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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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신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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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 No.70 | |
유재신 柳在信|Yoo Jae-Sin | |
출생 | |
국적 | |
학력 | |
신체 | 179cm|78kg |
포지션 | |
투타 | |
프로 입단 | 2006년 2차 7라운드 (전체 56번, 현대) |
소속팀 | |
지도자 | |
병역 | |
주로 대수비, 대주자로 출전했다.
10시즌이 넘는 오랜 선수생활을 하면서도 홈런이 1개에 그치며, 홈런을 제외하더라도 커리어하이 시즌이 있나 싶을 정도의 민망한 타율을 보유하고 있다. 즉 타격면에서는 상당히 부족했던 선수. 거진 빌리 해밀턴급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14년간이나 가늘고 길게 프로생활을 이어갔는데, 이는 뛰어난 주루와 수비 덕이 크다. 빠른 발을 가지고 있어 주로 대주자 스페셜리스트로 활용되었으며, 삼성 라이온즈의 강명구와 함께 2010년대 리그의 대표적인 대주자였다. 다만 강명구보다는 주루센스가 부족해 주루솜씨가 좀 쳐진다는 평가를 듣는데, 그럼에도 강명구보다도 더 오래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주루 원툴이던 강명구와는 달리 수비가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 외야수비가 좋은 편이라 경기 후반 대수비로도 투입할 수 있었고, 대주자로 투입한 후 대수비로 교체없이 바로 수비에 투입한 후 다음 타석에서 교체하면 되기 때문에 대수비요원이 들어갈 엔트리를 한명 아낄 수 있어 백업 선수로서는 굉장히 큰 강점이었다.
본래 내외야 전포지션 수비를 다 보았으나 내야수비는 형편없는 솜씨로 혹평을 들었고, 어깨가 나름 좋은 편으로 외야수비는 뛰어난 편이라 대수비로서는 외야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보통 가장 빨리 노화가 오는 툴이 주루툴이라 대주자들은 20대와 동시에 대주자로서 생명이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수비실력이 발이 상대적으로 느려진 이후에도 유재신을 외야 백업으로서 야구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해 주었다.
비록 야구선수로서 재능은 모자랐지만, 대주자와 대수비라는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궂은 일을 성실하게 맡아서 한 덕분에 가늘고 길게 현역생활을 할 수 있었던 좋은 백업 선수였다. 30대가 넘어서까지 대주자 대수비로 활동했으며 30대에 들어서도 체형이 20대 때와 크게 변하지 않아 마지막까지 주루능력이 크게 줄어들지 않았는데, 그의 성실한 자기관리를 엿볼 수 있는 부분.
아쉬움이라면 의외로 대주자나 백업으로 띄엄띄엄 나와서 루틴을 유지할 수 없던 것을 감안하면 통산 타율이 2할 5푼으로 백업치고는 썩 나쁘지는 않다. 즉 타격 재능이 그렇게까지 없는 편은 아니라 꾸준히 기회를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싶은 선수. 2루수 주전 경쟁에 뛰어들어서 주전을 차지하는 데 실패했으나 어린 나이임에도 너무 일찍 포기하고 빠른 발을 살려 1군에서 대주자로만 쓰며 타격기회를 얼마 안 주다 보니 결국 성장이 멈추고 대주자로만 남은 선수다. 2008년에 2루 수비를 좀 더 잘 해서 그때 수비형 2루수로서 자리잡을 수 있었더라면 운명이 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야구에 만약이란 없지만.[7]
10시즌이 넘는 오랜 선수생활을 하면서도 홈런이 1개에 그치며, 홈런을 제외하더라도 커리어하이 시즌이 있나 싶을 정도의 민망한 타율을 보유하고 있다. 즉 타격면에서는 상당히 부족했던 선수. 거진 빌리 해밀턴급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14년간이나 가늘고 길게 프로생활을 이어갔는데, 이는 뛰어난 주루와 수비 덕이 크다. 빠른 발을 가지고 있어 주로 대주자 스페셜리스트로 활용되었으며, 삼성 라이온즈의 강명구와 함께 2010년대 리그의 대표적인 대주자였다. 다만 강명구보다는 주루센스가 부족해 주루솜씨가 좀 쳐진다는 평가를 듣는데, 그럼에도 강명구보다도 더 오래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 주루 원툴이던 강명구와는 달리 수비가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 외야수비가 좋은 편이라 경기 후반 대수비로도 투입할 수 있었고, 대주자로 투입한 후 대수비로 교체없이 바로 수비에 투입한 후 다음 타석에서 교체하면 되기 때문에 대수비요원이 들어갈 엔트리를 한명 아낄 수 있어 백업 선수로서는 굉장히 큰 강점이었다.
