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재정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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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기획재정부장관 大韓民國 企劃財政部長官 The Minister of Economy and Finance of the Republic of Korea | |
현직 | 최상목 / 제7대 |
취임일 | |
정당 |
정부조직법상 경제부총리를 겸임하며 기획재정부가 행정각부 서열 1순위이기 때문에, 기획재정부장관 또한 의전서열에서 각부 장관들 중 서열 1순위이다.[1] 또한 장관급이 아닌 부총리급이기 때문에 대통령, 국무총리에 이은 행정부 내 의전서열 3위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국무총리 궐위 및 유고 시에 국무총리 권한대행을 맡게 되며 만약 대통령과 총리가 동시에 궐위 혹은 유고상태가 된다면 경제부총리가 대통령의 권한을 대신하여 국정을 통할하게 된다.
또한 기획재정부의 주요 업무가 우리나라의 모든 경제 정책을 총괄함과 더불어 각 부처 및 모든 공공기관의 예산 편성을 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힘 역시 어마어마한 자리이다. 물론 대한민국 헌법 상 입법기관인 국회가 예산안을 승인해야만 예산을 집행할 수 있지만 예산안을 심사하는 국회의원, 특히 기획재정위원회나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은 기재부 관료들과 얽혀있는 경우가 많고 국회의원 역시 자기 지역구의 예산 확충을 위해서는 기재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다.[2] 여러모로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행정안전부장관[3]과 더불어 지방자치단체장 및 국회의원들이 두려워하는 존재 중 하나이다.[4]
다만 위상이 높고 권한이 큰 만큼 책임 역시 큰 자리라서 욕먹고 갈려나가는 일도 잦은 자리이다. 특히 기재부가 다루는 업무나 정책들이 국민 개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보니 까딱 잘못하면 민생파탄의 주범으로 몰리기 십상인 자리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국무총리와 더불어 TV에 나와 사과하기 바쁜 방탄으로 전락하는 일도 많으며 실제로 IMF 극복이라는 공을 세웠던 이헌재, 이규성 전 경제부총리를 제외하면 대부분 존재감이 없거나 안좋은 평을 받는다.[5] 이 때문에 정계에서도 국무총리와 함께 사실상 독이 든 성배 취급을 받는다.[6]
또한 기획재정부의 주요 업무가 우리나라의 모든 경제 정책을 총괄함과 더불어 각 부처 및 모든 공공기관의 예산 편성을 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힘 역시 어마어마한 자리이다. 물론 대한민국 헌법 상 입법기관인 국회가 예산안을 승인해야만 예산을 집행할 수 있지만 예산안을 심사하는 국회의원, 특히 기획재정위원회나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소속 국회의원들은 기재부 관료들과 얽혀있는 경우가 많고 국회의원 역시 자기 지역구의 예산 확충을 위해서는 기재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다.[2] 여러모로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행정안전부장관[3]과 더불어 지방자치단체장 및 국회의원들이 두려워하는 존재 중 하나이다.[4]
다만 위상이 높고 권한이 큰 만큼 책임 역시 큰 자리라서 욕먹고 갈려나가는 일도 잦은 자리이다. 특히 기재부가 다루는 업무나 정책들이 국민 개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보니 까딱 잘못하면 민생파탄의 주범으로 몰리기 십상인 자리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국무총리와 더불어 TV에 나와 사과하기 바쁜 방탄으로 전락하는 일도 많으며 실제로 IMF 극복이라는 공을 세웠던 이헌재, 이규성 전 경제부총리를 제외하면 대부분 존재감이 없거나 안좋은 평을 받는다.