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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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세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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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
사망 | |
본관 | |
자 / 호 | 치현(穉顯) / 산재(山齊) |
묘소 | |
종교 | |
상훈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
부모 | |
형제자매 | 남동생 - 조병창(趙秉昌) |
부인 | 광산 김씨 - 김준현(金準鉉, 1793 ~ ?)의 딸 |
자녀 |
양주 조씨로 음서로 참봉에 임명되었다가 32살의 조금 늦은 나이에 1859년(철종 10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관(史官)이 되고 1864년(고종 1년) 실록청 도청 낭청으로서 《철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흥선대원군이 실각하면서 조씨가 본격적으로 기용될 때 1874년 함경도 암행어사, 1877년 대사헌에 승진되었고 이어 의주부윤, 다시 대사헌, 1887년 공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예조·이조판서, 1889년 한성판윤(서울시장)을 지내고 그해 우의정에 올랐다. 1893년 좌의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정계를 떠나 경기도 가평에 은거하였다.[3]
1896년 폐정개혁을 위하여 시무(時務) 19조를 상소하였고, 1898년 중추원의장(中樞院議長)과 의정대신(총리대신)을 역임하였다. 이때 독립협회의 주된 표적이었다. 그래서 국왕의 고문인 특진관(特進官)에 임명되었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1900년 다시 입궐하여 국정개혁을 건의하였다.
1905년 10월 을사조약 체결 이후 78세의 노구[4]를 이끌고 상소를 올리고 고종을 알현하려 했으나 저지당한다. 이후 민영환 등의 관리들과 함께 백관을 이끌고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시위를 했으나 강제 해산, 연금당했고 다시 풀려나자 대한문 앞에서 시위를 했으며, 다시 쫓겨나자 민영환이 소두(상소의 우두머리), 그렇게 여러차례 규탄 시위를 벌였다. 최후에 유서를 남기고 마지막 상경을 하여 일본군이 쫓아내자 가마에서 음독 자결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실각하면서 조씨가 본격적으로 기용될 때 1874년 함경도 암행어사, 1877년 대사헌에 승진되었고 이어 의주부윤, 다시 대사헌, 1887년 공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예조·이조판서, 1889년 한성판윤(서울시장)을 지내고 그해 우의정에 올랐다. 1893년 좌의정이 되었으나 이듬해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정계를 떠나 경기도 가평에 은거하였다.[3]
1896년 폐정개혁을 위하여 시무(時務) 19조를 상소하였고, 1898년 중추원의장(中樞院議長)과 의정대신(총리대신)을 역임하였다. 이때 독립협회의 주된 표적이었다. 그래서 국왕의 고문인 특진관(特進官)에 임명되었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1900년 다시 입궐하여 국정개혁을 건의하였다.
1905년 10월 을사조약 체결 이후 78세의 노구[4]를 이끌고 상소를 올리고 고종을 알현하려 했으나 저지당한다. 이후 민영환 등의 관리들과 함께 백관을 이끌고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시위를 했으나 강제 해산, 연금당했고 다시 풀려나자 대한문 앞에서 시위를 했으며, 다시 쫓겨나자 민영환이 소두(상소의 우두머리), 그렇게 여러차례 규탄 시위를 벌였다. 최후에 유서를 남기고 마지막 상경을 하여 일본군이 쫓아내자 가마에서 음독 자결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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