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남대총 남분 금제 허리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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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띠 길이 99cm, 장신구 길이 18cm~79cm.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금제 허리띠로, 제작 연대는 대략 4세기 후반~5세기 초반(서기 300~400년대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같은 시기에 제작되어 황남대총에 함께 묻힌 황남대총 북분 금관,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 황남대총 북분 금팔찌 및 금반지, 황남대총 북분 유리잔, 황남대총 북분 은제 관식, 황남대총 북분 금제 고배, 황남대총 북분 은잔, 황남대총 북분 금은제 그릇 일괄, 황남대총 남분 금제 관식, 황남대총 남분 은관, 황남대총 남분 은제 팔뚝가리개 등 7만여점에 이르는 유물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이 황금 허리띠는 발굴 당시 시신의 앞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 형태는 크게 순황금으로 금형을 뜬 34매의 띠꾸미개와 7개의 요패로 구성되어 있었다. 허리띠 띠드리개에는 금으로 만들어진 골무를 씌운 청색 곡옥이 3개, 족집게형 장식 1개, 물고기형 장식 1개가 장식되어 있었는데, 대형 띠드리개의 경우 시신의 왼쪽에 달려서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가 오른쪽에 달린 것과는 위치가 정반대였다. 이는 곧 당시 남녀에 따라 허리띠의 패용방식이 다르다는 점을 말해 준다.
전체적으로 볼 때 북분에서 발견된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보단 화려함이 덜하지만, 이 역시 신라시대 금세공기술 및 금속공예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1978년 12월 7일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었다.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신라시대 금제 허리띠로, 제작 연대는 대략 4세기 후반~5세기 초반(서기 300~400년대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같은 시기에 제작되어 황남대총에 함께 묻힌 황남대총 북분 금관,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 황남대총 남분 금목걸이, 황남대총 북분 금팔찌 및 금반지, 황남대총 북분 유리잔, 황남대총 북분 은제 관식, 황남대총 북분 금제 고배, 황남대총 북분 은잔, 황남대총 북분 금은제 그릇 일괄, 황남대총 남분 금제 관식, 황남대총 남분 은관, 황남대총 남분 은제 팔뚝가리개 등 7만여점에 이르는 유물들과 함께 발견되었다.
이 황금 허리띠는 발굴 당시 시신의 앞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 형태는 크게 순황금으로 금형을 뜬 34매의 띠꾸미개와 7개의 요패로 구성되어 있었다. 허리띠 띠드리개에는 금으로 만들어진 골무를 씌운 청색 곡옥이 3개, 족집게형 장식 1개, 물고기형 장식 1개가 장식되어 있었는데, 대형 띠드리개의 경우 시신의 왼쪽에 달려서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가 오른쪽에 달린 것과는 위치가 정반대였다. 이는 곧 당시 남녀에 따라 허리띠의 패용방식이 다르다는 점을 말해 준다.
전체적으로 볼 때 북분에서 발견된 황남대총 북분 금제 허리띠보단 화려함이 덜하지만, 이 역시 신라시대 금세공기술 및 금속공예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진다.
1978년 12월 7일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었다.
황남대총 남분 금제 허리띠(皇南大塚南墳 金製銙帶)는 경주시 황남동 미추왕릉 지구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 무덤인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허리띠(과대)와 띠드리개(요패)이다. 황남대총은 2개의 봉분이 남·북으로 표주박 모양으로 붙어 있다.
허리띠 길이는 99㎝이며, 소형 띠드리개 길이 18∼22㎝, 대형 띠드리개 길이 79.5㎝의 크기이다. 이 허리띠는 문양이 뚫린 사각형의 판과 나뭇잎 장식 34매를 연결하였다. 나뭇잎 장식 아래에는 7줄의 띠드리개가 있는데, 1줄은 길고 6줄은 짧다.
이 허리띠의 좌우 끝에는 서로 연결할 수 있는 띠고리(교구)가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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