톈진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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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천진조약(天津條約)
일본어: 天津条約(てんしんじょうやく)
1. 전쟁 비용을 배상할 것.
2. 외교관을 베이징에 주재시킬 것.
3. 외국인의 중국 여행과 무역을 자유롭게 보장할 것.
4. 종교 포교의 자유와 선교사 보호를 할 것.
5. 뉴장, 덩저우, 한커우, 주장, 전장, 타이난, 단수이, 차오저우, 치웅저우, 장닝 등 10개의 항구를 개방할 것.
청나라와 일본 제국이 맺은 조약.
1871년 9월 13일에 조인되었으며 정식 명칭은 청일수호조규(清日修好条規)[1]이다. 일본 측 대표는 다테 무네나리(伊達宗城, 1818 ~ 1892)[2], 청 대표는 이홍장이었다.
일본 측은 이 조약이 청이 서양 국가들과 체결한 조약과 동등한 내용이길 희망했으나, 청은 1860년대 이후 자국에 불리한 조항을 배제하고자 했다. 결국 이 조약은 청이 처음으로 조약 원안을 제시하여 교섭이 진행된 조약이 된다. 조약의 내용은 이렇다.
1. 서로 침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제3국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서로 돕는다.
2. 양국 수도에 대신을 파견해 주재시킨다.
3. 양국 개항장에 서로 영사를 설치해 자국민의 재산에 대한 재판을 담당하게 한다.
4. 형사사건은 그 사건이 발생한 나라의 관리가 체포해 영사와 함께 재판한다.
일본이 원한 최혜국 대우는 거부당했기에 이는 대등한 원칙에 따라 체결되었다. 조약 체결 후 다테 일행은 베이징에 가서 공친왕 혁흔과 면담하는데, 이는 일본 정식 사절이 청의 수도를 방문한 최초의 사례다.
1871년 9월 13일에 조인되었으며 정식 명칭은 청일수호조규(清日修好条規)[1]이다. 일본 측 대표는 다테 무네나리(伊達宗城, 1818 ~ 1892)[2], 청 대표는 이홍장이었다.
일본 측은 이 조약이 청이 서양 국가들과 체결한 조약과 동등한 내용이길 희망했으나, 청은 1860년대 이후 자국에 불리한 조항을 배제하고자 했다. 결국 이 조약은 청이 처음으로 조약 원안을 제시하여 교섭이 진행된 조약이 된다. 조약의 내용은 이렇다.
1. 서로 침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제3국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서로 돕는다.
2. 양국 수도에 대신을 파견해 주재시킨다.
3. 양국 개항장에 서로 영사를 설치해 자국민의 재산에 대한 재판을 담당하게 한다.
4. 형사사건은 그 사건이 발생한 나라의 관리가 체포해 영사와 함께 재판한다.
일본이 원한 최혜국 대우는 거부당했기에 이는 대등한 원칙에 따라 체결되었다. 조약 체결 후 다테 일행은 베이징에 가서 공친왕 혁흔과 면담하는데, 이는 일본 정식 사절이 청의 수도를 방문한 최초의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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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갑신정변 이후 맺어진 청나라와 일본 제국의 조약.
1882년 6월에 발생한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중이었고 특히 청은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3]을 강화하고 있었다.
1884년 청프전쟁이 발발하여 조선에 주둔중인 청군 일부가 철수하게 되었고, 이를 기회로 여긴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 개화파 세력이 일본 공사관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재정과 군사 지원 약속을 받고 우정총국[4]의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급진 개화파세력은 당시 친청세력인 민씨 정권 요인(민영목,민태호 등)을 살해하고, 왕과 왕비를 볼모로 삼아 개화당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이렇게 갑신정변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듯 싶었으나 명성황후 민씨의 모략으로[5] 청군이 국내에 들어오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지원을 약속한 일본군의 소극적인 대처로 결국 청군이 진압하게 된다.
이후 정변을 주도한 급진 개화파들은 죽거나 해외로 망명[6]하게 되고 개화당 정부 수립 3일만에 갑신정변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정변을 진압한 청군의 내정간섭이 더욱 심화되었으며 청과 일본이 1885년 4월 조약을 맺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톈진 조약이다.
