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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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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는 2008~2010년 허정무호를 서술합니다. 1998~2000년 U-23 국가대표팀에 대한 내용은 허정무호/U-23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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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허정무
감독
코치
주장
계약 기간
2007년 12월 7일 ~ 2010년 6월 30일
(2년 7개월 / 937일)
계약 종료 (계약 기간 만료)
연봉
5억 원 (감독 / 추정치) #[1]
전술 스타일
선수비 후역습
4-2-3-1 또는 4-4-2 포메이션
성적
1. 개요2. 선임 과정3. 팀 스타일4. 베스트 일레븐 연대5.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5.1. 국가대표 엔트리5.2. 경기 결과5.3. 평가
6. 이후

1. 개요[편집]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제67대 감독 허정무의 대표팀에 대해 다룬 문서.

항상 역대 최강의 대표팀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팀이며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대한민국의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16위[3] 이후 사상 첫 원정 월드컵 2라운드(16강) 진출과 월드컵 15위라는 기록을 세운 대표팀이다.

그러나 정작 이 당시만 해도 재미없는 축구로 평가되며 허정무 전 감독의 입지는 임기 내내 그리 탄탄하지 못했고,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허정무 전 감독은 월드컵 대회 이후 재계약을 하지 않고 사퇴한다. 시간이 흘러 대한민국 축구의 암흑기가 오면서 비로소 성과에 걸맞는 재평가를 받은 팀이다.

2. 선임 과정[편집]

전임 핌 베어벡 전 감독이 2007년 바레인 쇼크와 아시안컵 우승 실패의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 형식으로 대표팀 감독직을 사퇴하게 되면서, 이에 핌 베어벡 전 감독이 겸임하던 올림픽 대표팀은 당시 부산 아이파크의 감독을 맡은지 얼마 되지 않았던 박성화 전 감독을 앉혀 바로 공백을 메웠으나 A대표팀 감독직은 오랫동안 공석 상태가 지속되었다. 당초 축구협회는 또 외국인 감독 선임 기조를 이어가기 위해 제라르 울리에, 믹 매카시와 협상했고, 울리에와는 큰 틀에서 협상이 이뤄져 부임 직전까지 갔으나 울리에 전 감독의 가족들이 대한민국행에 반대하여 결국 부임이 무산됐다. 결국 축구협회는 A매치를 약 1개월 남겨둔 시점에서 전남 드래곤즈의 허정무 전 감독을 부랴부랴 감독직에 앉혔다. 사실 허정무차범근 전 감독 이후 감독직을 수행한 사람들에 비해서 특이한 점은, 이미 국가대표팀 감독을 두 번[4] 역임한 적이 있다는 것. 따라서 2007년의 감독직 취임은 그의 3번째 국가대표 감독직 취임이었다.

참고로 그가 국대 감독에 재부임했다는 소식에 이영표 같은 고참 선수들은 맙소사 우린 이제 다 죽었어라고 고개를 내저었고, 기성용 같은 후배 선수들은 공포에 떨었다고 하는데 이유는 1기 시절때 허정무가 매우 엄한 감독으로 소문이 자자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재부임한 뒤로는 예상외로 꽤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주어 선수들에게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3. 팀 스타일[편집]

취임 이후부터 퇴임하기까지 플랫 포백 수비라인에 왕성한 활동량을 가진 윙어와 수비형 미드필더를 놓아 강한 압박이 가능하게 했고, 볼란치에 좌우로 롱패스 및 전진패스를 배급해 줄 수 있는 미드필더를 기용했으며, 공미는 윙어와 스위칭, 중앙 공격수는 측면으로 빠지며 윙어가 가운데로 침투할 수 있게 해서 한국의 특징인 빠르고 강한 윙어라는 특징을 최대한 살렸다고 볼 수 있다.

아시아 내의 경기에선 4-4-2를 사용했는데 그럴 경우에는 활동량이 많고 돌파력이 좋은 공격수와 침투와 공간 창출이 좋은 공격수를 배치 한 후 위에 기술한대로 윙어 및 2선 침투를 노렸다.

