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코트디부아르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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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코트디부아르 내전 Crise ivoirienne de 2010-2011 | ||
코트디부아르 내전의 일부 | ||
기간 | ||
장소 | ||
원인 | ||
로랑 그바그보와 알라산 와타라의 대립 | ||
교전국 및 교전세력 | ||
지휘관 | ||
결과 | ||
반그바그보파 승리 |
코트디부아르는 1999년 쿠데타로 앙리 코낭 베디에가 축출되고 로베르 게이가 군사정권의 수반이 되었지만 2000년 코트디부아르 대통령 선거에서 로랑 그바그보가 승리하자 로베르 게이는 선거결과에 불복했고 로베르 게이의 봉기는 첫 번째 내전으로 이어졌다. 내전은 정부군이 장악한 남부와 반군이 장악한 북부의 대립으로 전개되었으며 2007년 평화 협정을 체결하면서 내전이 종식되었지만 남부와 북부의 대립은 여전했다.
대통령으로 취임한 로랑 그바그보는 2005년에 이미 공식적으로 임기가 종료되었지만 정국의 불안과 준비 부족 등을 이유로 대통령 선거를 계속 연기했지만 국내외의 계속된 압박으로 인해 결국 차기 대통령 선거일을 10월 31일로 잡았다.
10월 31일에 실시된 1차 투표에서는 로랑 그바그보와 알라산 와타라가 각각 1, 2위로 결선 투표에 진출했다. 문제는 11월 28일에 실시된 결선 투표에서 시작되었다. 12월 2일 코트디부아르 선거관리위원회가 잠정 집계한 득표율은 알라산 와타라 54.1%, 로랑 그바그보 45.9%였지만 12월 3일 코트디부아르 헌법위원회는 로랑 그바그보의 승리를 발표했고 선거관리위원회는 알라산 와타라의 승리를 발표했다. 그바그보의 지지자들은 선거 결과에 불복했고 코트디부아르는 12월 4일 두 명의 대통령이 각각 취임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대통령으로 취임한 로랑 그바그보는 2005년에 이미 공식적으로 임기가 종료되었지만 정국의 불안과 준비 부족 등을 이유로 대통령 선거를 계속 연기했지만 국내외의 계속된 압박으로 인해 결국 차기 대통령 선거일을 10월 31일로 잡았다.
10월 31일에 실시된 1차 투표에서는 로랑 그바그보와 알라산 와타라가 각각 1, 2위로 결선 투표에 진출했다. 문제는 11월 28일에 실시된 결선 투표에서 시작되었다. 12월 2일 코트디부아르 선거관리위원회가 잠정 집계한 득표율은 알라산 와타라 54.1%, 로랑 그바그보 45.9%였지만 12월 3일 코트디부아르 헌법위원회는 로랑 그바그보의 승리를 발표했고 선거관리위원회는 알라산 와타라의 승리를 발표했다. 그바그보의 지지자들은 선거 결과에 불복했고 코트디부아르는 12월 4일 두 명의 대통령이 각각 취임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유엔은 알라산 와타라의 승리를 인정하고 최영진 특사를 파견하여 그바그보에게 선거 결과에 승복할 것을 요구했으나 그바그보는 여전히 선거 결과에 불복하며 자신의 퇴진을 거부했다. 코트디부아르에서는 유혈 사태가 벌어졌고 양측의 대립은 4월 28일까지 이어졌다. 전황이 그바그보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바그보는 협상을 제시했다가 철회하고 도주했다. 알라산 와타라는 그바그보를 체포하기로 했고 결국 4월 28일 그바그보는 체포되었다.
로랑 그바그보는 사로잡혀 전범으로 넘겨졌으며 알라산 와타라는 2015년과 2020년 재선에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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