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남호(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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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직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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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아내 윤병태, 슬하 1남 2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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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경기도 경성부 가회정(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계동) 에서 태어났다. 이후 재동초등학교, 중앙중학교,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여 1961년 졸업했다. 원래는 고시를 준비했지만, 졸업 직후 KBS 프로듀서직 시험에 합격을 하여 방송인이 되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첫 출근하는 날에 바로 방송국에서 쫓겨났다. 첫 출근일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1961년 5월 16일이었던 것.[4] 한 달 후에야 겨우 출근을 할 수 있었고, 1960년대 초반 임택근 아나운서가 진행해 인기를 끌었던 프로그램 '퀴즈열차'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첫 출근하는 날에 바로 방송국에서 쫓겨났다. 첫 출근일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1961년 5월 16일이었던 것.[4] 한 달 후에야 겨우 출근을 할 수 있었고, 1960년대 초반 임택근 아나운서가 진행해 인기를 끌었던 프로그램 '퀴즈열차'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서울시 공보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권교체가 되면서 회사 고참들이 다 회사를 떠나게 되니까 가끔 최고위원회에 가는 일이 생겼는데, 최고위원회에 있던 학교 선배가 "서울시장실에서 공보비서가 필요하다"고 하며 거기로 가라고 한 것. 그래서 잠깐 가서 일한다는 것이 1년 반이 지났고, 방송으로 복귀하려는데 여러 가지 사정이 발생해서 결국 서울시청에 눌러 앉고 말았다.
그 후 서울시 보건사회국장, 환경녹지국장, 마포구·동작구·성동구·서초구 임명직 구청장을 지냈다. 서울시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1982년 서울올림픽 실무유치단에 근무했고, 서울시가 장애인을 공무원으로 채용하는 계기가 됐던 1986년의 ‘장애인 돕기 백만인 걷기’ 행사를 치러내기도 했다.
1995년 우리나라에 지방자치제가 도입되어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되자 민선 1기 서초구청장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민선 구청장으로 취임하면서 제일 먼저 내건 구호는 공무원들의 백화점 직원 같은 친절이었다.[5]
그 후 서울시 보건사회국장, 환경녹지국장, 마포구·동작구·성동구·서초구 임명직 구청장을 지냈다. 서울시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1982년 서울올림픽 실무유치단에 근무했고, 서울시가 장애인을 공무원으로 채용하는 계기가 됐던 1986년의 ‘장애인 돕기 백만인 걷기’ 행사를 치러내기도 했다.
1995년 우리나라에 지방자치제가 도입되어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되자 민선 1기 서초구청장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민선 구청장으로 취임하면서 제일 먼저 내건 구호는 공무원들의 백화점 직원 같은 친절이었다.[5]
민선 1기 서초구청장에 취임하기 이틀 전에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발생해 백화점 붕괴사고 수습에 직면하였다.
백화점 지하1층 매장에 대한 용도변경 승인을 최종 결재했다는 이유로 사고 원인의 제공자[6] 중 1인으로 지목되기도 했으나, 용도변경 승인은 서울시의 사전 내인가에 따라 이뤄져 행정절차상 하자가 없었으며, 이 과정에서 삼풍 측이 조남호 구청장에게 뇌물을 전달한 혐의도 없었기에 조남호 구청장은 1995년 7월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7]
