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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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문서: 2008 베이징 올림픽
종목 | |
참가 인원 | 240명 |
참가국 | 8개국 |
기간 | 2008년 8월 13일 ~ 8월 23일 |
경기장 | |
北京五棵松体育中心棒球场 / Wukesong-Baseball field |
베이징 우커쑹 스포츠센터 메인 야구장(15,000석) |
중국에는 프로야구리그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정식 규격의 야구장 건설이 부담스러웠고 베이징시에 위치한 우커숭원화티위중신(五棵松文化体育中心)의 공터에 조립식 야구장을 건설했다. 메인 경기장을 포함해 총 3개의 경기장이 건설 되었으며 이후 중국야구리그의 베이징 타이거즈의 홈구장으로 사용하려 했으나 결승전이 열린 메인 스타디움을 비롯한 모든 야구 경기장은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몇달도 안가 철거되어서 야구팬들에게 아쉬움을 안겨주었다.
한편 우커송 구장의 베이스는 한국야구회관빌딩 지하 1층의 아카이브 센터에서 보관 중이다. 계획대로라면 2019년에 개장할 한국 야구의 전당 및 야구박물관에 전시될 예정.##[2]
한때 한국에선 KBO가 올림픽 금메달의 영광을 함께한 이 구장의 베이스라도 소장하겠다고 중국 당국과 협상했지만 국가재산이라고 하면서 중국측이 완강히 거부해서 결국 불발되었다고 알려져있지만, 실제로는 공식적인 협상을 통해 2009년에 중국국가체육총국으로부터 2루 베이스를 기부받은 것이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건설 지원을 해주었으며, 크기는 센터 122m, 좌우 98m로 고척 스카이돔의 넓이(센터 122m, 좌우 99m)와 거의 같다.
김경문호/2008년 항목 참고.
순위 | 참가국 | 승 | 패 | 승률 | 득점 | 실점 | 비고 |
아메리카 1위 | 6 | 1 | 0.857 | 69 | 32 | 본선 직행 | |
아메리카 2위 | 6 | 1 | 0.857 | 63 | 18 | ||
3위 | 5 | 2 | 0.714 | 38 | 24 | 최종예선 진출 | |
4위 | 4 | 3 | 0.571 | 43 | 38 |
순위 | 참가국 | 승 | 패 | 승률 | 득점 | 실점 | 비고 |
오세아니아 1위 | 0 | 0 | 0.000 | 0 | 0 | 최종예선 진출 |
2007년 9월 7일부터 16일까지 개최되었다.
순위 | 참가국 | 승 | 패 | 승률 | 득점 | 실점 | 비고 |
아프리카 1위 | 5 | 0 | 1.000 | 92 | 3 | 최종예선 진출 |
팀 | 출전자격 | 출전확정일자 | 진출횟수 | 최근 출전 | 종전 최고성적 | WBSC 랭킹 |
개최국 자동진출 | 1회 | 첫 참가 | 첫 참가 | - | ||
IBAF 아메리카 예선 1위 | 4회 | - | ||||
IBAF 아메리카 예선 2위 | 5회 | - | ||||
4회 | 5위[7] | - | ||||
BFA 아시아선수권 우승 | 5회 | - | ||||
IBAF 베이징 올림픽 최종예선 1위 | 2회 | 4위[9] | - | |||
IBAF 베이징 올림픽 최종예선 2위 | 3회 | - | ||||
IBAF 베이징 올림픽 최종예선 3위 | 3회 | - |
2007 아메리카 예선 | 2007 오세아니아 예선 | 2007 유럽선수권 | 2007 아시아선수권 | 2007 아프리카 예선 | 2008 최종 예선 | ||
자세한 내용은 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예선 풀리그 문서 참고하십시오.