[5] 이 때문에 정계에서도 국무총리와 함께 사실상 독이 든 성배 취급을 받는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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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무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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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무부 | 경제기획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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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경제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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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경제부[7] | 예산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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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예산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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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재정부 |
정부 | 대수 | 이름 | 임기 |
초대 | 김도연(金度演) | 1948년 8월 2일 ~ 1950년 4월 22일 | |
2대 | 최순주(崔淳周) | 1950년 4월 25일 ~ 1951년 3월 5일 | |
3대 | 백두진(白斗鎭) | 1951년 3월 5일 ~ 1953년 9월 9일 | |
4대 | 박희현(朴熙賢) | 1953년 9월 9일 ~ 1954년 6월 30일 | |
5대 | 이중재(李重宰) | 1954년 6월 30일 ~ 1955년 7월 11일 | |
6대 | 김현철(金顯哲) | 1955년 7월 11일 ~ 1956년 5월 26일 | |
7대 | 인태식(印泰植) | 1956년 5월 26일 ~ 1957년 6월 9일 | |
8대 | 김현철(金顯哲) | 1957년 6월 9일 ~ 1959년 3월 20일 | |
9대 | 송인상(宋仁相) | 1959년 3월 20일 ~ 1960년 4월 28일 | |
10대 | 윤호병(尹皡炳) | 1960년 4월 28일 ~ 1960년 8월 19일 | |
11대 | 김영선(金永善) | 1960년 8월 23일 ~ 1961년 5월 18일 | |
12대 | 백선진(白善鎭) | 1961년 5월 20일 ~ 1961년 6월 22일 | |
13대 | 김유택(金裕澤) | 1961년 6월 22일 ~ 1961년 7월 22일 | |
14대 | 천병규(千炳圭) | 1961년 7월 22일 ~ 1962년 6월 16일 | |
15대 | 김세련(金世鍊) | 1962년 6월 18일 ~ 1963년 2월 08일 | |
16대 | 황종률(黃鍾律) | 1963년 2월 08일 ~ 1963년 12월 16일 | |
17대 | 박동규(朴東奎) | 1963년 12월 17일 ~ 1964년 6월 26일 | |
18대 | 이정환(李廷煥) | 1964년 6월 26일 ~ 1964년 12월 5일 | |
19대 | 홍승희(洪升熹) | 1964년 12월 5일 ~ 1965년 11월 16일 | |
20대 | 김정렴(金正濂) | 1966년 1월 25일 ~ 1966년 9월 26일 | |
21대 | 김학렬(金鶴烈) | 1966년 9월 26일 ~ 1966년 12월 27일 | |
22대 | 서봉균(徐奉均) | 1966년 12월 27일 ~ 1968년 5월 21일 | |
23대 | 황종률(黃鍾律) | 1968년 5월 21일 ~ 1969년 10월 21일 | |
24대 | 남덕우(南德祐) | 1969년 10월 21일 ~ 1974년 9월 18일 | |
25대 | 김용환(金龍渙) | 1974년 9월 18일 ~ 1978년 12월 22일 | |
26대 | 김원기(金元基) | 1978년 12월 22일 ~ 1980년 5월 22일 | |
27대 | 이승윤(李承潤) | 1980년 5월 22일 ~ 1982년 1월 4일 | |
28대 | 나웅배(羅雄培) | 1982년 1월 4일 ~ 1982년 6월 24일 | |
29대 | 강경식(姜慶植) | 1982년 6월 24일 ~ 1983년 10월 15일 | |
30대 | 김만제(金滿堤) | 1983년 10월 15일 ~ 1986년 1월 08일 | |
31대 | 정인용(鄭寅用) | 1986년 1월 08일 ~ 1987년 5월 26일 | |
32대 | 사공일(司空壹) | 1987년 5월 26일 ~ 1988년 12월 4일 | |
33대 | 이규성(李揆成) | 1988년 12월 5일 ~ 1990년 3월 18일 | |
34대 | 정영의(鄭永儀) | 1990년 3월 19일 ~ 1991년 5월 26일 | |
35대 | 이용만(李龍萬) | 1991년 5월 27일 ~ 1993년 2월 24일 | |
36대 | 홍재형(洪在馨) | 1993년 2월 25일 ~ 1994년 10월 4일 | |
37대 | 박재윤(朴在潤) | 1994년 10월 5일 ~ 1994년 12월 23일 |
최고회의 시절에는 장관급이면서도 국무위원 신분은 아니라서 그냥 '경제기획원장'으로 불렸다. 박정희 정부가 정식 출범한 7대 김유택 대에야 비로소 정식으로 부총리급 국무위원으로 격상되었기 때문에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이라 불린 것은 7대부터다.
