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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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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료일 : 무기한
사유 : IDC(AS26496)
토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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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근대적 군사 도발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 체결
군란을 제압한 청군 주둔
군란을 이유로 일본공사관 경비 병력 주둔
일본의 지원을 받은 급진개화파의 정변, 청군에 의해 진압
갑신정변으로 입은 피해에 대한 사과 및 배상을 요구하는 일본의 함대 무력 시위. 이로 인한 조선과 일본의 협상
제물포 조약에 의거한 경비 병력 주둔 재확인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일 양국의 논의
파병된 청일 양국 군대 철수 및 향후 조선 출병시 상호 통지
동학 농민 운동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파병 요청, 제물포 조약톈진 조약을 빌미로 일본이 파병
전주 화약 후 조선의 양국 군대 철수 요청
이를 무시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갑오개혁 추진
서해 아산만 풍도에서 일본군이 청군을 기습하며 전쟁 발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반발한 동학의 2차 봉기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상실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압력으로 일본이 요동반도 반환
친일내각의 붕괴와 친러파의 대두
일본이 명성황후 살해 후 친일내각을 재구성 하고 을미개혁 추진, 이에 항거한 을미의병의 발발
고종이 감금돼 있던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
친일 내각 몰락, 친러 내각이 구성되고 근대화 추진과 대한제국 구상
일본제국이 한반도 세력권은 러시아 제국에 포함됨을 공인함.
러일 양국이 각국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을 동의함.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
일본제국과 러시아제국은 조선이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차관을 도입하고자 한다면 합의하에 제공하고, 러시아와 일본에 한반도 내 전신선의 보호권이 있음을 명시. 양국은 한반도에서 소요사태 발생시 군대를 투입할 권한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함.
경운궁으로 환궁했던 고종이 황제에 오르고 제국을 선포, 광무개혁 추진
러시아와 일본 간 협정. 대한제국에 대한 내정 불간섭, 대한제국의 군사적 지원 요청 시 상호협상 없이는 응하지 않을 것, 한일 양국 간 경제적 교류에 대해 러시아가 저해치 않을 것을 약속
일본이 대한제국에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대한제국 중립선언
대한제국은 러·일간 전쟁 시 중립임을 세계 각국에 선언
일본군의 러시아군 기습 공격으로 전쟁 발발. 일본군의 인천, 부산, 마산, 원산 상륙과 서울경운궁 점령
일본군의 대한제국 거점 주둔
대한시설강령 발표
일본의 대한제국 이권 강화
외국인 고문을 두어 일본이 국정에 간섭(고문정치)
한일통신기관협정서
대한제국의 통신 주권 침해
일본의 강요로 친위대 해산, 시위대진위대 감축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종주권, 외교권을 대행할 것을 미국이 승인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정치상⋅군사상⋅경제상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한국 연해 및 내하의 항행에 관한 약정서
대한제국의 연근해 주권 침해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관리, 감독, 보호할 것을 러시아가 승인
을사조약
(제2차 한일협약)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일본인 통감이 외교권 행사(통감정치), 한국의 보호국
을사의병 발발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고종 황제가 이토 히로부미의 협박으로 강제 퇴위, 순종 황제 즉위
정미 7조약
(제3차 한일협약)
일본인 차관의 내정 간섭(차관정치)
부속각서에 대한제국군 해산 명시
시위대 해산을 시작으로 8~9월 진위대 해산
남대문 전투, 정미의병 발발
대한제국의 사법권⋅교도 행정권 박탈, 일본이 대행
한국의 속령
10월 말까지 두달에 걸친 일제의 남한 내 모든 의병 소탕, 항일의병의 만주 이동
조선과 대한제국의 간도영유권 시도 전면 수포화, 일본의 만주 철도부설권 확보
대한제국의 경찰권 박탈, 일본이 대행
대한제국 멸망, 한반도의 식민지화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 (a)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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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개 및 결과3. 영향4. 관련 문서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영어: Triple Intervention
한자: 三國干涉
중국어: 三国干涉还辽
일본어: 三国干渉(さんごくかんしょう)
독일어: Tripel-Intervention
프랑스어: L'intervention tripartite
러시아어: Тройственная интервенция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나라에게서 요동(랴오둥) 반도를 할양받게 되자 러시아 제국독일 제국, 프랑스의 3국이 일본 제국에 외교적 압력을 행사한 사건.

2. 전개 및 결과[편집]

만주로 남하하려는 러시아 제국니콜라이 2세는 그곳에서 일본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1] 칭다오와 산둥 반도에 세력을 갖고 있던 독일 제국빌헬름 2세영일동맹에 반대하는 프랑스를 끌어들여[2]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에서 6일이 지난 1895년 4월 23일 각국 대사들과 함께 일본 외무차관에 외교적 압력을 행사했다.