수비라인의 경우는 스토퍼형 수비수 한명과 커맨더형 수비수를 한명씩 배치해서 수비시 수비형 미드필더와 윙어가 내려와 수비를 돕고 커맨더형 수비수는 커버링을 한다.

원하는 선수를 찾기 위해 수많은 유망주를 발굴해냈고 성장시켰다. 그 과정 속에서 양박쌍용이라는 최적의 조합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최종형태는 골키퍼에 정성룡, 커맨더형에는 한국 최고의 커맨더 조용형, 스토퍼는 이정수, 양 풀백은 이영표와 차두리 오범석, 활동량 많은 만능 수비형 미드필더는 김남일이 맡았다가 김정우, 배급형은 김두현에서 기성용으로, 윙어 왼쪽과 공미는 박지성과 염기훈, 오른쪽은 이청용, 공격수는 공간 창출&침투형 박주영이 맡았고, 4-4-2를 쓸적에는 활동량과 돌파력을 갖춘 이근호가 파트너로 나섰다.

이러한 포워드 활용양상은 이동국과 유병수 등 전형적인 슈터형 공격수가 소집이 잘 되지 않게되는 원인이 되었다. 유병수는 국대와 인연이 아주 멀어졌고 월드컵 엔트리에 승선한 이동국도 끝까지 중용받진 못했다.

요약하자면 활동량, 압박, 스피드를 강조하는 전형적인 한국 축구 스타일을 어느 정도 유지하는 선에서 포스트 플레이, 풀백의 빠른 공수전환 등 현대 축구의 스타일을 도입해 약간의 변화를 꾀했다고 평할 수 있다. 이렇게 고유의 팀 컬러와 세계 축구의 흐름 사이에서 밸런스를 잘 잡아낸 결과 원정 월드컵에서의 최고 순위 15위와[5] 세대 교체의 성공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아내게 되었다. 그래서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이후 대한민국 대표팀의 최고 전성기로 평가 받는다.

4. 베스트 일레븐 연대[편집]

  • 2008년 1월 ~ 6월 (동아시안컵 ~ 3차 예선)
  • 3월까지는 스리백을 주로 사용했지만 6월부터 4-4-2로 정착했다.
  • 부임한 지 반 년 밖에 되지 않는 상황에서 K-리그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을 대거 차출해 실험한 단계.
  • 이 시기에는 1기 때 보여줬던 선입견과는 다르게 그동안 리그에서 잘했지만 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하던 20대 중후반이나 30대의 나이 많은 선수들을 많이 차출했다.
  • 2008년 9월 ~ 11월
  • 이제 선수들에 대한 파악이 어느 정도 끝난 것으로 보이며 주전 조가 어느 정도 정해진 모습이다.
  • 하지만 여전히 많은 선수들을 소집해 백업 경쟁을 불붙이고 있다.
  • 9월 A매치를 마지막으로 김남일이 소집되지 않으며 박지성이 주장에 선임된다.
  • 논란이 있던 이운재가 11월 A매치부터 대표팀에 복귀했다.
  • 2009년 1월 ~ 6월
  • 월드컵 최종 예선을 순조롭게 넘겼고 역시 4-4-2로 베스트 일레븐은 어느 정도 굳혀진 모습을 보여줫다.
  • 박주영이 소속팀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며 다시 주전 투톱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 2009년 8월 ~ 11월
  • 본격적으로 월드컵을 준비하던 시기.
  • 이동국, 설기현, 차두리, 김남일, 김두현 등 큰 무대에 맞게 노련한 선수들을 대거 소집해 실험했다.
  • 2010년 1월 ~ 2월
  • 월드컵 해마다 열리는 동계 전지 훈련.
  • K-리그, J리그에서 뛰는 선수들로 구성돼 있다.
  • 6개월 전 U-20 월드컵에서 맹활약한 선수들이 대거 소집됐다.
  • 2010년 3월 ~ 5월
  • 2010년 4월 30일 발표된 월드컵 예비 엔트리 최종 30인
  • 겨울 전지 훈련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 이승렬, 김보경, 신형민, 김재성이 소집됐다.
  • 3월 소집 당시 박주영이 부상으로 소집되지 못하자, 중국에서 활약하던 안정환이 거의 2년 만에 깜짝 소집됐다.
  • 5월 17일, 조원희, 김치우, 황재원, 강민수가 1차로 탈락해 해외 소집에 함께하지 못하게 됐다.
  • 6월 1일, 이근호, 신형민, 구자철이 최종 탈락했다. 또한 곽태휘가 벨라루스전 무릎 인대 부상을 당해 강민수가 다시 발탁됐다.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허정무호/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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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국가대표 엔트리[편집]