그러나 법적인 부분에서만 깔끔하게 무혐의가 되었을 뿐이지, 조남호가 백화점 용도변경 승인 여부와 관련한 조사를 받았다는 것 자체만으로 유가족들은 조남호 역시 백화점 붕괴사고의 공범이라고 단정지어 분노했고, 1995년 7월 29일 희생자 위령제에서 조남호가 분향을 하던 중 유족인 어떤 할머니가 조남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오열했고, 적당히 달래드린 후 자리로 돌아가려다 함께 참석한 삼풍백화점 유족들의 낌새가 심상치 않아서 도중에 위령제 현장을 나가려고 했지만 유가족에게 외투와 팔다리를 잡혀 나가는 것에 실패하고 외투가 벗겨지는 것은 물론 셔츠와 면티도 찢어지는 참사를 당하고 말았다. 구청 직원들이 유가족들을 제지해 봤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고 상의가 다 뜯겨 반나체에 가까운 몰골로 위령제 현장을 빠져나왔지만 이내 뒤따라온 유가족 30여 명에게 10여분간 집단 폭행을 당했고, 아무 차나 얻어 타고 유가족들에게서 도망가려 했으나 유가족들은 길을 막고 앞 유리창과 뒷 유리창마저 깨 버렸다. 이때의 폭행으로 인해 안경이 파손되고 실명까지 걱정해야 할 정도로 두 눈을 심하게 다쳐 약 2주간 집중적인 입원 치료를 받았으며, 병원 면회조차 조남호에게 사전에 허락받은 사람이 아니면 철저히 면회를 막았으나 기어이 조남호를 죽이겠다고 병원에서 깽판 친 유가족들도 있었다. 정작 삼풍백화점의 부실공사를 지시하고 담당 공무원에게 뇌물을 뿌린 이준 회장이랑 삼풍백화점의 부실 관리에 기여한 아들 이한상, 삼풍 측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심수섭 도시정비국장, 이충우 구청장 등의 공무원들은 어떤 폭행도 당하지 않았음에도[8] 취임 이틀 전에 터진 붕괴사고를 수습하고 공식적으로 무혐의, 무죄 판결을 받은 조남호는 유가족들의 심기를 돋구는 위령제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목숨까지 위협받을 정도의 심한 폭행을 당했으며 KBS 뉴스 9를 진행하던 류근찬 앵커는 "이런 일은 폭력으로 해결될 수 없는 일"이라며 조남호를 폭행한 유가족들을 비판했다. 폭행한 유가족 가운데 3명은 구속수사를 받았으나, 조남호가 "유족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며 선처를 호소하여 풀려났다. # 정작 조남호를 폭행하는 데 주도적이었거나 가담했던 유가족들은 단 한 명도 조남호에게 그 어떠한 사과도 하지 않았다.
당시 위령제에는 김덕룡 국회의원, 이해찬 서울시 정부부시장도 참석했으나, 이들은 조남호와 달리 폭행 당하지 않았다.
백화점 지하1층 매장에 대한 용도변경 승인을 최종 결재했다는 이유로 사고 원인의 제공자[6] 중 1인으로 지목되기도 했으나, 용도변경 승인은 서울시의 사전 내인가에 따라 이뤄져 행정절차상 하자가 없었으며, 이 과정에서 삼풍 측이 조남호 구청장에게 뇌물을 전달한 혐의도 없었기에 조남호 구청장은 1995년 7월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7]
그러나 법적인 부분에서만 깔끔하게 무혐의가 되었을 뿐이지, 조남호가 백화점 용도변경 승인 여부와 관련한 조사를 받았다는 것 자체만으로 유가족들은 조남호 역시 백화점 붕괴사고의 공범이라고 단정지어 분노했고, 1995년 7월 29일 희생자 위령제에서 조남호가 분향을 하던 중 유족인 어떤 할머니가 조남호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오열했고, 적당히 달래드린 후 자리로 돌아가려다 함께 참석한 삼풍백화점 유족들의 낌새가 심상치 않아서 도중에 위령제 현장을 나가려고 했지만 유가족에게 외투와 팔다리를 잡혀 나가는 것에 실패하고 외투가 벗겨지는 것은 물론 셔츠와 면티도 찢어지는 참사를 당하고 말았다. 구청 직원들이 유가족들을 제지해 봤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고 상의가 다 뜯겨 반나체에 가까운 몰골로 위령제 현장을 빠져나왔지만 이내 뒤따라온 유가족 30여 명에게 10여분간 집단 폭행을 당했고, 아무 차나 얻어 타고 유가족들에게서 도망가려 했으나 유가족들은 길을 막고 앞 유리창과 뒷 유리창마저 깨 버렸다. 이때의 폭행으로 인해 안경이 파손되고 실명까지 걱정해야 할 정도로 두 눈을 심하게 다쳐 약 2주간 집중적인 입원 치료를 받았으며, 병원 면회조차 조남호에게 사전에 허락받은 사람이 아니면 철저히 면회를 막았으나 기어이 조남호를 죽이겠다고 병원에서 깽판 친 유가족들도 있었다. 정작 삼풍백화점의 부실공사를 지시하고 담당 공무원에게 뇌물을 뿌린 이준 회장이랑 삼풍백화점의 부실 관리에 기여한 아들 이한상, 삼풍 측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심수섭 도시정비국장, 이충우 구청장 등의 공무원들은 어떤 폭행도 당하지 않았음에도[8] 취임 이틀 전에 터진 붕괴사고를 수습하고 공식적으로 무혐의, 무죄 판결을 받은 조남호는 유가족들의 심기를 돋구는 위령제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목숨까지 위협받을 정도의 심한 폭행을 당했으며 KBS 뉴스 9를 진행하던 류근찬 앵커는 "이런 일은 폭력으로 해결될 수 없는 일"이라며 조남호를 폭행한 유가족들을 비판했다. 폭행한 유가족 가운데 3명은 구속수사를 받았으나, 조남호가 "유족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며 선처를 호소하여 풀려났다. # 정작 조남호를 폭행하는 데 주도적이었거나 가담했던 유가족들은 단 한 명도 조남호에게 그 어떠한 사과도 하지 않았다.
