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라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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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사망 | |
재임기간 | 제70대 총리 |
가족 | |
직업 | 정치인 |
정당 | |
서명 |
프랑스의 정치인. 총리를 역임하였으며 나치 독일 치하의 비시 프랑스에서 활동한 것으로 유명하다.
1883년 프랑스 오베르뉴론알프 지방의 샤텔톤에서 카페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 때 자연과학에 흥미를 가졌으나 법학으로 진로를 바꿔 변호사가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라발은 사회주의자였지만, 1차대전의 참상과 볼셰비키의 발흥을 본 후 보수주의자로 전향해 정계에 입문했다. 그 후 보수파의 지지를 받고 1930년대엔 세 번에 걸쳐 프랑스의 총리직을 연임했으며, 타임지에서는 라발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할 정도로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34년 당시 라발은 외무장관인 루이 바르투가 암살되자 13대 대통령 가스통 두메르그 내각의 후임 외무장관에 임명되어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영국 및 이탈리아와 스트레사 전선을 체결했지만 영국이 프랑스를 불신해 단독으로 독일과 영국-독일 해군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2달만에 실패했고, 협상의 실패가 언론에 알려짐에 따라 라발은 사임해야 했다.
2차대전이 일어난 후 프랑스 침공에서 프랑스가 참패하자 라발은 페탱의 뒤를 따라 총리로 다시 취임했고 적극적인 대독협력정책과 반유대주의 정책을 실시했다.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해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라발은 3공화국 의회를 다시 소집한다는 도박수를 들고 왔다. 미국도 투표로 뽑힌 의회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소위 '민주 정부'의 총리인 자신과 협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얄팍한 술수에서 나온 발상이었는데 상전인 독일은 라발의 이런 앙큼한 발악을 용납할 생각이 없었고 라발을 체포해서 독일로 압송했다. 여담으로 이는 1943년이 페탱이 라발을 끌어내리기 위해서 시도했던 방식이었다. 라발과 재회한 페탱은 혐오감을 감추지 못하면서 딱 한번만 그를 만나고 이후 그와 소통할 때 대면하길 거부하고 반드시 서면으로만 소통했다.
독일이 완전히 패전한 후 라발은 루프트바페의 군용기를 타고 스페인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샤를 드골은 프랑코에게 라발의 송환을 강력하게 요구했고, 결국 그는 프랑스로 다시 끌려와 프레즈니 교도소에 수용된다. 1945년 10월 5일 라발의 재판이 개정되었다. 라발은 이미 필리프 페탱이 드골에게 은전을 입어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도 내심 그렇게 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페탱과는 달리 라발은 그 누구도 그를 살려줄 마음이 없었다. 페탱은 무엇보다 1차 대전의 구국 영웅이었으며 친독 행위도 라발에 비해서 프랑스의 이익을 보호하는 면이 있었기에 지지자도 많고, 동정여론도 많았다. 하지만 라발은 좌와 우를 막론하고 철저한 매국노로 국민적 여론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재판이 개정되었을 시 변호인들이 출석하지 않았다.[3] 그 후 변호인단이 출석했으나 재판과정을 주시할 뿐 직접 변론에 나서지 않아 라발은 사실상 자신을 혼자서 변호해야 했다.
재판부는 라발이 비시 정부를 히틀러에게 팔아먹기 위해 광분한 민족반역자라고 판단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피고인은 감방이 좁다고 불평하면서 재판부에게 항의와 불평의 목소리를 높인다는 발언이 나오자, 라발은 "내가 바로 진짜 애국자"라고 도발적인 태도를 취해 결국 퇴장명령을 받아야 했다.
3일째 되는 재판 날 라발은 묵비권을 행사해 출석하지 않았고, 그래서 재판이 피고인의 출석 없이 진행되었다. 재판장과 검사는 피고의 출석이 없이도 재판을 계속할 수 있다고 결정했고 10월 9일 그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10월 15일 사형 당일날 라발은 평소 소지하던 청산가리를 삼켜 자살을 기도했지만 곧 주위에 발견되어 위세척을 당한 후 깨어나 자살은 미수에 그쳤다. 그는 사형대의 앞에 서서 검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먼저 판사들에게 말한다. 그들은 역사상 최대의 범죄를 범한 자들이다. 나는 조국을 너무 사랑한 죄로 죽는다". 그리고 변호인들이 마지막 포옹을 하자 "나는 당신들을 보면서 최후의 순간을 보낸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병사들에게 시선을 주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한 때 자연과학에 흥미를 가졌으나 법학으로 진로를 바꿔 변호사가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라발은 사회주의자였지만, 1차대전의 참상과 볼셰비키의 발흥을 본 후 보수주의자로 전향해 정계에 입문했다. 그 후 보수파의 지지를 받고 1930년대엔 세 번에 걸쳐 프랑스의 총리직을 연임했으며, 타임지에서는 라발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할 정도로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934년 당시 라발은 외무장관인 루이 바르투가 암살되자 13대 대통령 가스통 두메르그 내각의 후임 외무장관에 임명되어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영국 및 이탈리아와 스트레사 전선을 체결했지만 영국이 프랑스를 불신해 단독으로 독일과 영국-독일 해군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2달만에 실패했고, 협상의 실패가 언론에 알려짐에 따라 라발은 사임해야 했다.