삼국의 압력에 직면한 일본 정부는 크게 세 가지 방안을 검토했다. 첫 번째는 지금 당장 러시아와 일전을 벌이자는 것이었지만 청일전쟁으로 국력의 소모가 너무 컸기 때문에 이 의견을 지지하는 쪽은 거의 없었다. 두 번째는 곧바로 반납하는 것이었고 세 번째는 회담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었는데 요동을 중국에 돌려주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냥 돌려주면 영 모양새가 안 서니 일단 회담을 연 뒤에 여기서 돌려주는 방식을 채택하자는 주장이 우세했다. 하지만 외상 무쓰 무네미쓰가 "회담을 벌이면 다른 문제가 제기되어 얻은 것도 놓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두 번째 안이 채택되었다.[3] 청일전쟁에서 할양받은 타이완 섬, 펑후 열도와 더불어 하이난 섬을 요동 반도 대신 받으려고 하였으나 너무 멀어서 결국 배상금을 3천만 냥 더 받는 선에서 타협을 봤다.

결과적으로 볼 때 러시아 제국의 압력에 부담을 느낀 일본이 어쩔 수 없이 요동반도를 다시 청나라에 반환한 것이다.

3. 영향[편집]

일본 대중과 일본군은 러시아 제국에 대한 불안감과 함께 반감과 분노를 지니게 되었으며 특히 1898년에 러시아 제국이 일본이 반환한 뤼순(여순)과 다롄(다련)을 조차하여 군항으로 활용하게 되자 분노와 불만은 극에 달했다. 이로 인한 일본의 반러 여론은 결국 러일전쟁의 계기가 되었다.

청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친일 내각을 구성하자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고종명성황후는 일본에 압력을 가하는 러시아에 관심을 가지고 러시아 공사관 베베르를 자주 불러들여 우호적인 외교를 했다.[4]

삼국 간섭 이전부터 러시아와 접촉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이것은 당시까지 조선의 종주국 노릇을 했던 청나라와 빠르게 부상하던 일본 모두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아거일 겸 인아거청이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는 청일전쟁 전까진 적극적으로 고종을 돕기보단 조선의 요구에 직답을 피하고 자신들이 당면한 유럽 문제에 집중하며 조선의 가치를 저울질하던 중이었다.[5]

일본 공사관의 힘이 약해지면서 친일 내각의 힘이 약화되고 김홍집과 박영효가 알력다툼을 한 데다 김홍집이 총리에서 사퇴하여 친일파의 힘이 약화되었다. 이때의 박영효는 친러 성향을 보였고 친러파가 대두했다. 다만 박영효 역시 김홍집과 김윤식, 어윤중 등에 의해 축출당했고 김홍집은 다시 내각 총리가 되었지만 힘은 친러파가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다시 친일로 기울어진 박영효가 역모를 시도한 사건을 계기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이에 이토 내각은 일본에 돌아와 있던 이노우에 가오루 주한 공사를 다시 급파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 외무성의 지원을 받은 한성신보를 통해 고종과 명성황후를 연일 비방하였고 일본군에게 훈련받던 훈련대를 고의로 조선 순검과 충돌시켜 여론을 호도하는 등 명성황후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퇴임한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를 신임 주한공사로 삼아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친러 내각을 친일 내각으로 재구성시켰다.

도전 골든벨 서울 진명여자고등학교 편에서 골든벨 문제로 출제되었는데 답은 프랑스, 독일이었다.

친정부 어용 언론인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도쿠토미 소호는 청년시절 자유민권운동 언론가이자 사상가로서 평민주의를 주장하고 팽창주의를 비판했는데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삼국간섭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다'라고 썼다. 그러나 그는 삼국간섭 이전인 청일전쟁 개시 때부터 언론을 통해 제국주의와 팽창, 대일본주의 이념을 국민들에게 침투시키려고 적극적으로 홍보하였다. 청일전쟁 말에는 대일본팽창론을 통해 요동 뿐만 아니라 산동과 대만을 차지하기 위해 계속 전쟁을 벌여야 된다고 호도하였다.[6]

4. 관련 문서[편집]

5. 둘러보기[편집]

[1]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전 청과 러시아는 청러 비밀 조차 협약을 맺어 일본을 견제하고자 했다.[2] 여기서 러시아는 영국도 끌어들이려고 하였으나 당시 영국은 동아시아에서 러시아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 제국을 밀어주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거절했다. 1902년에 체결된 영일동맹도 러시아의 남하를 제지하기 위한 일이었다.[3] 이때 그는 병으로 요양 중이었기 대문에 이토 히로부미가 찾아가서 의견을 물었다고 한다.[4] 인아거일(引俄拒日). '아라사(羅斯:러시아)를 끌어들이고() 일본(本)을 거부한다()'는 의미.[5] 이때 조선에 우호적이었던 외무성 아시아파 베베르 공사와 고종, 명성 황후간의 접촉을 도와준 것이 당시 고문이었던 묄렌도르프였는데 이 일을 포함해 묄렌도르프가 고종의 대리인으로 다수의 러시아 외교관, 장교들과 접촉했다는 사실이 청나라에 발각되자 이홍장의 노여움을 사 즉시 해임되었다. 일본 역시 고종이 뒤에서 러시아에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조선정책을 더욱 강경하게 재고했다.[6] 박양신. 청일전후 일본 지식인들의 대외인식론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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