당시 위령제에는 김덕룡 국회의원, 이해찬 서울시 정부부시장도 참석했으나, 이들은 조남호와 달리 폭행 당하지 않았다.
1997년에는 전국 최초의 장애인전용치과를 서초보건소내에 개설했다. 장애아 치과치료는 개인병원에서 할 수 없을 정도의 장비와 비용이 필요하여[9] 일반 치과병원에서 외면당하기 십상인데,[10] 부모들은 통증을 호소하는 아이들을 보다못해 진통제로 달래야 했고, 결국엔 치료도 받기 전에 이가 썩어 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에 1997년 9월 몇몇 뜻있는 의사들은 이런 어려움을 조 구청장에게 호소했고, 중앙보건행정도 관심을 갖지 못한 이 사업을 일개 구청에서 시작해 결실을 이뤄나갔다. 그 뒤에는 청각장애인의 귀와 입을 열어주는 인공와우 시술 서비스를 시작하기도 했다.
1997년 10월에는 중복 장애인 특수학교인 다니엘학교를 서초구로 유치했다. 보통 그런 시설은 지역에서 기피하게 마련인데 해당 지역의 주민들을 설득해서 유치하였다.[11]
그 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도 서초구청장으로 당선되었다. 재직시절 추진하는 사업마다 `전국최초`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1998년 민선2기 서초구청장에 당선된 후, 1999년 전국 최초로 관내 731명의 통·반장을 완전무급제로 전환해 전국적으로 화제가 됐다.# 그 외에 언덕의 옆면을 파서 만든 반포1동 ‘방음형언덕 주차장’, ‘범죄 예방을 위한 가로등 밝기 2배로 하기’, ‘보건소 야간진료’ 등의 사업도 그가 발상을 바꿔 이뤄낸 것들이었다.#
녹지 보존을 위해 힘 쓰기도 했다. 서초구는 전체 면적에서 녹지대가 50%를 넘게 차지할 정도로 녹지대가 많은 곳이었는데, 재직 시절 서초구내 녹지대를 개발하는 대신에 이곳을 환경친화적인 공원들로 가꿨다. 이로써 잘 꾸며진 청계산, 우면산, 구룡산은 휴일이면 10만의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됐다. 사람 손을 많이 타면 때를 탈 법도 하련만, 산에 가서 휴지줍기 좋아하는 김영삼 전 대통령조차 “청계산 오니 휴지 하나 찾기 어렵다”며 즐거운 실망을 할 정도가 됐다.
마지막 임기에는 우면산의 개발을 막기 위해 '우면산 트러스트 운동'을 시작했다. '서울 남부의 허파'로 불리던 우면산 녹지[12]를 각종 개발로부터 지키기 위해 주민들이 돈을 모아 땅을 사들이자고 한 것.# 그 결실로 운동 시작 3년 만인 2006년 3월 우면산 초입 토지 980여 평[13]을 소유주인 GS칼텍스에게서 45억 원[14]에 매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우면산 일대가 GS칼텍스에 의해 석유저장 및 송유시설로 이용되는 것을 막았다.
2006년 서초구청장직에서 3선 연임을 마친 후 2008년 국회의원 총선에 한나라당 서초구 을 국회의원 후보로 공천을 신청했으나 컷오프되었다. 이에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를 감행하였으나 한나라당 고승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7년 10월에는 중복 장애인 특수학교인 다니엘학교를 서초구로 유치했다. 보통 그런 시설은 지역에서 기피하게 마련인데 해당 지역의 주민들을 설득해서 유치하였다.[11]
그 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와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도 서초구청장으로 당선되었다. 재직시절 추진하는 사업마다 `전국최초`라는 수식어를 얻었다. 1998년 민선2기 서초구청장에 당선된 후, 1999년 전국 최초로 관내 731명의 통·반장을 완전무급제로 전환해 전국적으로 화제가 됐다.# 그 외에 언덕의 옆면을 파서 만든 반포1동 ‘방음형언덕 주차장’, ‘범죄 예방을 위한 가로등 밝기 2배로 하기’, ‘보건소 야간진료’ 등의 사업도 그가 발상을 바꿔 이뤄낸 것들이었다.#
녹지 보존을 위해 힘 쓰기도 했다. 서초구는 전체 면적에서 녹지대가 50%를 넘게 차지할 정도로 녹지대가 많은 곳이었는데, 재직 시절 서초구내 녹지대를 개발하는 대신에 이곳을 환경친화적인 공원들로 가꿨다. 이로써 잘 꾸며진 청계산, 우면산, 구룡산은 휴일이면 10만의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됐다. 사람 손을 많이 타면 때를 탈 법도 하련만, 산에 가서 휴지줍기 좋아하는 김영삼 전 대통령조차 “청계산 오니 휴지 하나 찾기 어렵다”며 즐거운 실망을 할 정도가 됐다.
