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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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 가산복무 지원금 지급 대상자 끝판왕으로 유명하다. 금오공업고등학교 학생일 때부터 군 가산복무 지원금을 받았으며, 학력고사에 합격하여 금오공과대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군장학생을 신청하였고, 재학 중에도 학생군사교육단에 합격하였기 때문이다. 즉, 금오공고 시절 의무 복무 기간인 3년, 금오공대 재학 중 군 장학생으로 4년, 학군사관 의무 복무기간 2년 4개월을 합치면 9년 4개월인데 이 정도면 육군사관학교의 의무 복무기간인 10년에 맞먹는 수준이다.
- 능력이 출중하고 출신과 관계없이 업무 능력과 사람됨을 가지고 후배 장교들을 대했기 때문에 냉철하다는 오해도 받지만 전역후에도 다양한 출신 후배들이 박장군을 따르고 있다.
- 지휘관 시절에는 교육훈련을 강하게 시키는 것으로도 유명했으며 전투 준비차원에서 부대 환경정리를 중요하게 여겼다. 군수사령관 재임시에는 탄약창의 경계 시스템을 대폭 향상시켰다.
- 용사들에게 쓸데없는 작업을 많이 시키는 지휘관으로도 유명했다. 본인이 잘 다듬어진 나무를 좋아하다보니 나무 깎기만 매일 시켰다는 예비역 병장의 증언이 있다[12].
- 그와 병사 때부터 군 생활을 같이 했던 예비역 중사가 자신이 현역이었을 때 박양동 당시 중대장으로부터 욕설을 들었고 직접 구타를 당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출처.
- 28사단 지휘통제실에 근무했을 당시 매일 새벽 3~4시까지 사병들에게 문서 작성을 지시해서 야근은 일상이였다.
- 대대장 시절부터 부대를 빡세게 굴리는 편이었다. KCTC 훈련을 준비하는 과정이 상당히 빡셌고 결국 승리의 성과를 거두었으며, 당시 병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못해도 이양반은 최소 투스타까지는 달거다라는 이야기들을 했었다고 한다.
- 연대장 시절 상급부대에서 이상한 지침/업무가 내려오면 해당되는 상급부대 실무자에게 직접 전화해서 갈궜다고 한다.
실무자가 무슨 힘이 있나
- 사단장 시절에도 용사와 간부로부터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사단 마크가 새겨진 양말을 제법 뿌리긴 했다 .
- 병사가 무언가를 잘못했는지 군단장이었음에도 직접 호통을 쳐서 질책한 적이 있다. 장군들의 경우 보통 간부를 통해서 조치를 하라고 하는 경향이 많은데 직접 갈군 것이 특징. 그 병사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 6군단장 시절, 6군단 복지회관과 5사단 복지회관을 자주 들렀는데, 당시 복무했던 회관 관리병들로부터 나쁜 평판을 얻었다.
- 6군단장 시절, 28사단 GOP순찰 후 민통선을 나오면서 초소 병사들 한테 너희 몇명이냐 라고 물어본 후 너무 많다면서 밖에 있던 용사들 한테만 양말을 주고 그대로 향발함
[1] 참고로 금오공대는 당시 육해공군 ROTC가 설치된 유일한 대학이었으며 현재는 현역 장성을 가장 많이 배출한 학군단 중 하나이다. 현재 까지 해당 출신으로 가장 최고 계급은 육군은 박양동 중장, 해군은 박재갑 예)소장(안보지원사 참모장), 공군은 이동원 예)소장(전 방공유도탄사령관)이며 현재는 금오공고RNTC와 금오공대ROTC 연계제도가 금오공고의 공립화로 없어져 금오공대는 육군 ROTC만으로 편성되어 있다.[2] 대대장이 마치 상병처럼 일이병을 갈군다고 이 당시 별명이 박상병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KCTC훈련에서 역대급 성과를 내서 제1야전군사령관 표창을 수상하였다. 