1884년 청프전쟁이 발발하여 조선에 주둔중인 청군 일부가 철수하게 되었고, 이를 기회로 여긴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 개화파 세력이 일본 공사관 다케조에 신이치로의 재정과 군사 지원 약속을 받고 우정총국[4]의 개국 축하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급진 개화파세력은 당시 친청세력인 민씨 정권 요인(민영목,민태호 등)을 살해하고, 왕과 왕비를 볼모로 삼아 개화당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이렇게 갑신정변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듯 싶었으나 명성황후 민씨의 모략으로[5] 청군이 국내에 들어오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지원을 약속한 일본군의 소극적인 대처로 결국 청군이 진압하게 된다.
이후 정변을 주도한 급진 개화파들은 죽거나 해외로 망명[6]하게 되고 개화당 정부 수립 3일만에 갑신정변은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정변을 진압한 청군의 내정간섭이 더욱 심화되었으며 청과 일본이 1885년 4월 조약을 맺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톈진 조약이다.
1. 중국은 조선에 주둔하는 군대를 철수하고, 일본국은 조선에서 공사관을 호위하던 군대를 철수한다. 서명하고 날인한 날로부터 4개월 이내에 각기 모든 인원을 철수시킴으로써 양국 간 분쟁이 생겨날 우려를 없애고, 중국은 마산포(馬山浦)를 통하여 철수하고 일본은 인천항을 통하여 철수할 것을 의정(議定)한다.
2. 양국은 조선 국왕이 군사를 훈련시키도록 권고하여 자위와 치안을 유지하게 하고, 조선 국왕이 다른 나라 무관을 1명, 혹은 여러 명을 선발 고용하여 훈련을 위임하게 하되, 이후 중국과 일본 양국은 관원을 파견하여 조선에서 훈련하는 일이 없도록 상호 승인한다.
3. 장래 조선국에 변란이나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 중국과 일본 양국이나 혹은 어떤 한 나라가 파병이 필요할 때는 우선 상대국에 공문을 보내 통지해야 하며, 사건이 진정되면 곧 철수하여 다시 주둔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별 내용없는 조약이지만 조선의 종주권에 대한 규정이 딱히 없어 청의 종주권이 인정되는 셈이었으며 위안스카이 등 청의 영향력 확대에 대해 조선은 한러밀약 같은 타개책을 구상하기도 한다. 그리고 파병 시 상호통보 조항은 1894년 발발한 청일전쟁의 원인이 된다.[7] 1894년 발생한 동학농민운동 농민군이 차례로 조정군을 상대로 승리하게 되고 전주성까지 점령하게 되니, 조정이 청군에게 진압요청을 하게 되어 청군이 조선땅을 밟게 된다. 하지만 초대받지 않은 손님인 일본군 역시 제물포 조약을 근거로 즉각 발효 직후 중에 도중 파기하며 조선에 상륙하게 된다.
사실 일본은 갑신정변 이후로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기 위해 청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청군은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아산만에 상륙하였지만 일본군은 아산만이 아닌 인천에 상륙 후 서울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인천에 상륙한 5월 6일로부터 이틀뒤인 5월 8일. 조정은 '농민군을 진압하였으니 외국군은 철수하라' 는 명분을 위해 농민군과의 전주 화약을 체결했지만 때는 늦어 조선을 노리던 청과 일본 양국이 청일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청은 패배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계기로 더이상 조선에 간섭할 수 없게 된다.[8]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동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할 줄 알았던 일본은 삼국간섭에 의해 한발 물러서게 되는데[9], 후일 앙심을 품은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 바로 러일전쟁이다.
한국사만 공부하는 일반적인 학생은 이 후자만 알면 되지만, 동아시아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위 2개 다 알아야 한다.
사실 일본은 갑신정변 이후로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기 위해 청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청군은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아산만에 상륙하였지만 일본군은 아산만이 아닌 인천에 상륙 후 서울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인천에 상륙한 5월 6일로부터 이틀뒤인 5월 8일. 조정은 '농민군을 진압하였으니 외국군은 철수하라' 는 명분을 위해 농민군과의 전주 화약을 체결했지만 때는 늦어 조선을 노리던 청과 일본 양국이 청일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청은 패배하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계기로 더이상 조선에 간섭할 수 없게 된다.[8]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동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할 줄 알았던 일본은 삼국간섭에 의해 한발 물러서게 되는데[9], 후일 앙심을 품은 일본이 러시아를 상대로 벌이는 전쟁이 바로 러일전쟁이다.