본래 내외야 전포지션 수비를 다 보았으나 내야수비는 형편없는 솜씨로 혹평을 들었고, 어깨가 나름 좋은 편으로 외야수비는 뛰어난 편이라 대수비로서는 외야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보통 가장 빨리 노화가 오는 툴이 주루툴이라 대주자들은 20대와 동시에 대주자로서 생명이 끝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수비실력이 발이 상대적으로 느려진 이후에도 유재신을 외야 백업으로서 야구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게 해 주었다.
비록 야구선수로서 재능은 모자랐지만, 대주자와 대수비라는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궂은 일을 성실하게 맡아서 한 덕분에 가늘고 길게 현역생활을 할 수 있었던 좋은 백업 선수였다. 30대가 넘어서까지 대주자 대수비로 활동했으며 30대에 들어서도 체형이 20대 때와 크게 변하지 않아 마지막까지 주루능력이 크게 줄어들지 않았는데, 그의 성실한 자기관리를 엿볼 수 있는 부분.
아쉬움이라면 의외로 대주자나 백업으로 띄엄띄엄 나와서 루틴을 유지할 수 없던 것을 감안하면 통산 타율이 2할 5푼으로 백업치고는 썩 나쁘지는 않다. 즉 타격 재능이 그렇게까지 없는 편은 아니라 꾸준히 기회를 받았더라면 어땠을까 싶은 선수. 2루수 주전 경쟁에 뛰어들어서 주전을 차지하는 데 실패했으나 어린 나이임에도 너무 일찍 포기하고 빠른 발을 살려 1군에서 대주자로만 쓰며 타격기회를 얼마 안 주다 보니 결국 성장이 멈추고 대주자로만 남은 선수다. 2008년에 2루 수비를 좀 더 잘 해서 그때 수비형 2루수로서 자리잡을 수 있었더라면 운명이 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야구에 만약이란 없지만.[7]
-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 8회초에서 극적인 역전 결승 3점 홈런을 치며 한국시리즈 MVP에 오른 故 유두열 코치가 그의 아버지다. 등번호인 33번은 과거 아버지가 쓰던 번호. 2017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외야수로 투입되어 팀의 우승으로 아버지처럼 우승반지를 획득했다. 부자가 선수로서 모두 우승을 하게 된 두번째 사례.[8]
- 나이에 비해 꽤나 동안이다. 현역 선수 시절에도 얼굴이 꽤 곱상한 편에 속했는데 은퇴 후 코치가 된 현재도 선수 시절 외모와 별 차이 없어 보이는 편이다.
한 때 훈남이었다는 증거
![sTVUGgN](http://i.namu.wiki/i/3r0UABpaLW1Waln9FmvCegnFPkgc6kIo1ED3Zsn2oJNhsM8d0RLMnGfOIBm-ItfeATaqz3GcXAlJbCeFRuSgYtmj_yjDxAIp9wcefX9-g-9xtIPiN6SuGUW8KdoecH_s6oZe9pAQN0OefHeqC_9YRQ.webp)
그리고 그 별명을 본인도 알고 있다
- 발은 빠르지만 2013년 7도루 8도실, 2014년 2도루 2도실을 기록할 정도로 주루센스가 좋은 편은 아니다.[9] 여기에 주루사, 견제사도 상당히 많아서 굳이 지명대주자로 1군에 둬야 하는지 넥센 팬들 사이에서 논란이 많다. 내외야 전포지션을 소화한다지만, 사실 수비포지션이 없다고 할 정도로 수비능력이 떨어지며[10], 그렇다고 타격에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닌데 1군 철밥통이라서 염재신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와 관련해서 유재신이 염경엽 감독의 토템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약점이던 수비는 이후 외야수로 완전히 전향하고서는 오히려 최대 강점이라고 할 정도로 좋은 모습을 보여주는 중이다. 문자 그대로 환골탈태.