순위 | 팀 | 경기 | 승 | 패 | 득점 | 실점 | 승률 | 승차 | 승자승 | 비고 |
1 | 7 | 7 | 0 | 41 | 22 | 1.000 | ― | ― | 4강 진출 | |
2 | 7 | 6 | 1 | 52 | 23 | 0.857 | 1 | ― | ||
3 | 7 | 5 | 2 | 40 | 22 | 0.714 | 2 | ― | ||
4 | 7 | 4 | 3 | 30 | 14 | 0.571 | 3 | ― | ||
5 | 7 | 2 | 5 | 29 | 33 | 0.286 | 5 | 1승 0패 | 예선 탈락 | |
6 | 7 | 2 | 5 | 29 | 20 | 0.286 | 5 | 0승 1패 | ||
7 | 7 | 1 | 6 | 9 | 50 | 0.143 | 6 | 1승 0패 | ||
8 | 7 | 1 | 6 | 14 | 60 | 0.143 | 6 | 0승 1패 |
한국은 전승을 거두면서 결선리그에 진출했다. 매 경기 아슬아슬한 승부와 수비실책으로 인해 야구 팬들의 눈에는 이번 대표팀의 성적을 비관적으로 보는 견해가 많았으나, 의외로 SBS 특별 해설위원으로 위촉된 김성근 감독은 전승에 금메달을 예상했고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자세한 내용은 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결선 토너먼트 문서 참고하십시오.
순위 | 국가 | 경기 | 승 | 패 | 비고 | 최종 성적 |
9 | 9 | 0 | 금메달 | |||
9 | 7 | 2 | 은메달 | |||
9 | 6 | 3 | 동메달 | |||
4 | 9 | 4 | 5 | 4위 | ||
5 | 7 | 2 | 5 | 예선라운드 | ||
6 | 7 | 2 | 5 | 예선라운드 | ||
7 | 7 | 1 | 6 | 예선라운드 | ||
8 | 7 | 1 | 6 | 예선라운드 |
2008 베이징 올림픽 우승 | |
첫번째 우승 | 대한민국 |
"Nine starting players. Nine games. Nine wins. Perfect."
"9명의 선발 선수. 9번의 경기. 9번의 승리. 완벽하다."MLB.com 소속 기자 마크 뉴먼#
불과 1년 전 만해도 선수 선발 과정에서의 잡음과 아시아 예선에서 탈락하며 삿포로 참사 2탄이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다. 그리고 조별 예선에서 중국에게 쩔쩔 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12] 크게 이기던 대만에게 따라잡혀 질뻔 하기도 하는 등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대호, 오승환, 정근우로 대표되는 82라인과 이승엽, 정대현등 국제대회의 강자들, 그리고 김현수, 류현진, 김광현, 이종욱, 윤석민, 강민호[13] 등 리그를 대표하는 신인급 선수들의 맹활약을 펼치며 남자 구기종목 최초의 금메달을 따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대호, 오승환, 정근우로 대표되는 82라인과 이승엽, 정대현등 국제대회의 강자들, 그리고 김현수, 류현진, 김광현, 이종욱, 윤석민, 강민호[13] 등 리그를 대표하는 신인급 선수들의 맹활약을 펼치며 남자 구기종목 최초의 금메달을 따는 데 성공했다.
- 베이징 올림픽 2년 후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다시 한번 금메달을 따면서 우울했던 도하 아시안게임에서의 치욕 또한 저 멀리로 잊혀졌다. 그리고 2009 WBC 준우승과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금메달로 승승장구를 이어갔다. 2013 WBC에서 충격적인 타이중 참사가 있었지만, 그래도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 간신히 금메달을 따 체면치례를 하고 2015 WBSC 프리미어 12에서 일본을 기적적으로 꺾고 초대 우승을 차지하는 등 한국 야구의 황금기를 연 대회이기도 하다.
