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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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1월 2일 한성부(現 서울특별시)에서 독립유공자인 아버지 현상건과 어머니 임천 조씨(林川 趙氏) 조숙경(趙淑卿)[2]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본 메이지학원 중학부를 졸업한 뒤 상하이 호강대학(滬江大學)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하였다. 호강대학 재학시절부터 육상 및 축구선수생활을 하였으며, 1925년 마닐라에서 개최된 제7회 극동선수권대회에 중국 대표팀의 선수로 출전하였다. 1936 베를린 올림픽 때에도 중국대표단 임원으로 참가하였고, 1945년에는 상해축구협회 부회장직을 역임하였다. 이 밖에 상해 한국교민협회장도 역임했다.
1945년 8.15 광복과 함께 귀국하였다. 1952년 9월부터 1954년 3월까지 제5대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을, 1955년 대한축구협회 회장을, 1960년부터 1962년까지는 대한자기공업협회 회장을 지냈다. 1963년 2월 26일 민주공화당이 창당되자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64년 민주공화당 당무위원에 취임하였다. 1965년에는 제20차 유엔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여했고, 1966년에는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에 취임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제28순위)으로 출마하였으나 당선되지 못하였다. 이듬해인 1968년 최영희가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어 전국구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자 승계하였다. 전국구 국회의원 재임 중이던 1970년 사망하였다.
일본 메이지학원 중학부를 졸업한 뒤 상하이 호강대학(滬江大學)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하였다. 호강대학 재학시절부터 육상 및 축구선수생활을 하였으며, 1925년 마닐라에서 개최된 제7회 극동선수권대회에 중국 대표팀의 선수로 출전하였다. 1936 베를린 올림픽 때에도 중국대표단 임원으로 참가하였고, 1945년에는 상해축구협회 부회장직을 역임하였다. 이 밖에 상해 한국교민협회장도 역임했다.
1945년 8.15 광복과 함께 귀국하였다. 1952년 9월부터 1954년 3월까지 제5대 대한적십자사 사무총장을, 1955년 대한축구협회 회장을, 1960년부터 1962년까지는 대한자기공업협회 회장을 지냈다. 1963년 2월 26일 민주공화당이 창당되자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64년 민주공화당 당무위원에 취임하였다. 1965년에는 제20차 유엔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여했고, 1966년에는 대한올림픽위원회 상임위원에 취임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제28순위)으로 출마하였으나 당선되지 못하였다. 이듬해인 1968년 최영희가 대한민국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어 전국구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자 승계하였다. 전국구 국회의원 재임 중이던 1970년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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