2010년 6월 1일 최종 결정된 23명의 엔트리는 다음과 같다.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종 명단
No.
포지션
한글 표기
로마자 표기
선발 당시 소속 클럽
비고
21
GK
KIM Youngkwang
울산 현대
1
LEE Woonjae
수원 삼성 블루윙즈
18
JUNG Sungryong
성남 일화
23
DF
KANG Minsoo
수원 삼성 블루윙즈
15
KIM Dongjin
울산 현대
3
KIM Hyungil
포항 스틸러스
2
Oh Bumseok
울산 현대
12
LEE Youngpyo
알 힐랄 FC
14
LEE Jungsoo
가시마 앤틀러스
4
Cho Yonghyung
제주 유나이티드
22
CHA Duri
프라이부르크
16
MF
KI Sungyueng
셀틱 FC
5
KIM Namil
톰 톰스크
6
KIM Bokyung
오이타 트리니타
13
KIM Jaesung
포항 스틸러스
8
KIM Jungwoo
광주 상무
7
PARK Jisung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7
LEE Chungyong
볼턴 원더러스
10
FW
PARK Chuyoung
AS 모나코
9
AHN Junghwan
다롄 스더
19
YEOM Kihun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
LEE Donggook
전북 현대 모터스
11
LEE Seungyeoul
FC 서울
예비 엔트리에 포함되었으나 최종 명단에는 뽑히지 못한 7명은 아래와 같다.
DF
KWAK Taehwi
CHO Wonhee
HWANG Jaewon
MF
KIM Chiwoo
KOO Jacheol
SHIN Hyungmin
FW
LEE Keunho

5.2. 경기 결과[편집]

경기수
득점
실점
승률[27]
44
22
14
8
68
37
50%
[공식 A매치로 인정받지 않는 오만전 전적을 포함하고 계산할 시]
경기수
득점
실점
승률[28]
45
22
15
8
68
37
48.89%
일시 / 장소
상대팀
결과
대회
득점
비고
2008년
0 : 1
평가전
4 : 0
곽태휘, 박지성
설기현(2골)
3 : 2
박주영(2골),
곽태휘
1 : 1
염기훈
1 : 1
염기훈
0 : 0
2 : 2
박지성, 박주영
1 : 0
박주영
3 : 1
김두현(3골)
0 : 0
1 : 0
평가전
이청용
1 : 1
기성용
3 : 0
평가전
기성용,
이근호(2골)
4 : 1
이근호(2골),
박지성, 곽태휘
1 : 1
평가전
이청용
2 : 0
이근호, 박주영
2009년
1 : 1
평가전
아이투니(OG)
2 : 2
김정우, 이근호
1 : 1
박지성
2 : 1
평가전
김치우, 이근호
1 : 0
김치우
0 : 0
평가전
2 : 0
박주영, 기성용
0 : 0
1 : 1
박지성
1 : 0
평가전
박주영
3 : 1
박주영, 이정수,
설기현
2 : 0
기성용, 오범석
2009년 11월 14일
(덴마크, 에스비에르)
0 : 0
0 : 1
2010년
2 : 4
평가전
김정우, 구자철
2 : 0
오범석, 이정수
1 : 0
김재성
5 : 0
김정우, 구자철,
이동국, 이승렬,
노병준
0 : 3
3 : 1
이동국, 이승렬
김재성
2 : 0
평가전
이동국, 곽태휘
2 : 0
이승렬, 이청용
2 : 0
박지성, 박주영
0 : 1
0 : 1
2010년 6월 12일
(남아프리카공화국, 포트 엘리자베스)
2 : 0
이정수, 박지성
2010년 6월 17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1 : 4
이청용
2010년 6월 22일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
2 : 2
이정수, 박주영
2010년 6월 26일
(남아프리카공화국, 포트 엘리자베스)
1 : 2
이청용











2010년 3월 기준, 무엇보다 가열찬 논쟁거리는 역시 이동국 떡밥. 4-4-2 포메이션에서 양박쌍용의 자리가 분명한 반면[57] 박주영과 콤비를 이룰 나머지 한 명의 스트라이커의 기량이 불확실한 탓에, 관련 논쟁이 끊이질 않는 상황이다.

