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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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의 화봉요원에 등장하는 가공 인물에 대한 내용은 허임(화봉요원) 문서 참고하십시오.
허임은 전라도 나주목(현 전라남도 나주시)에서 장악원(掌樂院) 악공(樂工)이던 아버지 허억복(許億福)[2]과 사비(私婢)인 어머니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허억복은 본래 강원도 양양도호부에 소속된 관노(官奴) 출신이었고, 어머니는 선조 때 좌의정을 지낸 김귀영(金貴榮) 집안의 사노비였다.#
허임의 7대조는 세종 대의 명재상이었던 '송골매' 허조(許稠)로 알려져 있으며 허씨 가문이 단종 복위 운동과 연루되어 신분이 강등되었다. 허조의 아들 허후(許詡)는 수양대군의 권력 찬탈에 반대하다 교형을 당하고 손자 허조(許慥)는 사육신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기도하다 발각되어 자결했다. 단종 복위 기도에 연루되어 하양 허씨 문경공파 가문의 직계는 사형을 당하고 “백·숙부(伯叔父)와 형제의 자식들은 먼 지방 잔읍(殘邑)의 노비로 영원히 소속시키라”는 명에 따라 허임의 조상도 괴산으로 부처(付處)되어 관노에 편입된 후 몸종 생활을 전전한 것으로 추측된다.
허준이 선조에게 "침술은 자신보다 허임이 낫다"라며 추천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실제로 잘 알고 있는 사이인듯 보인다. 임진왜란 때에는 광해군의 분조와 함께 전장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광해군의 신뢰를 받은듯 싶다. 광해군 시절에 신임을 받아 남원부사에까지 올랐으며 천출이라는 이유로 대신들의 반대가 거듭되었음에도 크게 중용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추방당했지만 허임의 침술은 당대 최고의 수준이었으므로 그를 쫓아낸 인조마저 다시 불러와 침을 맞았고 효과를 보자 인조에게 상을 받았다 말년에는 집필 활동에 힘을 써서 '침구경험방'이라는 서적을 냈는데 당시 중국과 일본에 수출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 책을 청나라에서 표절한 이가 있어 크게 논란이 일었다고 한다.
허임의 7대조는 세종 대의 명재상이었던 '송골매' 허조(許稠)로 알려져 있으며 허씨 가문이 단종 복위 운동과 연루되어 신분이 강등되었다. 허조의 아들 허후(許詡)는 수양대군의 권력 찬탈에 반대하다 교형을 당하고 손자 허조(許慥)는 사육신 등과 함께 단종 복위를 기도하다 발각되어 자결했다. 단종 복위 기도에 연루되어 하양 허씨 문경공파 가문의 직계는 사형을 당하고 “백·숙부(伯叔父)와 형제의 자식들은 먼 지방 잔읍(殘邑)의 노비로 영원히 소속시키라”는 명에 따라 허임의 조상도 괴산으로 부처(付處)되어 관노에 편입된 후 몸종 생활을 전전한 것으로 추측된다.
허준이 선조에게 "침술은 자신보다 허임이 낫다"라며 추천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실제로 잘 알고 있는 사이인듯 보인다. 임진왜란 때에는 광해군의 분조와 함께 전장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광해군의 신뢰를 받은듯 싶다. 광해군 시절에 신임을 받아 남원부사에까지 올랐으며 천출이라는 이유로 대신들의 반대가 거듭되었음에도 크게 중용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추방당했지만 허임의 침술은 당대 최고의 수준이었으므로 그를 쫓아낸 인조마저 다시 불러와 침을 맞았고 효과를 보자 인조에게 상을 받았다 말년에는 집필 활동에 힘을 써서 '침구경험방'이라는 서적을 냈는데 당시 중국과 일본에 수출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 책을 청나라에서 표절한 이가 있어 크게 논란이 일었다고 한다.
- 왕이 불렀음에도 늦게 들어갈 정도로 좋게 보면 배짱이 있었고 나쁘게 보면 괴팍했다. 때문에 사간원에서 허임을 비판하여 벌을 내릴 것을 주청하였으나 뛰어난 침술로 인해 오히려 상여금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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