- 그러나 2015년 임병욱이 대주자로 나오면 99%의 확률로 견제사를 당하는 경이로움을 보여주면서 재평가가 이루어질듯 하다가, 여전히 견제사로 죽는 모습을 연출하면서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그 대신 7월 27일까지 도루자는 없다. 6번 시도 6번 성공 성공률 100%. 그러나 그 다음날 경기에 도루자를 하나 추가했다.
- 현역 시절 등번호는 아버지 유두열의 등번호이기도 했던 33번.
- 2017년부터 전문 대주자 자리마저 지키지 못하고 2군 붙박이로 밀렸다. 실제로 1군에서 뛴 3경기 중 대주자로는 딱 한 경기 나오고 다른 두 경기는 선발과 대수비로 출전하였다.
- 김광현을 상대로 강한 편이다. 2014 시즌부터 2018 시즌까지 총 6번의 대결동안 5타수 3안타에 2루타 1개, 홈런 1개, 볼넷 1개로 타출장이 0.600/0.677/1.400 이라는 초월적인 수치를 자랑한다. 다만 표본이 작다는 점은 걸리는 부분. 그 6번의 대결동안 김광현의 공에 단 한번의 헛스윙이 없고 파울을 양산해낸 것으로 보아 김광현이 던지는 공을 무지 잘 보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통산 첫 홈런도 문학런이라고 불리는 담장 살짝 넘어가는 수준이었지만 바로 위에 써진 것처럼 김광현을 상대로 친 만루홈런이었다. 애초에 대주자, 대수비로 나서는 경우가 많아 타석 자체가 그렇게 많지 않은 것도 표본이 적은 것의 원인이긴 하다.
- 은퇴 후 코치 1년차던 2021년 12월 5일 결혼식을 올렸다.
[1] 부산고에서 전학.[2] 투수와 포수를 제외한 전 포지션을 본 적이 있다. 원래는 1루를 제외한 내야 유틸리티였지만, 2013년부터 외야수 및 1루수로도 뛰더니 2014년부터는 외야수 비중이 높아졌다. 그래도 2017년까지는 간간이 내야수로도 출전했었다.[3] 통산 중견수 99경기, 좌익수 78경기, 2루수 59경기, 3루수 48경기, 우익수 37경기, 1루수 29경기, 유격수 19경기[4] 33세손 재○ 항렬[가사] 넥센의 유재신 안타~ 워어어어어어어~ x2[6] 원곡의 '하지만 나는 너 좋아, 사랑할 지도 몰라' 부분에 맞춰 부르면 된다. 유재신은 전문 대주자라 타석에 들어서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이 응원가는 1년에 몇 번밖에 들을 수 없는 희귀한 응원가였다.[7] 이 가정에 딱 들어맞는 선수가 한때 한솥밥 먹던 선수이자 유재신에 밀려났던 NC 다이노스 소속 지석훈이 있다. 지석훈도 물방망이 소리를 들었지만 유재신이 주력에 강점이 있었다면, 지석훈은 박진만의 후계자로 불릴 정도로 수비에 강점이 있어서 계속해서 1군에 박아놓고 경험치를 키우다보니 공격력이 뛰어나진 않았지만 준주전 내지 전문 백업롤 정도는 충분히 맡을 선수로 탈바꿈했다. 또한 유틸리티로 뛰면서 쌓인 풍부한 경험 덕에 여전히 뛰어난 수비는 덤.[8] 첫번째는 두산 베어스 소속 박철우-박세혁 부자. 박철우 - 87 해태, 박세혁 - 16 두산 시절 선수로 첫 우승을 경험했다.[9] 참고로 한국프로야구 최고의 대주자인 강명구는 통산 도루111, 도실23 도루성공률 82%를 기록중이다.[10] 내야수 경쟁에서 밀려난 가장 큰 이유가 불안한 수비, 특히 형편없는 송구능력 때문이었다.[11] 이중 이택근은 2009년부터 2011년까지 LG 트윈스에 있었기 때문에 현대가 해체되고 히어로즈로 넘어와 쭉 함께 해온 선수는 오주원뿐이다.[12] 그 염경엽도 1년차에 홈런 2개를 쳤다.[13] 유재신의 커리어 유일한 홈런이다.[14] 다행히 이 홈런공은 찾았는데, KIA 팬 유명 컬렉터가 주운 사람에게 10만원을 주고 구입해서 김선빈을 통해 그 공을 직접 돌려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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