정부 | 대수 | 이름 | 임기 |
초대 | 김유택(金裕澤) | 1961년 7월 22일 ~ 1962년 3월 2일 | |
2대 | 송요찬(宋堯讚) | 1962년 3월 2일 ~ 1962년 6월 18일 | |
3대 | 김현철(金顯哲) | 1962년 6월 18일 ~ 1962년 7월 10일 | |
4대 | 김유택(金裕澤) | 1962년 7월 10일 ~ 1963년 2월 08일 | |
5대 | 유창순(劉彰順) | 1963년 2월 08일 ~ 1963년 4월 12일 | |
6대 | 원용석(元容奭) | 1963년 4월 13일 ~ 1963년 12월 16일 | |
7대 | 김유택(金裕澤) | 1963년 12월 17일 ~ 1964년 5월 11일 | |
8대 | 장기영(張基榮) | 1964년 5월 11일 ~ 1967년 10월 3일 | |
9대 | 박충훈(朴忠勳) | 1967년 10월 3일 ~ 1969년 6월 3일 | |
10대 | 김학렬(金鶴烈) | 1969년 6월 3일 ~ 1972년 1월 4일 | |
11대 | 태완선(太完善) | 1972년 1월 4일 ~ 1974년 9월 18일 | |
12대 | 남덕우(南德祐) | 1974년 9월 18일 ~ 1978년 12월 22일 | |
13대 | 신현확(申鉉確) | 1978년 12월 22일 ~ 1979년 12월 13일 | |
14대 | 이한빈(李漢彬) | 1979년 12월 13일 ~ 1980년 5월 22일 | |
15대 | 김원기(金元基) | 1980년 5월 22일 ~ 1980년 9월 2일 | |
16대 | 신병현(申秉鉉) | 1980년 9월 2일 ~ 1982년 1월 4일 | |
17대 | 김준성(金埈成) | 1982년 1월 4일 ~ 1983년 7월 7일 | |
18대 | 서석준(徐錫俊) | 1983년 7월 7일 ~ 1983년 10월 9일 | |
19대 | 신병현(申秉鉉) | 1983년 10월 15일 ~ 1986년 1월 08일 | |
20대 | 김만제(金滿堤) | 1986년 1월 08일 ~ 1987년 5월 26일 | |
21대 | 정인용(鄭寅用) | 1987년 5월 26일 ~ 1988년 2월 24일 | |
22대 | 나웅배(羅雄培) | 1988년 2월 25일 ~ 1988년 12월 5일 | |
23대 | 조순(趙淳) | 1988년 12월 5일 ~ 1990년 3월 17일 | |
24대 | 이승윤(李承潤) | 1990년 3월 17일 ~ 1991년 2월 18일 | |
25대 | 최각규(崔珏圭) | 1991년 2월 18일 ~ 1993년 2월 24일 | |
26대 | 이경식(李經植) | 1993년 2월 25일 ~ 1993년 12월 21일 | |
27대 | 정재석(丁渽錫) | 1993년 12월 21일 ~ 1994년 10월 4일 | |
28대 | 홍재형(洪在馨) | 1994년 10월 4일 ~ 1994년 12월 23일 |
정부 | 대수 | 이름 | 임기 |
초대 | 이규성(李揆成) | 1998년 3월 5일 ~ 1999년 5월 24일 | |
2대 | 강봉균(姜奉均) | 1999년 5월 24일 ~ 2000년 1월 14일 | |
3대 | 이헌재(李憲宰) | 2000년 1월 14일 ~ 2000년 8월 7일 | |
진념(陳念) | 2000년 8월 7일 ~ 2002년 4월 15일 | ||
2대 | 전윤철(田允喆) | 2002년 4월 15일 ~ 2003년 2월 27일 | |
3대 | 김진표(金晉杓) | 2003년 2월 27일 ~ 2004년 2월 10일 | |
4대 | 이헌재(李憲宰) | 2004년 2월 10일 ~ 2005년 3월 7일 | |
5대 | 한덕수(韓德洙) | 2005년 3월 14일 ~ 2006년 7월 18일 | |
6대 | 권오규(權五奎) | 2006년 7월 18일 ~ 2008년 2월 29일 |