한국사만 공부하는 일반적인 학생은 이 후자만 알면 되지만, 동아시아사를 공부하는 학생들은 위 2개 다 알아야 한다.
Traité de Tien-Tsin
사실 1885년에 맺어진 톈진조약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청불전쟁 이후 청나라와 프랑스 제3공화국이 맺은 조약이다.
이 조약을 통해 베트남 영토 내의 치안을 프랑스가 담당하게 되었으며 청나라 군대는 개입할 수 없게 된다. 베트남에서는 문신층을 중심으로 프랑스에 대한 저항이 일었지만, 진압되어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톈진조약에는 응우옌 왕조와 청조의 종번 관계를 단절한다는 말이 없고 다만 청은 프랑스와 베트남 사이의 조약을 존중하며, 프랑스는 청조의 '위망체면'을 존중한다는 애매한 내용이 들어가 있다.
프랑스의 관심은 베트남과 청의 종번관계를 끊어 베트남을 쉽게 집어삼키는 것 이었고, 청은 베트남이 청의 종속국임을 부인하면 체면이 손상된다고 생각했다. 청불전쟁에서 프랑스는 전반적으로우세했지만 청조 측도 나름 국지전에서 선전했고, 이홍장의 북양해군이 버티고 있었기에 청불전쟁이 프랑스의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톈진조약은 원칙론을 피한 애매한 내용의 조약이 되었다.
사실 1885년에 맺어진 톈진조약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청불전쟁 이후 청나라와 프랑스 제3공화국이 맺은 조약이다.
이 조약을 통해 베트남 영토 내의 치안을 프랑스가 담당하게 되었으며 청나라 군대는 개입할 수 없게 된다. 베트남에서는 문신층을 중심으로 프랑스에 대한 저항이 일었지만, 진압되어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톈진조약에는 응우옌 왕조와 청조의 종번 관계를 단절한다는 말이 없고 다만 청은 프랑스와 베트남 사이의 조약을 존중하며, 프랑스는 청조의 '위망체면'을 존중한다는 애매한 내용이 들어가 있다.
프랑스의 관심은 베트남과 청의 종번관계를 끊어 베트남을 쉽게 집어삼키는 것 이었고, 청은 베트남이 청의 종속국임을 부인하면 체면이 손상된다고 생각했다. 청불전쟁에서 프랑스는 전반적으로우세했지만 청조 측도 나름 국지전에서 선전했고, 이홍장의 북양해군이 버티고 있었기에 청불전쟁이 프랑스의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톈진조약은 원칙론을 피한 애매한 내용의 조약이 되었다.
[1] 일본에서는 일청수호조규(日清修好条規, にっしんしゅうこうじょうき)[2] 이요 우와지마 번(宇和島藩) 마지막 번주으로 다테 마사무네의 먼 후손이다. 이 사람이 대표으로 선정된 이유는 막말시절에 사실상의 좌막파 다이묘이라는 것과 외국인과 자주 접했다는 것과 대장성에 속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3] 묄렌도르프 (외교), 위안스카이 (군사), 마젠창 (재정)[4] 조선 말기 우체업무를 담당하던 관청. 처음으로 근대식 우편제도를 도입한 오늘날의 우체국.[5] 찻잔 밑에 청군을 요청한다는 밀서를 몰래 써 전달 하였다고 한다.[6] 홍영식은 진압 당시 피살되었고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했으나 홍종우에게 상해에서 피살, 박영효, 서광범은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서재필은 미국으로 망명하였다.[7] 물론 일본군의 파병근거로 활용된 것은 제물포 조약이다.[8] 청은 일본에게 배상금, 타이완, 랴오둥 반도를 넘기게 되고 다시는 조선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골자.[9] 러시아를 필두로 한 프랑스, 독일, 러시아 서양 3세력이 일본에게 가한 외교압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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