허정무호에서 고질적으로 지적되어 온 수비진의 안정성 문제도 큰 떡밥이다. '조강 라인'이라 줄여 부르는 조용형, 강민수의 기량이 팬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다. 결국 강민수는 대표팀 선발에서 탈락하였으나 곽태휘의 부상으로 어부지리로 대표팀에 다시 뽑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일취월장한 기량을 선보여 스페인과 맞설 정도였다.

32강 본선 조별리그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는 오염콤비가 등장했다. OME의 경기력을 보여준 오범석의 '오'와 염기훈의 '염'을 한 글자씩 따서 만들어진 것. 물론 마녀사냥에 가까운 결과론[58]이지만, 덕분에 네티즌들에게 평생 까임권을 받았다.

하지만 뒤이어 나타난 조광래 감독부터 시작해서 대표팀을 이끌면서 드러낸 대표팀의 문제점과 경기력을 적나라하게 보게 된 이후로는 차라리 이게 낫다라는 여론이 올라오고 있으며 월드컵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2010년 당시 자신들의 쓸데없이 높았던 눈높이를 반성하는 축구팬들이 양산되고 있다. 2002년 멤버들 덕분이라고는 하지만 있는 것을 제대로 활용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자원까지 안착시킨 허정무호에 비해 후임 감독들은 그렇게 안착시킨 자원들을 제대로 활용못하다가 세대교체 이후로는 완전히 말아먹었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2002년 멤버가 모두 은퇴한 이후 한국 대표팀은 월드컵에서 1승도 하기 어려웠던 1990년대 수준으로 회귀했다. 아무것도 없을 때야 그러려니 하며 정신위로를 할 수나 있지만 지금은 있는 것을 활용하는 것도 못하고 있는 수준이다. 당장 감독하나 바뀌었다고 추태나 부리던 팀이 카잔의 기적을 만든 것만 봐도 답이 나온다.

사실 최강희 감독의 인터뷰에서도 나타나듯이 국내파 축구 국가대표 감독이란 건 매우 힘든일이다. 일반 프로 축구팀 감독과는 다르게 상시로 있을 사람들은 코치같은 간부진이외에는 없다. 자기가 뭘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잊을만 할 때 쯤 모여서 며칠있지도 않고 그냥 귀가해버린다. 특히나 축구는 그 어느 종목 보다도 세계화가 이루어져 있다. 2002년 이후 주전 선수들의 대부분이 유럽 혹은 외국에서 뛰는 현재의 대표팀은 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다 프로 축구 팀이 중심이 되어 돌아가는 세계 축구의 기준이 이제는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예전처럼 국대를 위해서 국내 리그를 무시하는 행정을 할 수도 없다. 물론 한국에서 국가대표팀이 가지는 특수한 위상, 권위를 이용해 찍어누를수는 있겠지만 더이상 예전처럼 찍소리도 못하고 밟히는 국내 프로 리그가 아니다. 잡음이 세어나올수 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축구협회와 대표팀 감독은 권위와 이미지에 손상을 입게 되어 소위 말하는 쉴드가 벗겨지게 된다. 물론 결과로 보여주면 상관 없겠지만 그것은 현실적이지 않은 가정이다.