정부 | 대수 | 이름 | 임기 |
초대 | 강만수(姜萬洙) | 2008년 2월 29일 ~ 2009년 2월 9일 | |
2대 | 윤증현(尹增鉉) | 2009년 2월 10일 ~ 2011년 6월 1일 | |
3대 | 박재완(朴宰完) | 2011년 6월 2일 ~ 2013년 3월 22일 | |
초대 | 현오석(玄旿錫) | 2013년 3월 22일 ~ 2014년 7월 14일 | |
2대 | 최경환(崔炅煥) | 2014년 7월 15일 ~ 2016년 1월 12일 | |
3대 | 유일호(柳一鎬) | 2016년 1월 13일 ~ 2017년 6월 08일 | |
4대 | 김동연(金東兗) | 2017년 6월 9일 ~ 2018년 12월 10일 | |
5대 | 홍남기(洪楠基) | 2018년 12월 11일 ~ 2022년 5월 10일 | |
6대 | 추경호(秋慶鎬) | 2022년 5월 10일 ~ 2023년 12월 29일 | |
7대 | 최상목(崔相穆) | 2023년 12월 29일 ~ 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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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열 2위는 사회부총리를 겸하는 교육부장관이다.[2] 국회에서 연말만 되면 매번 치고박고 싸워대지만 결국엔 원안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고 통과되는 이유도 바로 예산안 통과가 늦어지면 국회의원 개개인의 지역구 사업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다.[3] 여기는 광역 및 기초자치단체의 부단체장 인사권과 더불어 지방자치단체의 예산편성, 그리고 산하 외청인 경찰청을 통한 수사권까지 가지고 있어 검찰 인사권 및 수사지휘권을 가진 법무부장관과 더불어 실세로 꼽히는 자리이다.[4] 심지어 행안부나 법무부의 예산 편성도 경제부총리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실권만큼은 행정부 내에서 사실상 원탑인 셈이다.[5] 특히 박근혜 정부 이후에는 대체적으로 경기가 안좋아지면서 이런 경향이 더더욱 심해졌다.[6] 다행인 점은 그나마 학부모들로부터 융단폭격을 맞고 갈려나가기 십상인 교육부장관보다는 취급이 훨씬 낫다.[7] 1998년 2월부터 1999년 5월까지 무려 5개의 외청(예산청, 국세청, 관세청, 조달청, 통계청)을 두기도 했는데, 정부 수립 이후 현재까지 5개 외청을 둔 경우는 이 사례 외에는 전무하다. 당시에는 복수차관제(2005년 도입)가 없던 시기였음까지 감안하면 재정경제부의 위엄을 알 수 있다. 다만, 당시에는 통계청장이 차관급이 아닌 1급이었고, 예산청 외에도 장관급 위원장이 지휘하는 대통령 직속의 기획예산위원회라는 기관이 따로 있었다.[8] 기획예산처와 합병하여 당시 기획예산처 초대장관이던 진념장관이 재정경제부 장관직을 승계하여 제4대 장관이 되고 당시 재정경제부 장관이던 이헌재장관은 물러남.[9] 제4대 장관 임기도중 2001.1.29.부로 부총리로 승격.[10] 1998년 3월 김대중 정부 출범시부터 초대 대통령직속 기획예산위원회 위원장으로 임기수행도중 재정경제부 산하의 예산청과 합병되어 합병일부터 다시 초대 기획예산처 장관이 됨[11] 이명박 정부 출범하면서 기획예산처와 합병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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