2차대전이 일어난 후 프랑스 침공에서 프랑스가 참패하자 라발은 페탱의 뒤를 따라 총리로 다시 취임했고 적극적인 대독협력정책과 반유대주의 정책을 실시했다.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해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라발은 3공화국 의회를 다시 소집한다는 도박수를 들고 왔다. 미국도 투표로 뽑힌 의회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소위 '민주 정부'의 총리인 자신과 협상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얄팍한 술수에서 나온 발상이었는데 상전인 독일은 라발의 이런 앙큼한 발악을 용납할 생각이 없었고 라발을 체포해서 독일로 압송했다. 여담으로 이는 1943년이 페탱이 라발을 끌어내리기 위해서 시도했던 방식이었다. 라발과 재회한 페탱은 혐오감을 감추지 못하면서 딱 한번만 그를 만나고 이후 그와 소통할 때 대면하길 거부하고 반드시 서면으로만 소통했다.
독일이 완전히 패전한 후 라발은 루프트바페의 군용기를 타고 스페인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샤를 드골은 프랑코에게 라발의 송환을 강력하게 요구했고, 결국 그는 프랑스로 다시 끌려와 프레즈니 교도소에 수용된다. 1945년 10월 5일 라발의 재판이 개정되었다. 라발은 이미 필리프 페탱이 드골에게 은전을 입어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도 내심 그렇게 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페탱과는 달리 라발은 그 누구도 그를 살려줄 마음이 없었다. 페탱은 무엇보다 1차 대전의 구국 영웅이었으며 친독 행위도 라발에 비해서 프랑스의 이익을 보호하는 면이 있었기에 지지자도 많고, 동정여론도 많았다. 하지만 라발은 좌와 우를 막론하고 철저한 매국노로 국민적 여론이 조성되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재판이 개정되었을 시 변호인들이 출석하지 않았다.[3] 그 후 변호인단이 출석했으나 재판과정을 주시할 뿐 직접 변론에 나서지 않아 라발은 사실상 자신을 혼자서 변호해야 했다.
재판부는 라발이 비시 정부를 히틀러에게 팔아먹기 위해 광분한 민족반역자라고 판단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피고인은 감방이 좁다고 불평하면서 재판부에게 항의와 불평의 목소리를 높인다는 발언이 나오자, 라발은 "내가 바로 진짜 애국자"라고 도발적인 태도를 취해 결국 퇴장명령을 받아야 했다.
3일째 되는 재판 날 라발은 묵비권을 행사해 출석하지 않았고, 그래서 재판이 피고인의 출석 없이 진행되었다. 재판장과 검사는 피고의 출석이 없이도 재판을 계속할 수 있다고 결정했고 10월 9일 그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10월 15일 사형 당일날 라발은 평소 소지하던 청산가리를 삼켜 자살을 기도했지만 곧 주위에 발견되어 위세척을 당한 후 깨어나 자살은 미수에 그쳤다. 그는 사형대의 앞에 서서 검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먼저 판사들에게 말한다. 그들은 역사상 최대의 범죄를 범한 자들이다. 나는 조국을 너무 사랑한 죄로 죽는다". 그리고 변호인들이 마지막 포옹을 하자 "나는 당신들을 보면서 최후의 순간을 보낸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병사들에게 시선을 주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 나는 비겁하게 죽기 싫다. 나의 심장을 쏘아라. 당신들은 역사상 최대 범죄의 공범들이다."
1945년 10월 15일 낮 12시 30분 그는 사형당했다. 62세의 나이였다.
-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 청산>: 주섭일. 사회와 연대(2004)
- 전간기부터 제2차 세계 대전까지를 다룬 Hearts of Iron IV에서는 게임 시작 시점의 프랑스의 지도자로 나오는데, 중점 국민연합 재건을 채택하면 피에르 라발이 계속 지도자로 있게 된다. 이후 파시즘 루트를 탈 시 잠시 파시즘 정당의 지도자가 된다.
-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페탱 밑에서 프랑스의 총리를 맡고 있다. 페탱보다 더 적극적인 친독 성향을 보이며, 독소전쟁이 발발하자 페탱에게 독일을 감동시켜 프랑스에 대한 양보를 이끌어낼 좋은 기회라 주장하며 페탱에게 적극적으로 참전을 주장한다. 페탱이 사망한 후 국가원수 직위를 물려받아 독재를 강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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