- 2005년 메이저리거의 올림픽 차출을 요구하는 IOC와 거부하는 MLB와의 알력 다툼으로 인해 야구종목이 올림픽에서 퇴출되어 베이징 올림픽을 끝으로 당분간 올림픽에서 야구를 볼수없게 되었다. 일단 IBAF에서는 여자 소프트볼의 올림픽 재입성을 노리는 국제 소프트볼 연맹(ISF)와 손을 잡고 세계야구소프트볼 총연맹(WBSC)를 창설했다. 그리고 남자 야구와 여자 소프트볼을 하나의 종목으로 묶어 양성 평등을 강조하면서 올림픽 복귀를 노리고 있다.[14] 다만 소프트볼이 야구보다 듣보잡이라는 게 문제. 거기에 야구·소프트볼의 경쟁상대인 크리켓도 올림픽 재입성을 노리고 있었으며 새로 들어가려면 이전 종목이 빠져야 하기에 쉽지 않을 전망이었다. 그래도 2013년에 2020년 올림픽 개최지가 일본 도쿄로 결정됨에 따라 개최국 일본의 입김에 따라 야구가 부활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섞인 보도가 2014년에 나오기도 했다.#
- 그러다가 올림픽에 돈만 많이 들어간다고 개최국들이 줄어드는 상황에 갑질만 하던 IOC가 부랴부랴 올림픽 어젠다 2020라는 개혁안을 발표했는데, 개최지에서 정식 종목을 직접 추가하는 것을 허용하게 되었다. 일본의 로비가 통한 셈. 야구가 영구적으로 올림픽에 복귀하는 건 아니더라도, 2020년 올림픽을 비롯하여 야구가 인기 있는 국가에서 치러지는 대회에서는 경기가 정식 종목으로서 치러질 수 있게 되었고, 예상대로 2020에는 집어넣었다. 그래서, 2028 LA 올림픽에서도 야구를 볼 수 있을 전망이지만 2024 파리 올림픽에선 제외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 이 외에 강민호[15], 권혁, 윤석민, 이용규, 이택근, 정근우 등이 FA 대박을 치기도 했다.
베이징올림픽 당시에는 집에서 TV로 경기를 봤다. 그때는 2002한일월드컵 이후라 야구가 침체돼 있었다. 어떻게 하면 야구를 살리느냐를 놓고 고민했을 때다. 동네엔 온통 축구만 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베이징올림픽에서 우리 선수들이 선전을 하자 금방 분위기가 바뀌었다. 야구경기를 하는 날이면 온 동네가 떠들썩했다. 동네 주차장에서도 아이들이 야구를 했다. 좋은 기회다 싶었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작은 아이가 동네 클럽에서 축구를 했다. 축구하는 학부모들에게 '내가 야구를 가르쳐도 되겠나'라고 물어봤는데 모두 좋다고 했다. (중략) 잘 하는 아이들은 리틀 야구 보냈다. 이후 야구붐이 일어났고, 동네에 축구 클럽이 없어졌다. 2009, 2010년 학교 운동장에는 거의 대부분 야구를 했다.
리그에서 젊은 국가대표급 선수들을 계속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도 있었지만, 이제 대한민국 야구계 스스로 자신들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생겨났다. 이는 다음해 열린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도 좋은 성적으로 연결되었고, 대한민국에 야구 붐이 더욱더 일어나는 계기로서 작용되었다.
유소년 야구도 대폭 증가하게 되었는데, 초·중·고·대 선수들은 2006년 6,400명에서 2015년 16,000명으로 늘어났다. 팀은 282팀에서 455팀으로 173개팀이나 늘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이후 침체되어 있던 야구계가 다시금 재도약하게 되었고, SK 와이번스와 두산 베어스를 필두로 여성 관중들의 대거 유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며[17]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게다가 베이징 올림픽 다음 해의 2009년에는 KIA 타이거즈가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한 이후 처음으로 2009년 페넌트 레이스와 2009년 한국시리즈를 우승하며 1997년 한국시리즈 이후 걸린 아홉수를 12년만에 풀어내고 V10을 달성하며 팬이 또다시 대량으로 흡수[18] 되는 등 관심도가 대폭 올라가면서 자금의 유입 규모가 커졌고 이는 야구계 인프라 산업 활성화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는데 2008년의 선전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
당시 프로야구와 대등한 싸움을 하던 K리그에도 타격이 있었는데, 축구기자간의 대담에서도 이때의 충격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
참고로 이때 처음 야구본 사람을 일컬어 베이징 뉴비라 부르며 에드먼턴 키즈 이후 베이징 키즈가 생기면서 다시 전성기를 열었다.