A대표팀의 팀컬러라는건 소집 후 많아야 두 경기 뛰는 A대표팀에서 만들어지는게 아니라 해당 국가의 리그와 교육시스템을 근간으로 하는 것이다. 당장 유소년 시절부터 배워왔던 기본적인 플레이 방식이 성인이 되어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 한들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나 축구의 주류는 프로 축구이며 현대 축구의 전술 트렌드나 혁신을 이끄는 감독,코치들은 모두 유럽 프로 축구의 상위권 팀에서 억대의 연봉을 받으며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다. 대표팀 축구는 그 트렌드나 혁신을 따라가기에도 벅찬 상황이고 대표팀 감독 자리는 클럽 축구에서 밀려났거나 주가가 떨어진 감독들이 들어가는 한직으로 인식되는 것이 현재의 실정이다. 그것은 허정무가 감독을 하던 2000년대 후반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나 현대 축구에서 변방 취급 받는 아시아라면 더더욱 이런 트렌드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고 상황은 더욱 불리해진다. 이러는 판국이니 억지로 클럽팀에서 하듯이 자기식대로 바꿀려고 하다가 말아먹기 싫어서라도 자기하고 맞지 않는 것을 억지로 끌고 나갈 수 밖에 없다.

대회가 가시화 되어서 장기 합숙 훈련을 위해 선수들이 소집이 되어도 문제는 있다. 선수단과 팀을 장악하고 조율하는데도 바쁜데 평가전이니 예선전이니 하는 경기라고 쓰고 단두대 매치라고 읽는 경기들이다. 지면 언론이든, 축협이던 압박이 장난아니게 내려온다. 국내파 감독들은 선수를 테스트하고 미래를 보고 가야 하는 평가전에서도 목숨을 걸 수 밖에 없다. 이런데 무슨 인재발굴과 양성과 영입을, 감독의 생각이 들어간 팀을 만든다는 것인가? 한 경기 못 하면 저 감독 자르라고 하는 판국인데. 한 경기에 연연할 수 밖에 없다. 과거 독일군에서 나왔듯이 아무리 계획을 잘 짜도접적한 그 순간부터 그 계획대로 갈 수 없고, 테스트이므로 그것이 좋은 면보다는 오류가 더 많이 나오기 십상인데 그러면 언론들과 축구계 내외의 정치질 앞에서 인민재판을 받게된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는 커녕 당장 자기 목을 지키기위해서 예선도 아닌 평가전에서 에이스 선수를 90분 내내 뛰게 만드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가뜩이나 레벨이 낮은 상황에서 레벨업만 하기도 바쁜데 정치질과 거래를 본업보다 우선시하고 살아야 하는 하루살이들이 국가대표 감독들이다. 자신이 아무리 절대고수라도 실력을 내지 못하게 봉인당한 상태에서 살아남는 것부터가 문제다.

실제로 2010 남아공 월드컵을 치룬 이후에도 잔존한 멤버들과 구자철, 손흥민, 곽태휘 등까지 가세한 엔트리로 아시안컵 3위에 그쳐 박지성의 국가대표 은퇴 경기를 망치고, 부상으로 신음하던 이청용을 굳이 친선 경기에 무리하게 차출하는 삽질을 하는 등[59] 선수 컨디션 관리 면에서도 엉망인 모습을 보여줬으며, 월드컵 최종예선도 아닌 3차 예선에서 월드컵 탈락 위기를 맞이했던 조광래나 폼이 떨어지고 상대적으로 네임벨류가 떨어지는 팀에서 뛰거나, 팀에서 출전을 아예 못하는 선수들을 오로지 자신의 원패턴적인 전술에 맞고 자기와 올림픽 등에서 같이 활동했다는것 때문에 무조건 기용하고 정작 자기라인이 아니면 제대로 실력을 증명받은 선수들이라도 홀대한 홍명보를 보자. 그에 비하면 2002년 멤버들 덕분이라고는 하지만 있는 것을 제대로 활용한 허정무호는 엄청나게 선방한 것이다.[60] 적어도 허정무는 팀 케미스트리를 박살내거나 하는 등의 짓은 하지 않았다. 대회 기간 중 음주로 물의를 빚은 이운재의 징계를 풀어달라고 한 문제는 있지만, 이건 팀 케미스트리보다는 스포츠맨십과 도덕성에 관련된 사안.

특이한 점이 있다면, 감독 재임기간 내내 홈경기는 모두 서울월드컵경기장 아니면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치렀다는 것이다. 다른 감독들은 타 구장에서 치러진 경기도 적절히 배분된 것을 보면 이는 충분히 특이한 부분이라 할 만하다. 또 대표팀 감독으로서 치렀던 첫 경기인 칠레전을 제외하면 패배한 경기는 모두 중립 지역에서 치러진 경기라는 점에서 허정무호 당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홈에서는 극강의 면모를 보였다고 충분히 평할 만하다.

