가며 훗날 하진에게 소환당할 때까지 버티다가 마침내 스스로 재상의 자리에 올라 국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훗날 동탁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쥔 이후에 그에 대항하는 세력은 모두 동탁에 의해 제거되거나 또는 환란을 피해 도망쳤다. 190년에 황보숭은 성문교위 직을 맡으라는 동탁의 강압에 의한 조정의 명을 받았는데, 이는 도성으로 황보숭을 불러들여 죽이려는 동탁의 계책이었다. 이를 알아챈 황보숭의 주변 사람들은 동탁을 공격해야 한다고 황보숭을 설득했지만 황보숭은 순순히 낙양으로 향했다. 황보숭은 동탁에 의해 감옥에 갇혀 죽음의 위기에 몰렸으나 동탁과 친분이 깊던 황보숭의 아들 황보견수가 장안에서 급히 낙양으로 달려와 동탁에게 부친을 사면해줄 것을 간절하게 빌어 황보숭은 목숨을 건졌다.
이후 황보숭은 의랑에 임명되었고 이후 어사중승으로 승진하였는데, 동탁이 장안에 도착할 때 어사중승 이하 모든 관원에게 명하여 동탁 자신에게 인사하도록 해 황보숭을 굴복시키려 했다. 이때 그들이 나누었던 대화는 다음과 같다.
여하튼 그동안 동탁이 숨겨왔던 악한 본심을 알게 된 황보숭에게 조카 황보력이 동탁을 제거하자며 강하게 주장했지만, 황보숭은 조정의 명령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며 이를 조정에 보고했다. 조정은 동탁을 책망하며 그의 휘하에 있던 부대를 황보숭에게 넘기고 황보숭의 부장으로서 황보숭의 명령을 따르라는 내용의 칙서를 내렸다. 그러나 동탁은 그 병졸들이 자신을 따르기를 원한다고 답하며 조정의 명령에 수긍하지 않았다. 동탁은 이렇게 크고 작은 군세를 흡수해가며 훗날 하진에게 소환당할 때까지 버티다가 마침내 스스로 재상의 자리에 올라 국정을 장악하게 되었다.
훗날 동탁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쥔 이후에 그에 대항하는 세력은 모두 동탁에 의해 제거되거나 또는 환란을 피해 도망쳤다. 190년에 황보숭은 성문교위 직을 맡으라는 동탁의 강압에 의한 조정의 명을 받았는데, 이는 도성으로 황보숭을 불러들여 죽이려는 동탁의 계책이었다. 이를 알아챈 황보숭의 주변 사람들은 동탁을 공격해야 한다고 황보숭을 설득했지만 황보숭은 순순히 낙양으로 향했다. 황보숭은 동탁에 의해 감옥에 갇혀 죽음의 위기에 몰렸으나 동탁과 친분이 깊던 황보숭의 아들 황보견수가 장안에서 급히 낙양으로 달려와 동탁에게 부친을 사면해줄 것을 간절하게 빌어 황보숭은 목숨을 건졌다.
이후 황보숭은 의랑에 임명되었고 이후 어사중승으로 승진하였는데, 동탁이 장안에 도착할 때 어사중승 이하 모든 관원에게 명하여 동탁 자신에게 인사하도록 해 황보숭을 굴복시키려 했다. 이때 그들이 나누었던 대화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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