쥘 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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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 제36대 총리 |
정당 | 기회주의적 공화주의자 (1871년 ~ 1888년) 국민 공화국 동맹(1888년 ~ 1893년) |
가족 | 배우자 외제니 리슬레[1] |
생 디에라는 프랑스 동부의 작은 마을의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났다. 생 디에와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중등교육을 받은 이후 파리에서 법학을 전공한다. 변호사가 된 페리를 나폴레옹 3세와 프랑스 제2제국을 비판하는 민주주의자들에 큰 영감을 얻고 오스만 센 지구 시장 [2]을 비판하는 신문 기사를 낸다.
1870년에 국방부에서 일하고, 같은 해 말에는 파리 시장으로 임명된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파리가 포위됐을 때는 물자공급을 맡았는데, 식량을 인색하게 배급한 탓에 "기아 페리"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파리 코뮌을 강력하게 진압하는 것을 주장했지만, 그의 신변을 걱정한 아돌프 티에르는 그를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레옹 강베타와 쥘 그레비와 함께 파트리스 드마크마옹의 왕당파 정권에 저항하는 공화파를 이끈다. 1877년 5월 16일 헌정위기 때 마크마옹이 공화주의자 쥘 시몽을 해임하자, 의회 과반을 차지한 공화파와 함께 정부를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의회를 해산당한다. 결국 1879년 왕당파를 상대로 완전한 승리를 거두고 쥘 페리는 대통령 쥘 그레비에 의해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된다.
장관이 된 즉시부터 천주교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소교구의 사제가 교육을 담당하는게 흔한 편이었는데, 페리는 허가받지 않은 종교 교육을 금지하려 하지만, 보수파의 완강한 저항을 우려한 쥘 그레비가 불인가한다. 1879년에는 세브르 여자고등사범학교[3]를 설립하고, 1880년에 여성 교육법을 통과시키고, 1881년에는 집회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1882년에 긴 법적 사투 끝에 무상, 의무적, 세속적 교육을 보장하는 법안을 인가한다. 반교권주의의 교육 정책을 실시해 가톨릭 교회의 세력 약화에 혁혁한 공을 세울 수 있었다.
쥘 페리는 프랑스 식민주의의 얼굴마담이기도 했다. 1885년 7월 28일 페리의 연설이 그의 식민주의에 대한 사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는 "우월한 인종"이 "열등한 인종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식민주의에 격렬하게 반대했고, 유교, 힌두교 등의 유구함을 언급하며 유럽의 우월성을 의문시했던 조르주 클레망소와 대조된다. 페리가 이끄는 식민파들은 1881년에 튀니지를 보호령으로 삼는 바르도 조약을 맺었고, 청불전쟁을 통해 베트남을 식민화하기 위한 초석을 놓는다.
1885년에 암살자가 쏜 총알을 비껴맞지만, 그 후유증으로 불구가 되었고, 1893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1870년에 국방부에서 일하고, 같은 해 말에는 파리 시장으로 임명된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파리가 포위됐을 때는 물자공급을 맡았는데, 식량을 인색하게 배급한 탓에 "기아 페리"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파리 코뮌을 강력하게 진압하는 것을 주장했지만, 그의 신변을 걱정한 아돌프 티에르는 그를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레옹 강베타와 쥘 그레비와 함께 파트리스 드마크마옹의 왕당파 정권에 저항하는 공화파를 이끈다. 1877년 5월 16일 헌정위기 때 마크마옹이 공화주의자 쥘 시몽을 해임하자, 의회 과반을 차지한 공화파와 함께 정부를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의회를 해산당한다. 결국 1879년 왕당파를 상대로 완전한 승리를 거두고 쥘 페리는 대통령 쥘 그레비에 의해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된다.
장관이 된 즉시부터 천주교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소교구의 사제가 교육을 담당하는게 흔한 편이었는데, 페리는 허가받지 않은 종교 교육을 금지하려 하지만, 보수파의 완강한 저항을 우려한 쥘 그레비가 불인가한다. 1879년에는 세브르 여자고등사범학교[3]를 설립하고, 1880년에 여성 교육법을 통과시키고, 1881년에는 집회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1882년에 긴 법적 사투 끝에 무상, 의무적, 세속적 교육을 보장하는 법안을 인가한다. 반교권주의의 교육 정책을 실시해 가톨릭 교회의 세력 약화에 혁혁한 공을 세울 수 있었다.
쥘 페리는 프랑스 식민주의의 얼굴마담이기도 했다. 1885년 7월 28일 페리의 연설이 그의 식민주의에 대한 사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는 "우월한 인종"이 "열등한 인종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믿었다. 식민주의에 격렬하게 반대했고, 유교, 힌두교 등의 유구함을 언급하며 유럽의 우월성을 의문시했던 조르주 클레망소와 대조된다. 페리가 이끄는 식민파들은 1881년에 튀니지를 보호령으로 삼는 바르도 조약을 맺었고, 청불전쟁을 통해 베트남을 식민화하기 위한 초석을 놓는다.
1885년에 암살자가 쏜 총알을 비껴맞지만, 그 후유증으로 불구가 되었고, 1893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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