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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스페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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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경2. 전개
2.1. 1648년 이전2.2. 1648년 이후2.3. 전쟁의 끝
3. 영향4. 여담

1. 배경[편집]

프랑스와 스페인, 신성 로마 제국을 통치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대립은 16세기부터 첨예하게 이어져왔다.

영토 확장을 원하던 프랑스는 국경 지역의 신성 로마 제국 제후국들에 대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이 약화되길 기도했고, 마침 독일에서 30년 전쟁이 발발했다. 30년 전쟁 초기부터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제국과 맞서싸우는 개신교도들에게 지원금을 제공해주었으나, 1634년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스웨덴이 패배하자 전세는 급속도로 합스부르크 제국 쪽으로 기울었다. 이에 동맹국을 찾던 스웨덴과 신성 로마 제국의 약화를 원하던 프랑스의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졌고, 1635년 5월 프랑스는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하며 30년 전쟁에 뛰어들었다.

2. 전개[편집]

2.1. 1648년 이전[편집]

1635년 5월 프랑스군은 레아빈스에서 스페인령 네덜란드에 있던 소규모의 스페인군을 격파하였고, 이에 수적으로 열세였던 스페인군은 루벤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프랑스군 내의 탈영병으로 프랑스군이 크게 감소했고, 네덜란드가 더 이상의 군사 행동을 반대하면서 더 이상의 진격은 멈추었다. 다만 네덜란드는 해군을 이용해 스페인의 무역을 봉쇄하는 것을 중점으로 두었다.
한편, 1636년 스페인군은 프랑스 북부 코르비에 상륙하였고, 이에 프랑스는 크게 당황하여 잠시동안 파리가 공황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코르비에 상륙한 스페인군은 보급품이 부족했고, 결국 스페인군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군은 1635년부터 1639년까지 라인란트에서 일련의 승리들을 거두었고, 라인강 일대의 상당한 도시들이 프랑스의 손에 들어왔다. 이로 인해 스페인군의 도로가 차단되면서 스페인은 네덜란드 해군이 장악하고 있던 플랑드르 앞바다로 군대를 보내야만 했다. 또한 프랑스군은 스페인의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영토에도 공격을 가하였다.

스페인에서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와 세금 증가로 인해 1630년대부터 시위가 발생했고, 1640년에는 포르투갈과 카탈루냐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으며, 1641년, 카탈루냐 법원은 루이 13세를 카탈루냐 공작으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1643년 로크루아 전투에서 스페인군은 대패했고, 1648년 렌스 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스페인군을 수차례 격파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서 완전히 몰아낼 수는 없었다.
이탈리아에서는 피에몬테 내전(1639 ~ 1642)으로 인한 북이탈리아의 혼란과 물자 부족으로 인해 전투가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스페인군은 1647년에 나폴리를 탈환하며 남이탈리아를 확고히 장악하였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황제 페르디난트 3세를 포함한 주요국들이 평화 협정을 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평화 협정 조건의 개선을 원하던 스페인의 펠리페 4세로 인해 프랑스와 스페인의 전쟁은 계속되었다.

2.2. 1648년 이후[편집]

1640년대에 이르러 오랜 전쟁으로 조금씩 소진되던 스페인의 재정은 완전히 고갈되었고, 스페인의 펠리페 4세는 1647년 파산하기에 이르렀다. 플랑드르의 많은 영토가 이미 프랑스에게 넘어갔고, 로크루아 전투의 패전으로 스페인의 정예병 대부분이 사라지면서 스페인의 상황은 악화일로를 달려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네덜란드와의 전쟁이 끝나면서 상황은 빠르게 호전되었는데,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재정 상태가 영 좋지 못하던 프랑스에서 내전이 일어난 것이다. 이를 틈타 스페인은 저지대에서 상당한 이익을 취하는데 성공했고, 전쟁은 더욱 더 장기화된다. 1650년 카탈루냐 반군과 프랑스군이 바르셀로나를 점령했으나, 1652년 스페인군이 다시금 바르셀로나를 탈환했고, 전투가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1653년까지 전선은 피레네 산맥에서 안정화되었다.

1653년부터 프랑스는 당시 스페인의 영토였던 밀라노를 점령하는데 중점을 두었으나, 당시 프랑스의 영향권에 놓여있던 사보이아 공국과 포르투갈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아무런 성과도 올리지 못했다. 1654년부터 1656년까지 프랑스군이 저지대에서 거둔 일련의 승리들은 북이탈리아에서의 스페인군의 성공으로 상쇄되었고, 스페인과 프랑스 양측 모두 서로를 완전히 굴복시킬 힘을 보유하지 못했다.

2.3. 전쟁의 끝[편집]

한편, 1660년대 이전까지 프랑스는 자체적인 해군력이 부족했고, 1648년 이후부턴 네덜란드 해군에게 의존할수도 없었기에 프랑스는 새로운 해군이 강한 동맹국을 모색했고, 마침 1654년부터 스페인과 잉글랜드 간의 분쟁이 벌어지고 있었기에 프랑스는 1657년에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었다. 1658년에 플랑드르에서 영국-프랑스 연합군은 대규모 공세를 펼쳤는데, 공세의 목표는 당시 영국 선박을 공격하는 스페인 민간인들의 중심지였던 덩케르크였다. 결국 1658년 6월에 덩케르크가 함락되자 경제가 파탄날 지경이였던 스페인은 휴전을 요청했다.

프랑스는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1658년 9월 크롬웰이 죽자 영국이 정치적 혼란에 빠지고, 프랑스의 우방국이였던 사보이아 공국이 스페인과의 휴전에 합의하면서 북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을 종결시켰다. 결국 1659년부터 프랑스와 스페인은 협상을 시작했고, 1659년에 피레네 조약이 체결되며 전쟁은 공식적으로 끝났다.

3. 영향[편집]

프랑스 - 스페인 전쟁으로 카를 5세 이후로 한 세기 동안 계속되던 스페인의 헤게모니는 완전히 붕괴하였고, 스페인은 이후 스페인 왕위계승전쟁까지 내리막길을 걸어야만 했다.
반면 프랑스는 카탈루냐 북부와 덩케르크 등을 획득하고 최대의 경쟁자였던 스페인 제국을 몰락시켜 국경을 안정화시키고 유럽의 패권국으로 군림하였다.

또한 프랑스 - 스페인 전쟁을 종결시킨 피레네 조약베스트팔렌 조약과 함께 근세 유럽사에서 매우 중요한 조약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4. 여담[편집]

당시 스페인의 지도자인 펠리페 4세는 프랑스 왕 루이 13세의 처남이었다. 안 도트리슈 왕비가 펠리페 4세의 누나였기 때문. 물론 국가간 정략결혼인 해당 결혼은 오래 전인 1615년에 일어난 일이라 별 상관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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