마지막 임기에는 우면산의 개발을 막기 위해 '우면산 트러스트 운동'을 시작했다. '서울 남부의 허파'로 불리던 우면산 녹지[12]를 각종 개발로부터 지키기 위해 주민들이 돈을 모아 땅을 사들이자고 한 것.# 그 결실로 운동 시작 3년 만인 2006년 3월 우면산 초입 토지 980여 평[13]을 소유주인 GS칼텍스에게서 45억 원[14]에 매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우면산 일대가 GS칼텍스에 의해 석유저장 및 송유시설로 이용되는 것을 막았다.
2006년 서초구청장직에서 3선 연임을 마친 후 2008년 국회의원 총선에 한나라당 서초구 을 국회의원 후보로 공천을 신청했으나 컷오프되었다. 이에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를 감행하였으나 한나라당 고승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로는 사실상 정계를 은퇴하였다가 2024년 4월 15일 향년 86세로 사망했다. 삼풍백화점 유가족에게 목숨을 잃을 뻔 한지 28년 8개월 만이었다.
[1] 석사 학위 논문 : 一線 行政機關의 合理的運營에 關한 硏究 : 서울特別市 洞行政을 中心으로[2] 박사 학위 논문 : 지방자치단체 자원봉사 프로그램에의 주민참여 연구 : 서초구 자원봉사 프로그램을 중심으로[3] 現 공공정책대학원[4]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것도 모르고 당시 남산에 있는 KBS로 출근을 하는데 회사에 미처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쫓겨났다고 한다.[5] 정작 본인의 취임 이틀 전 그 유명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터졌고 그 한 달 후에는 삼풍백화점 위령제 중 삼풍백화점 희생자 유가족한테 집단구타를 당해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이러니다. [6] 백화점 붕괴사고는 백화점 4층에서부터 옥상부근까지의 전단파괴 현상에 의한 것이었는데, 전단파괴현상을 직접 유발한 것은 물론 과하중이었지만, 지하 1층의 부실화도 사고 원인의 하나였다는 것.[7] 물론 조 구청장 재직 시절 도시정비국장이었던 심수섭(현 도시정비 국장) 등 당시 용도변경 승인을 담당했던 공무원 5명은 삼풍측으로부터 20만원 ~ 150만원의 금품을 받았기 때문에 이들은 모두 뇌물수수혐의로 입건 기소되었다.[8] 물론 이들을 폭행하는 것 역시 엄연한 사적제재이다.[9] 몇 분(分) 안 되는 시술이지만 그 시술을 위해 장애아들을 달래야 하고 특수제작된 의자에 앉혀야 한다. 안전을 위한 결박장치와 마취까지 해야하고 치료를 위해 필요한 간호사만 해도 5~6명에 달할 정도다.[10] 장애인 치과치료는 일반인 치과치료의 몇 배에 달하지만 의료보험이 적용돼 실제 진료비는 2,000원에도 못 미치기 때문. 게다가 장애인용 치과시설을 갖춘 병원은 얼마 되지 않고 이런 시설을 갖추고 있는 종합병원에서는 예약이 밀려 6개월 이상을 기다려야한다.[11] 다니엘학교는 원래 성동구 관내인 워커힐 호텔 부근에 있었다. 그런데 1995년에 다니엘학교는 서초구 관내인 헌인마을에 땅을 구입해 이전하려고 했지만 주민들의 반대가 거셌다. 이에 조남호 구청장이 직접 헌인마을 주민을 설득하여 헌인마을 주민 전원 찬성으로 학교 이전이 성사되었다.[12] 당시 총면적 155만 평 가운데 88%인 136만 평이 사유지였다.[13] 예술의전당~서초나들목 사이에 있는 땅으로 우면산 자락 가운데 개발 압력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곳 중에 하나였다.[14] 이 가운데 17억 원은 구청이 출연했고, 주민 1만 8천명의 참여로 14억 원을 더 모았다. 거기에 땅 소유주인 GS칼텍스가 트러스트운동의 취지에 동참해 12억 6천만 원을 내놓음으로써 거래가 성사됐다.[15] 통합민주당과 신설 합당[16] 총선 공천 불복으로 인한 탈당[17] 새로운보수당, 미래를향한전진4.0과 신설 합당[18] 4번의 선거 중 첫 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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