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공인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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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추존황후 효공인황후 | 孝恭仁皇后 | |
청 옹정제조 성모황태후 인수황태후 | 仁壽皇太后 | |
출생 | |
사망 | |
능묘 | 경릉(景陵) |
재위기간 | 청 격격 |
청 덕빈 | |
청 덕비 | |
청 황태후 | |
강희제의 후궁으로, 옹정제의 생모. 만주 정황기 사람이다. 몽골 출신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그녀의 친정 가문인 우야 할라는 만주 씨족이므로 그냥 만주족으로 보는 것이 적합해 보인다. 부친 위무는 자금성의 치안을 담당하는 정3품 호군참령이고 친정은 오래된 명가라고 하나[1] 주 정황기 포의 출신으로 청대 기준으로는 나름 높은 신분이나 만주 팔기 명문가 출신이 많은 강희제의 후궁 중에서는 높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증조부가 전장에서 여러 공을 세운데다 조부가 종1품 내대신이고 아버지는 정3품 호군참령[2] 여동생은 뉴호록씨의 적통인 아령아의 적처가 될 정도로 가문의 위세가 대단했다. 내무부 포의[3] 출신이기 때문에 궁녀로 입궁했다.
이름은 만주어로 술병을 뜻하는 말우. 강희 14년, 만15살 때 양비 위씨, 정비 만류합씨 등과 함께 궁녀로 뽑혀 강희제의 신변에서 수발을 들었다.[4] 처음엔 격격으로 봉해졌다. 강희 17년에 아이신기오로 인전을 낳았고, 그 다음해에 덕빈으로 봉해졌다. 그 후 덕비로 봉해지고 친아들 인전이 황위에 오르자 인수황태후(仁壽皇太后)로 봉해지나 곧 사망하였다.
옹정제를 포함해 슬하에 3남 3녀가 있다. 특히 셋째 아들인 14황자 인티(胤禵, 윤제)를 편애했다고 하는데 친형제 지간인 인전과 인티가 사이가 안 좋아지자, 덕비 역시 친아들인 인전과 사이가 안 좋아졌다고 한다. 그 외 둘째 아들인 6황자 윤조(胤祚)는 5살에 요절했고, 첫째 딸은 2달 만에 사망했으며, 셋째 딸은 11살에 요절했다. 둘째 딸 고륜온헌공주[5]는 퉁기야(佟佳) 가문의 순안안(舜安顔)과 혼인했는데 그는 옹정제의 양모인 효의인황후의 조카였다.
여담이지만 1697년 초 즈음에 조금 아팠던 것으로 보인다. 강희제가 1697년 2월 8일 화이라이(懷來) 현에서 태감 구원싱에게 보낸 편지에, "내가 떠나올 때 덕비가 몸이 좀 안 좋던데… 이제는 병이 완전히 다 나았겠지?"라며 자상하게 안부를 물어보는 부분이 있다.
덕비의 여동생 중 한명은 알필륭의 적자인 아령아의 정실부인이 되었고 덕비의 여동생이 낳은 아령아의 딸은 옹정제의 측근이자 이복동생인 과의친왕 윤례의 적복진이 되었지만 정작 아령아는 조카인 옹정제, 사위인 윤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령아는 처조카인 윤진이 아니라 8황자 윤사를 지지했다. 옹정제는 즉위 후 아령아가 윤사를 지지한 일을 거론하며 아령아의 묘에 '신하답지 않고 아우답지 않으며 포악하고 탐욕스러운 아령아의 묘'라고 새겨놓았다.
옹정제를 포함해 슬하에 3남 3녀가 있다. 특히 셋째 아들인 14황자 인티(胤禵, 윤제)를 편애했다고 하는데 친형제 지간인 인전과 인티가 사이가 안 좋아지자, 덕비 역시 친아들인 인전과 사이가 안 좋아졌다고 한다. 그 외 둘째 아들인 6황자 윤조(胤祚)는 5살에 요절했고, 첫째 딸은 2달 만에 사망했으며, 셋째 딸은 11살에 요절했다. 둘째 딸 고륜온헌공주[5]는 퉁기야(佟佳) 가문의 순안안(舜安顔)과 혼인했는데 그는 옹정제의 양모인 효의인황후의 조카였다.
여담이지만 1697년 초 즈음에 조금 아팠던 것으로 보인다. 강희제가 1697년 2월 8일 화이라이(懷來) 현에서 태감 구원싱에게 보낸 편지에, "내가 떠나올 때 덕비가 몸이 좀 안 좋던데… 이제는 병이 완전히 다 나았겠지?"라며 자상하게 안부를 물어보는 부분이 있다.
덕비의 여동생 중 한명은 알필륭의 적자인 아령아의 정실부인이 되었고 덕비의 여동생이 낳은 아령아의 딸은 옹정제의 측근이자 이복동생인 과의친왕 윤례의 적복진이 되었지만 정작 아령아는 조카인 옹정제, 사위인 윤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령아는 처조카인 윤진이 아니라 8황자 윤사를 지지했다. 옹정제는 즉위 후 아령아가 윤사를 지지한 일을 거론하며 아령아의 묘에 '신하답지 않고 아우답지 않으며 포악하고 탐욕스러운 아령아의 묘'라고 새겨놓았다.
[1] 옹정제의 주장이다. 효공인황후의 할아버지 오아 액삼은 병자호란 당시 의주성 일대에서 지천 최명길의 밀서를 전달하던 조선인 전령을 잡고 광교산 전투 당시 슈무루 양구리를 죽인 조선군 저격수를 잡아온 공로를 인정받아 숭덕제에게 남작 작위를 받는다. 광교산 전투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실제로 전황의 혼란 속에서 양고리를 저격한 저격수를 잡을 수 없었으므로 비슷한 사람을 잡아 왔다고 보는 것이 옳다.[2] 청나라는 3품 이상의 관료를 고관으로 분류한다[3] 상삼기의 포의로 황실 직속 부서에서 일하는 계층, 대부분 궁녀가 여기 출신이다.[4] 이는 2021년 경 정소유(鄭小悠), 귤현아(橘玄雅) 등의 청사 만주어 기록을 연구한 학자들에 의해 세 후궁들의 이름과 친분이 밝혀졌다. 만주어 기록에 의하면 옹정제가 양비를 두고 태후와 입궁 동기라며 친근감을 표현하기도 한다.[5] 강희제와 황태후가 가장 아꼈던 공주라고 한다. 다른 공주들은 거의 다 몽골로 시집보냈지만 온헌공주만은 만주족과 결혼해 가까이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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