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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옹 강베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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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료일 : 무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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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제37대 총리
레옹 강베타
Léon Gambetta
Gambetta par Éti...
출생
사망
1882년 12월 31일(향년 44세)
프랑스 세브르
국적
재임기간
제37대 총리
정당
중도적 공화주의자(1863년 ~ 1869년)
공화주의 극좌(1869년 ~ 1871년)
공화주의자 동맹(1871년 ~ 1882년)

1. 개요2. 인생

1. 개요[편집]

프랑스정치인. 왕당파와 대립한 공화주의 성향으로 1881년 총리를 지내는 등 프랑스 제3공화국 초기에 핵심인물 중 한명으로 활동했다. 1870년 9월 4일, 프랑스 제2제국의 소멸 후 프랑스 제3공화국이 들어설 때 공화국을 선포한 것도 강베타다.

2. 인생[편집]

변호사 출신으로, 1860년 즈음 제2제국의 권위주의적 성향이 줄어들고 점차 의회주의로 전향하자, 1869년 제국 반대파 의원으로써 정계에 입문해 나폴레옹 3세 측과 대립각을 세웠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터지기 전만 해도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허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터지고 나폴레옹 3세는 포로가 되는 등 졸전 끝에 프랑스 파리프로이센 왕국에 고립되자, 항전론자가 된 강베타는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고 열기구로 파리를 탈출해 남부 도시 투르에서 전력을 가다듬고 오를레앙을 일시 수복하는 등 반격을 꾀하려 한다. 하지만 레옹 강베타도 직접 참여한 프랑스 제3공화국이 들어선 1871년 파리 정부는 프로이센군에 항복하고, 강베타는 이를 인정치 않는다. 그는 파리의 정부를 적법치 못한 정부로 선포하고 항전을 계속하려 한다.

1871년 2월 8일 선거 때, 자신이 속한 공화주의자들이 승리해 항전을 지원해줄 것을 바랐으나 선거는 왕정주의자들의 승리로 끝나고, 그의 항전 희망은 무산된다. 프랑스 정부의 대표가 된 온건 왕당파 오를레앙주의자 아돌프 티에르는 프로이센과 평화협상을 개시하고 알자스-로렌독일 제국에 병합하는 종전안을 승인한다. 허나 이를 굴욕으로 받아들인 강베타는 국회의원직에서 사임하였고 스페인으로 망명한다.

1871년 7월 파리로 돌아와 극좌파 공화주의자로 활동하지만, 아돌프 티에르의 정책에 일견 동조하는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다 1873년 온건 왕당파 티에르는 강경 왕당파들과의 의회 싸움에 휘말려 사임하였고[1], 강경 왕당파 파트리스 드마크마옹 장군이 권력을 잡는다. 이에 왕당파와 중도파(리버럴) 중 중도파를 차악으로 여긴 강베타는 중도파로 일종의 전향을 하나 이 때문에 정치 철새/기회주의자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1876년 마크마옹의 쿠데타에 반대하고, 선거 승리를 이끌며 1879년 공화파의 리더로서 마크마옹의 사퇴를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1881년 총리직과 외무부 장관직을 겸임했지만 곧 내려왔다.

1882년 12월 31일 총상으로 사망한 것으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으나,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실제로 사망년도에 사격 연습을 하다 손에 실수로 발포해 부상을 입은 이력이 있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고. 결정적인 사인은 위암으로 진단되었다고 한다.

1920년 강베타의 유해는 팡테옹에 안치되었다.

[1] 좀 더 정확하게는 이때 이미 티에르도 공화주의자 비슷하게 성향이 변신한 상태였다. 그러니 왕당파와는 당연히 으르렁대고, 공화파도 파리 코뮌을 강제 진압한 티에르를 크게 좋아하진 않았기에 결과적으로는 의회와의 파워 게임에서 밀려 사퇴한 것. 참고로 당시 대통령은 국민투표가 아닌 의회에서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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