6. 이후[편집]

허정무와 이후의 국대 감독들과의 가장 큰 차이는, 그에 대한 평가가 시간이 지나면서 좋아졌다는 것이다. 홍명보를 제외하고 조광래, 최강희[61] 울리 슈틸리케 모두 감독 취임 초반에는 평가가 긍정적이었다. 일종의 신장개업 효과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공통적으로 감독직 재임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부정적인 평가가 많아지고 실제 경기력도 점차 나빠지는 흐름을 보였다. 반면 허정무는 취임 초기에는 북한요르단 상대로 고전하는 등 헤매다가 2008년 하반기에 플랫 4-4-2로 전환한 것이 대성공한 것을 계기로 경기력이 반등했고 마침내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그 정점을 찍었다. 당시 허정무가 조금 더 일찍 감독직을 맡아 월드컵까지 롱런했다면 경기력과 성적이 더 좋았을 거라는 재평가도 나왔다.

그러나 그런 평가가 주류였던 이유는 허정무는 이미 허정무호 1기 때 일본보다 실력이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낙마했고 그 후임으로 왔던 것이 거스 히딩크였으며, 당시 대표팀 성적뿐만 아니라 허정무 본인의 구설조차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1998년~2002년까지를 명확하게 기억하는 기존 세대는 당연히 허정무의 이미지가 처음부터 좋지 않았고, 특히 라이트한 축구팬일수록 허정무를 전혀 믿지 않았으며 의심의 눈으로 바라봤다. 허정무가 내질렀던 온갖 구설이나 불평을 거스 히딩크가 완벽하게 뒤집었기 때문이다. 이 세대는 인터넷에 친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고 2010년 이후에는 인터넷 스포츠 여론의 주류에서 많이 밀려났는데, 그런 반면 1998년~2002년까지의 대한민국 축구가 잘 기억에 남지 않고 2010년 이후 인터넷 스포츠 여론에 많이 참여하는 세대에게는 왜인지 모르게 허정무가 부당한 평가를 받는다는 인상이 많지만 사실 이유는 다 있다.