반대로 씁쓸한 일이 있는데 이 당시 한국야구대표팀 단장이 바로 하일성이었다. 2016년 자살로 삶을 끝낸 그가 살아 생전, 묘비명을 올림픽 야구단장 하일성이라고 적어달라고 강조했던 걸 보면 그도 이 올림픽 금메달이 가장 인생에서 좋았던 일로 생각한 모양이지만 결승전 이후 대표팀 선수들과 웃으며 사진찍은 게 하일성을 기억할 때 씁쓸하게 남게 되었다.
유소년 야구도 대폭 증가하게 되었는데, 초·중·고·대 선수들은 2006년 6,400명에서 2015년 16,000명으로 늘어났다. 팀은 282팀에서 455팀으로 173개팀이나 늘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이후 침체되어 있던 야구계가 다시금 재도약하게 되었고, SK 와이번스와 두산 베어스를 필두로 여성 관중들의 대거 유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며[17]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게다가 베이징 올림픽 다음 해의 2009년에는 KIA 타이거즈가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한 이후 처음으로 2009년 페넌트 레이스와 2009년 한국시리즈를 우승하며 1997년 한국시리즈 이후 걸린 아홉수를 12년만에 풀어내고 V10을 달성하며 팬이 또다시 대량으로 흡수[18] 되는 등 관심도가 대폭 올라가면서 자금의 유입 규모가 커졌고 이는 야구계 인프라 산업 활성화에 큰 기여를 하게 되었는데 2008년의 선전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
당시 프로야구와 대등한 싸움을 하던 K리그에도 타격이 있었는데, 축구기자간의 대담에서도 이때의 충격이 상당했음을 보여준다. ##
참고로 이때 처음 야구본 사람을 일컬어 베이징 뉴비라 부르며 에드먼턴 키즈 이후 베이징 키즈가 생기면서 다시 전성기를 열었다.
반대로 씁쓸한 일이 있는데 이 당시 한국야구대표팀 단장이 바로 하일성이었다. 2016년 자살로 삶을 끝낸 그가 살아 생전, 묘비명을 올림픽 야구단장 하일성이라고 적어달라고 강조했던 걸 보면 그도 이 올림픽 금메달이 가장 인생에서 좋았던 일로 생각한 모양이지만 결승전 이후 대표팀 선수들과 웃으며 사진찍은 게 하일성을 기억할 때 씁쓸하게 남게 되었다.
[1] 남자 단체 구기 종목 중에선 최초이자 유일하다. 꼭 단체를 붙여야 하며 최초 남자 구기 금메달은 1988년 남자 탁구 단식에서 우승한 유남규이다.[2] 해당 기사에서는 고척 스카이돔에 들어설 한국야구박물관에 기증한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부산광역시 기장군에 건설될 예정인 KBO 명예의 전당이 건설 되면 그곳에 전시될 계획이라고 한다.[A] 3.1 3.2 예선에 필요한 경비 1억이 모자라 영국은 최종 예선 출전을 포기했고 대신 4위를 기록했던 독일이 참가했다.[5] 2000.[6] 1992, 1996, 2004.[7] 1996, 2000.[8] 1996.[9] 2004[10] 2000.[11] 1992.[12] 사실 한국이 부진했었고 경기도 잘 안 풀렸던게 사실이지만 그 대회에서 대만을 잡는 이변을 연출하는 등 중국이 선전했던 점도 컸다.[13] 최초의 제주도 출신 메달리스트이다.[14] 극소수이긴 하지만 엄연히 여자 야구 선수와 남자 소프트볼 선수도 있다. 일본에서는 아예 여자프로야구도 있을 정도이다.[15] 그것도 FA대박을 2번씩이나 치면서 진갑용과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16] 반면 일본은 절치부심해서 13년 전의 굴욕을 완벽하게 씻어냈다. 공교롭게도 베이징 때와는 정반대의 결과가 된 셈.[17] 더구나 이 두 팀은 KBO 한국시리즈에서의 맞대결을 통해 주가도 높았던 팀들이다.[18] 많은 사람들이 알겠지만 원년 클래식 팀인 롯데와 KIA의 팬수는 다른 구단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으며 골수 팬들이 즐비해 있다. 허구연이 한국 프로야구가 흥행하려면 롯데와 KIA가 잘해야 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것이 과장이 아닌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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