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봉욱
최근 수정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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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임한 보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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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육군 제20대 육군훈련소장 정봉욱 鄭鳳旭 | Jeong Bonguk | |
출생 | |
사망 | |
경력 | 비상기획위원회 부위원장 |
군사 경력 | |
임관 | 평양군관학교 (조선인민군) |
특별임관 (대한민국 국군) | |
복무 | |
최종 계급 | 소장 (대한민국 육군) |
최종 보직 | |
주요 보직 |
일본령 조선 황해도 안악군에서 출생하였다. 이후 북한에서 평양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군인으로 길을 걸었다. 한국전쟁 때 북한군으로 참전하였고, 당시 신분은 조선인민군 육군 포병대 중좌였다. 그의 인생은 1950년 다부동 전투에서 국군에 투항하면서, 좋은 의미로 뒤바뀌게 되었다.
6.25 당시 투항하는 정봉욱 중좌 |
정봉욱은 다부동 전투 때, 상관의 명령에 따르게 되면 자신의 부대원들이 의미 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을 예상하고 항명하였다. 이때 정봉욱에게 남은 선택은 투항하거나 항명죄로 사형당하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 자신의 보좌관과 둘이서 투항하고 작전 지도를 대한민국 육군에 넘겨주어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투항 후 특별임관을 하여, 대한민국 육군 중령으로 군인생활을 이어가게 되었다.[1][2] 인민군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던 정봉욱은 여러가지 전공을 세우며 승승장구하였고, 1961년 5.16 군사정변에 참여하면서 1965년 대한민국 육군 사단장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제7보병사단, 즉 칠성부대의 18대 사단장(1965.7.24~1967.7.15)으로 복무했으며 7사단장 시절인 1967년 4월 12일 7사단 예하 GP인 205GP가 3개 침투조 60여명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포병을 동원해 북한군을 응징한 바 있다.# 이 사건은 제3보병사단인 백골부대 박정인 장군의 1973년에 있었던 3.7포격사건보다 먼저 일어났던 일이다.[3]
이후 1968년 신설된 육군3사관학교의 초대 교장을 맡았다. 군인으로서 청백리와 같은 매우 청렴한 삶을 살았다고 평가받는다. 1970년 육군훈련소장에 임명되어 시절 부대 내 비리를 척결하고, 훈련 중심의 부대로 변화시켰다는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1973년 소장 예편 후 1978년까지 비상기획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평생을 공산주의에 반대하여 완고한 반공 성향을 드러냈으며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선 가진 자들이 더 베풀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2018년 3월 9일 별세,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장례식 사진
2000년 4월 10일 TV 내무반 신고합니다 육군3사관학교 편에 출연했었다. #
이후 1968년 신설된 육군3사관학교의 초대 교장을 맡았다. 군인으로서 청백리와 같은 매우 청렴한 삶을 살았다고 평가받는다. 1970년 육군훈련소장에 임명되어 시절 부대 내 비리를 척결하고, 훈련 중심의 부대로 변화시켰다는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1973년 소장 예편 후 1978년까지 비상기획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평생을 공산주의에 반대하여 완고한 반공 성향을 드러냈으며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선 가진 자들이 더 베풀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2018년 3월 9일 별세,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장례식 사진
2000년 4월 10일 TV 내무반 신고합니다 육군3사관학교 편에 출연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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