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계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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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동궁 초대 궁주 | |||||||||||||||||||||
조선 장조의 손자 | 조선 철종의 생부 전계대원군 | 全溪大院君 | |||||||||||||||||||||
전계대원군묘 전경 | |||||||||||||||||||||
출생 | |||||||||||||||||||||
사망 | |||||||||||||||||||||
능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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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왕족.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은언군의 서6남으로, 조선 25대 임금 철종의 친아버지이다. 휘는 이광(李㼅)이며, 초명은 이쾌득(李快得)과 이해동(李海東), 자는 창강(昌康)이다.
은언군과 그의 첩인 이덕희의 딸 전산군부인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전산군부인 소생 첫 아들은 요절했고 둘째 아들이 전계대원군이다.[4] 조선시대에는 동성동본 간 결혼이 금기시되었는데, 아버지 은언군은 같은 전주 이씨를 첩으로 들였다.
1819년 6월 4일 그의 생모 전산군부인 이씨가 강화도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승정원일기에 보면 1819년 6월 5일[5]과 6월 7일[6]에 쾌득 생모가 죽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로서 쾌득이 전계대원군의 30대 중반까지 쓰던 이름이란 게 밝혀진 셈. 이쯤되면 초명이라 보기도 힘들다.
1779년 아버지 은언군과 큰형 상계군이 홍국영과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아 강화 교동도로 귀양갈 때 이광도 같이 유배되었다. 하지만 정조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왕족으로 기본적인 품위는 유지하며 살 수 있었다. 1801년 정조 사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아버지는 죽고 자신은 30년 넘게 강화도에서 빈농(貧農)으로 지내야 했다.
그래도 강화도에 있는 동안 본처 외에 첩을 2명이나 두고 차남 이욱을 둘 정도였으면 그렇게 빈곤한 삶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1827년 초부터 경제적 상황이 급격하게 좋아진다. 그의 장남이 1827년 9월생, 차남이 1828년 7월생인 것만 봐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1830년 효명세자가 요절하면서 후계자가 없어 다급해진 사촌동생 순조에 의해 방면되어 두 아들 이원경(4세)과 이욱(3세)과 함께 한성부 향교동(鄕校洞) 경행방(慶幸坊)에 다시 정착해서 1831년에는 3남 이원범을 얻고, 자식들을 키우다 1841년 사망했다. 사후 전계대원군의 신도비문을 조두순이 지었다.
은언군과 그의 첩인 이덕희의 딸 전산군부인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전산군부인 소생 첫 아들은 요절했고 둘째 아들이 전계대원군이다.[4] 조선시대에는 동성동본 간 결혼이 금기시되었는데, 아버지 은언군은 같은 전주 이씨를 첩으로 들였다.
1819년 6월 4일 그의 생모 전산군부인 이씨가 강화도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승정원일기에 보면 1819년 6월 5일[5]과 6월 7일[6]에 쾌득 생모가 죽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로서 쾌득이 전계대원군의 30대 중반까지 쓰던 이름이란 게 밝혀진 셈. 이쯤되면 초명이라 보기도 힘들다.
1779년 아버지 은언군과 큰형 상계군이 홍국영과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아 강화 교동도로 귀양갈 때 이광도 같이 유배되었다. 하지만 정조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왕족으로 기본적인 품위는 유지하며 살 수 있었다. 1801년 정조 사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아버지는 죽고 자신은 30년 넘게 강화도에서 빈농(貧農)으로 지내야 했다.
그래도 강화도에 있는 동안 본처 외에 첩을 2명이나 두고 차남 이욱을 둘 정도였으면 그렇게 빈곤한 삶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1827년 초부터 경제적 상황이 급격하게 좋아진다. 그의 장남이 1827년 9월생, 차남이 1828년 7월생인 것만 봐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1830년 효명세자가 요절하면서 후계자가 없어 다급해진 사촌동생 순조에 의해 방면되어 두 아들 이원경(4세)과 이욱(3세)과 함께 한성부 향교동(鄕校洞) 경행방(慶幸坊)에 다시 정착해서 1831년에는 3남 이원범을 얻고, 자식들을 키우다 1841년 사망했다. 사후 전계대원군의 신도비문을 조두순이 지었다.
사후에는 1844년 중인 민진용이 일으킨 반란에 장남 이원경이 휘말려서 죽고 나머지 아들 이욱과 이원범은 다시 강화도로 유배를 간다. 이후 3남 이원범이 철종이 되자 원래 이광은 은언군의 서자라서 봉군되지 못했는데, 아들인 철종이 생부를 전계군(全溪君)으로 봉한 뒤에[7] 왕의 친부가 받는 '대원군'으로 격상시켜 '전계대원군'이 되었다. 덧붙여 철종을 포함한 철종의 형제들도 철종이 즉위한 후에 봉군되었다.[8]
경기도 포천시 선단동 선단초등학교와 성당 근처에 묘가 있다. 전계대원군은 일단 은언군의 묘가 있던 경기도 양주군 신혈면 진관리(현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이말산 자락[9]에 처음 본부인과 함께 합장되었고, 뒤에 철종 즉위 후 포천으로 이장된 것이다. 현재의 서울 종로구 홍제동인 양주군 홍제원 답동리에 있던 염씨 묘소는 전계대원군과 본처 최씨 묘소 아래에 있다. 근처에 아들 회평군 이명(이원경), 영평군 이경응(이욱), 양증손자 풍선군 이한용 등의 묘소가 전계대원군의 묘소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있다.
경기도 포천시 선단동 선단초등학교와 성당 근처에 묘가 있다. 전계대원군은 일단 은언군의 묘가 있던 경기도 양주군 신혈면 진관리(현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 이말산 자락[9]에 처음 본부인과 함께 합장되었고, 뒤에 철종 즉위 후 포천으로 이장된 것이다. 현재의 서울 종로구 홍제동인 양주군 홍제원 답동리에 있던 염씨 묘소는 전계대원군과 본처 최씨 묘소 아래에 있다. 근처에 아들 회평군 이명(이원경), 영평군 이경응(이욱), 양증손자 풍선군 이한용 등의 묘소가 전계대원군의 묘소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있다.
후손 중 문서가 존재하는 인물은 그 후손을 적지 않고 본인까지만 적었다.
[1] 철종의 생모로, 정실부인이 아닌 측실이었다. 철종 즉위 후 임금의 생모라서 부대부인 작호를 받은 것 뿐이다.[2] 영평군(1828)의 생모.[3]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에는 쾌득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단 철득은 풍계군과 동일인으로 추정되었으나 생년이 철득은 쾌득보다 5년 연상이고, 풍계군은 선원보략에 1783년생이라 하여 서로 다르다.[4] 경기도 통진군 양촌면 마송리 산 13-48(현 경기도 김포시 통진읍 마송리 산 13-48)에 있는 전산군부인 묘비문에 나타나 있다.[5] #[6] #[7] 봉호는 어머니 이씨의 본관 '전주(全州)'에 형제들 봉호의 돌림자인 '계(溪)'를 따서 지었다.[8] 역모에 몰려 죽은 이원경은 '회평군(懷平君)', 이욱은 '영평군(永平君)'으로 봉해졌다.[9] 현 은평메디텍고등학교 뒷산 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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