계약이 끝나고 대한축구협회에서는 허정무에게 재계약을 제의했지만 허정무는 재계약을 고사했다. 그리고 그 이후 국가대표팀은 조광래호, 최강희호, 홍명보호, 슈틸리케호까지 약 7년에 달하는 기나긴 암흑기를 겪게 되고, 그나마 가장 좋은 모습읕 보여줬던 신태용호도 월드컵에서 카잔의 기적과 2018년 러시아 월드컵 19위를 기록하며 암흑기에서 탈출하면서, 벤투호가 4년 간의 항해 끝에 드디어 월드컵 16강(16위) 기록했다.
[1] 허정무는 2009년 12월아르헨티나 언론에서 보도한 추정 연봉액이 7억 원(60만 달러)로 나오자 아내로부터 '차액 어디 갔냐'면서 시달린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7억 원에 못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2] 32개 진출팀 중 15위 기록. 1954년 스위스 월드컵 16위(16강 조별리그) 이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첫 원정 2라운드(16강) 진출.[3] 16강 조별리그(일본을 이기고 지역 예선 통과하며 진출했다.)[4] 1995년 감독 대행, 1998년~2000년에 성인 대표, 올림픽 대표 감독 겸임.[5] 현재까지 원정 월드컵 최고 순위이며, 벤투호도 16강 최종 16위였다.[d] 6.1 6.2 6.3 6.4 6.5 6.6 6.7 6.8 6.9 6.10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2006 FIFA 월드컵 독일 엔트리에 포함된 선수.[8] 이 명단에서 유일하게 1994 FIFA 월드컵 미국 엔트리에도 선발된 선수. 다만 이운재는 간염 후유증으로 슬럼프에 빠진 탓에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대표팀에는 뽑히지 못했다. 이 명단에서 뽑힌 선수로는 최고령 선수. 2010년 당시 37세이고, 1994년에도 21세로 성인이었다.[★] 9.1 9.2 9.3 9.4 9.5 9.6 9.7 2024년 3월 기준 프로~세미프로에서 현역으로 활동 중인 선수.[10] 원래 예비엔트리에서 1차 멤버로 탈락되었으나, 벨라루스와의 평가전에서 큰 부상을 입는 바람에 낙오된 곽태휘의 대체선수로 선발되었다.[22] 이 명단에서 유일하게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 선발된 선수.[23] 최종 엔트리를 확정짓기 전 23인 엔트리에 포함될 예정이었으나, 월드컵을 앞둔 벨라루스와의 평가전에서 인대파열 부상을 입어 뜻하지 않게 낙마하게 되고 강민수로 교체되었다.[27] 축구야구와 달리 무승부를 분모에 산입 계산해서, 무승부는 승리로 취급되지 않는다. 물론 상대팀의 승률도 하락시킨다. 자세한 내용은 승률 문서 참조 바람.[28] 축구야구와 달리 무승부를 분모에 산입 계산해서, 무승부는 승리로 취급되지 않는다. 자세한 내용은 승률 문서 참조 바람.[a] 29.1 29.2 29.3 29.4 29.5 29.6 29.7 29.8 29.9 29.10 29.11 29.12 29.13 29.14 29.15 29.16 29.17 29.18 29.19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본선 진출팀[32] 1승 2무, 대회 우승[A] 34.1 34.2 북한은 이 월드컵 지역예선에서 한국 대표팀의 입국을 거부하여 자신들의 홈경기를 모두 제3국인 중국 상하이에서 중립 경기로 치렀다.[39] 이 경기는 선발 명단 교체 제한인 6명을 넘겨 11명 전원을 교체하는 바람에 A매치로 인정받지 못했다.[44] 이 경기에서 패배하기 전까지 28경기 연속 무패행진을 달리면서 한국대표팀 역대 최다 무패기록을 세웠다.[45] 중국 쇼크[47] 2승 1패, 대회 준우승[50] 박지성의 산책 세리모니가 나온 그 경기이다.[56] 최종성적 1승 1무 2패 월드컵 15위[57] 허정무 전 감독은 아시아권에선 4-4-2를 썼지만, 막상 월드 클래스 팀을 상대로는 변형 4-5-1을 썼다. 월드컵 무대에선 제로톱에 가까운 형태였다. 허정무=4-4-2는 무식한 언론의 숫자놀음에 불과하다.[58] 차두리 역시 다음 경기에서 오범석 뺨치는 저질 수비를 선보였고, 염기훈은 네티즌의 비난과 달리 오히려 축구 전문가들 사이에선 높은 평가를 받았다. 염기훈이 공간을 만들지 않았으면 골도 없었을 것이고 수비가담을 활발히하지 않았다면 활동량 적은 기성용쪽이 털렸을것이다.[59] 결국 부상 중인 선수를 불러놓고 쓰지도 못 해 선수의 컨디션만 망치는 결과가 되었다. 애초에 경기에 나설 수 없는 상태이긴 했다만..[60] 2002년 멤버들조차 명백히 주전이라 볼 선수는 박지성, 이영표 두 사람 뿐이었고 준주전이었던 차두리나 사실상 백업이었던 김남일까지 해도 단 넷 뿐이며, 기성용, 이청용, 조용형, 이정수, 김정우, 염기훈, 정성룡 등 주전들의 월드컵 데뷔는 2010년에 이루어졌다. 2002년 이후로 신구조화가 가장 잘 맞았던 팀이었다는 얘기.[61] 다만 최강희 감독은 취임 기자식에서 아시아 예선만 한다는 발언으로 축구협회와 팬들 모두 충격에 빠트리긴 했으나 이는 최강희 감독이 축구협회에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기도 했으며(또는 본인은 정말 하기 싫다라는 생각을 돌려서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최강희 감독은 국대를 누누이 거절해왔음에도 축구협회의 반강제적인 설득과 압력으로 본인도 어쩔 수 없이 맡게 되었으나 일단은 월드컵 본선에 진출에 성공하였고, 그 이후 미련없이 전북 감독으로 다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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