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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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고종의 황자 완친왕 | 完親王 | |
조선 고종의 왕자 완화군 | 完和君 | |
완화군묘 전경 | |
출생 | |
사망 | |
묘소 | 완화군묘(完和君墓) |
조선 후기로 갈수록, 많은 왕손들이 태어나자마자, 혹은 유아기때 죽거나 젊은 나이에 요절해버려[5] 왕실의 손이 귀해졌고, 후궁 소생의 서자나 그 서손들이 왕위를 잇는 일이 흔했다. 때문에 생모가 미천한 신분이여도 왕의 자식으로만 태어나면, 아들 딸 막론하고 적출 못지않은 존귀한 대접을 받았으며, 그랬기에 아들, 그것도 왕의 장자를 출산했다면, 왕비가 아님에도 왕의 모후를 꿈꿔보는 것이 허황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실제로 신분은 낮았지만, 아들이 세자 책봉을 받거나 왕위에 올랐던 희빈 장씨, 숙빈 최씨, 영빈 이씨, 의빈 성씨 등이 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왕자가 탄생하자[6], ‘영보당’이라는 당호만 가진 승은상궁 소생의 서자임에도 원자 탄생 못지않게 온 조정과 왕실이 기뻐했다. 특히 흥선대원군은 첫 손주인 완화군을 정말로 귀여워하며 육아에 적극 참여했을 정도로 완화군은 사실상 암묵적인 원자 대접을 받았다.[7] 또 완화군은 서출 왕자로선 파격적인 대우로 강학청을 설치해 별도의 교육을 받았다. 강학청은 원자나 왕세자를 위한 교육기관이니 당시 완화군의 왕실 내 입지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3년 후 명성황후가 원자를 낳자 흥선대원군이 자신이 아끼는 완화군을 세자로 삼기 위해 명성황후의 아들을 인삼을 보내 독살했다는 야사까지 생겼다. 정사에는 분명히 항문 기형[8]으로 출생 4일 만에 사망했다고 적혀있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직후인 1874년(고종 11년), 명성황후와 고종 사이의 차남이자 적자인 척이 태어나자, 당시 7살이던 완친왕은 원자의 입지를 위해서였는지 어머니 영보당 이씨와 함께 궁 밖에 나가 살았다.
실로 오랜만에 왕자가 탄생하자[6], ‘영보당’이라는 당호만 가진 승은상궁 소생의 서자임에도 원자 탄생 못지않게 온 조정과 왕실이 기뻐했다. 특히 흥선대원군은 첫 손주인 완화군을 정말로 귀여워하며 육아에 적극 참여했을 정도로 완화군은 사실상 암묵적인 원자 대접을 받았다.[7] 또 완화군은 서출 왕자로선 파격적인 대우로 강학청을 설치해 별도의 교육을 받았다. 강학청은 원자나 왕세자를 위한 교육기관이니 당시 완화군의 왕실 내 입지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다 보니 3년 후 명성황후가 원자를 낳자 흥선대원군이 자신이 아끼는 완화군을 세자로 삼기 위해 명성황후의 아들을 인삼을 보내 독살했다는 야사까지 생겼다. 정사에는 분명히 항문 기형[8]으로 출생 4일 만에 사망했다고 적혀있다.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직후인 1874년(고종 11년), 명성황후와 고종 사이의 차남이자 적자인 척이 태어나자, 당시 7살이던 완친왕은 원자의 입지를 위해서였는지 어머니 영보당 이씨와 함께 궁 밖에 나가 살았다.
- 원자나 왕세자가 아닌 서출 왕자의 신분으로 파격적인 대우를 받아 완화군 한 사람만을 위한 별도의 교육기관 강학청이 관례를 올린 이후 시점인 1876년 부터 사망하기 직전인 1879년까지 유지되었다.[10]
- 유일한 혈육이자 동복 남매로 고종의 서장녀인 왕녀가 있다.[11]
서자이지만 엄연히 고종의 장자이고, 실제 역사에서 어린 나이에 죽었다는 점 때문인지 구한말을 다룬 대체역사물에서는 종종 주인공을 맡아 요절하지 않고 장성하여 조선의 근대화를 이끈다.
- 《역적조련사 : 조선을 바꾸다》 - 문피아 연재, Lucub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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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력 윤4월 10일.[2] 음력 정월 12일.[3] 작호는 조선 왕실 - 대한제국 황실의 본관인 전라북도 전주시의 별호 완산에서 유래했다.[4] 만 2세 이전에 요절한 자녀를 제외하면, 4남 1녀.[5] 그래서 듣보방계 왕족인 고종이 즉위할 수 있었다.[6] 앞서 철종이 1854년, 1858년, 1859년, 1861년, 1862년에 각각 왕자를 낳았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7] 훗날 정비 명성황후가 적자인 순종을 낳은 것은 6년 뒤의 일이었다. 사실 순종 위로 원자 하나가 더 있었는데, 항문폐쇄증으로 태어난 지 5일을 넘기지 못한 채 사망했다고 한다. 뒤이어 태어난 둘째아이는 왕자가 아닌 공주였으며, 역시 첫 돌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기 때문에 당시 정세는 여러모로 완화군 모자에게 유리한 상황이였다.[8] 선천적으로 항문이 없었는데, 묘안 증후군인 듯하다. KBS 드라마 《명성황후》에서도 이를 정확히 고증했다.[9] 명성황후 입장에선 이미 자신이 낳은 아들인 이척이 세자가 된 상황에서 나이는 많지만 서출이라 계승 서열이 밀리는 완화군을 굳이 먼저 죽일 이유는 없다.[10] 이 시기 왕실의 사정을 살펴보면 이미 원자인 뒷날의 순종이 태어나 있었음에도 완화군에 대한 종친부와 왕실의 대우가 남달랐음을 알수 있다[11] 하지만 두 남매 모두 일찍이 요절해 현재 남아있는 후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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