요즘은 KCTC훈련 준비 및 시행자체가 많은 노력을 요구하는 만큼, 거진 참모총장, 지작사령관급 표창을 준다.[3] 연대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연대 참모, 사단 참모부의 실무자들이 업무가 미진할 시 갈굼을 자행했다.[4] 계엄령 문건 당시 재임중ㅁㄴㅇㅁㄴㅇㅁㄴㅇㅇㅁㄴㅁㅇㄴ ㅂㅈㄱㄱㅂㅈ ㄱㅈㅂ ㄷㅂㅈ ㄱ ㅂㄱㅈㄱㅈㅂ 이었다. 다행히도 직속상관이었던 구홍모 전 육군참모차장이 反알자회성향이라서 휘말리지 않았다.[5] 전임자 문병호, 후임자 박안수[6] 전임자 김종철, 후임자 정철재[7] 강창구, 김현종, 박정환, 허강수 소장과 함께 중장으로 진급하게 되었다.[8] 취임식 사진1사진2[9] 전임자 김성일, 후임자 강건작[10] 전임 사령관이였던 황대일 중장과 마찬가지로 非군수직능으로서 군수사령관으로 취임하였다.[11] 전임자 황대일, 후임자 엄용진[12] 이는 용사들에게 휴식 시간을 부여하지도 않고 휴가도 주지 않으면서 돼지풀 뽑기만 지속하여 강요한 원홍규(3사 16기) 예) 소장과 다를 게 없다. 원홍규 장군도 평판이 매우 나빴는데, 지휘 능력과 성과 또한 전·후임 지휘관들보다 못했다는 예비역들의 증언이 말해준다.[13] 임관 후배인 육사 50기 출신 이우헌 장군의 경우는 업무상 장군 운전병이나 전속부관이 교육훈련과 본연의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짧은 거리로 차를 운전할 때는 본인이 직접 몰았다. 이 경우는 본인 밑에서 직책을 수행하는 휘하 장병들에 대한 배려심 차원에서 한 것이기 때문에 휘하 장병으로부터 평가가 좋았다.[14] 박양동 장군의 경우는 배려심 따위는 접어치우고 본인 독단으로 한 경우여서 1호차 운전병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15] 실제로 강건작 장군은 28사단장 시절에도 전임자 윤의철 장군이 없앤 포상휴가를 도로 복구시켰다. 해당 포상휴가들은 김승겸 사단장 시절에 만들어졌던 것들이다. 강건작 장군 외에도 육사 40기 출신 구홍모 장군의 사례도 있는데, 구홍모 장군 역시 전임 7사단장 원홍규 장군이 없앤 포상휴가를 도로 복구시켰고 지휘 능력도 좋아서 중장 진급에 성공했다.[16] 허강수 장군 역시 구홍모, 강건작 장군처럼 덕장으로 평가받는 사람이다. 마찬가지로 전임 7군단장이던 윤의철이 없애버린 포상 휴가를 도로 복구했고, 군단장 재임 중 발생했던 중공발 코로나19로 휴가, 외출, 외박을 다녀오지 못한 용사들에게 1박 2일의 외박을 부여하여 좋은 평판을 받았다.[17] 이것에 대한 썰이 있는데, 코로나19 당시 지작사령관 안준석 장군 주재로 회의를 진행했다. 그때 박양동 장군을 위시한 6군단 수뇌부가 격리할 정도로 6군단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고 장병 격리장소가 부족하니 가까운 7군단 시설을 협조하겠다고 했다. 안준석 장군은 7군단에게 괜찮겠냐고 했고, 7군단장 허강수 장군은 어쩔수 없다고 여기면서도 삔또상했는지, 다른 군단장들이 애로/건의사항을 주저리 이야기할때 혼자 무표정으로 X표식만 들었다.[18] 본인의 임관 선배인 원홍규, 윤의철 장군은 본인의 업보에 대한 반성마저도 하지 않았다. 결국 원홍규 장군은 중장 진급에 실패했고, 윤의철 장군 또한 대장으로 진급하지 못했다.[19] 참고로 엄용진 장군 또한 50사단장 시절 평판이 좋아서 중장 진급에 성공할 수 있었다.[20] 해당 인사에서 본인의 임관 동기인 육사 44기 박정환 장군이 대장 진급과 동시에 합동참모차장에서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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