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악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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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방군(帶方郡) 함자현(含資縣)이었고 고구려 시대에는 아사달이라고 불렸다.
안악 1,2,3호 고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던 곳으로 보인다. 안타깝게도 이들 고분은 완전히 도굴당하여 유골과 부장품이 없는 관계로 주인을 알 수 없다. 주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미천왕과 고국원왕 항목 참조.[1]
통일신라에서 한산주에 소속시키고 고을 이름을 양악(楊岳)이라 이름붙였다.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황해도 안악군이 되었다. 구한말에는 신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진취적인 고장으로, 도산 안창호는 "우리 강토 13도마다 안악 같은 고을이 하나씩만 생겨도 이 나라의 문명은 10년 안에 일본을 따라잡게 될 것"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11년 안악 사건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광복 후 국토가 분단되면서 북한 땅이 되었다. 1952년에 북한이 행정구역 개편을 하면서 북부 5면(은홍면, 대행면, 서하면, 안곡면, 용문면)을 분리해 은천군을 신설한 대신, 신천군의 북부 3면(용진면, 산천면, 노월면)을 편입하면서 군 자체가 남쪽으로 이동한 모양새가 되었다.
치하포 사건의 무대라고 한다.
안악 1,2,3호 고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던 곳으로 보인다. 안타깝게도 이들 고분은 완전히 도굴당하여 유골과 부장품이 없는 관계로 주인을 알 수 없다. 주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미천왕과 고국원왕 항목 참조.[1]
통일신라에서 한산주에 소속시키고 고을 이름을 양악(楊岳)이라 이름붙였다.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황해도 안악군이 되었다. 구한말에는 신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진취적인 고장으로, 도산 안창호는 "우리 강토 13도마다 안악 같은 고을이 하나씩만 생겨도 이 나라의 문명은 10년 안에 일본을 따라잡게 될 것"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1911년 안악 사건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광복 후 국토가 분단되면서 북한 땅이 되었다. 1952년에 북한이 행정구역 개편을 하면서 북부 5면(은홍면, 대행면, 서하면, 안곡면, 용문면)을 분리해 은천군을 신설한 대신, 신천군의 북부 3면(용진면, 산천면, 노월면)을 편입하면서 군 자체가 남쪽으로 이동한 모양새가 되었다.
치하포 사건의 무대라고 한다.
군청 소재지 | 안악읍 소천리 | ||
상위 행정구역 | |||
하위 행정구역 | |||
면적 | 851㎢ | ||
인구 | 109,926명[4] | ||
인구밀도 | 129.17/㎢ | ||
명예시장 | 류순식 | ||
명예동장 | 9석 | ||
홈페이지 |
- 안악읍(安岳邑)
- 관할 리: 비석(碑石), 남암(南巖), 남정(南井), 사현(沙峴), 서산(瑞山), 소천(小川), 수삼(壽三), 신장(新長), 어은(漁隱), 연곡(燃谷), 용석(龍石), 유성(柳城), 차신(車新), 판오(板五), 판육(板六), 판칠(板七), 판팔(板八), 평정(坪井), 해창(海倉), 훈련(訓鍊)
- 비석리에 읍사무소, 소천리에 군청이 있었다. 읍의 진산인 양산(楊山, 379m)에는 1258년 창건된 고정사(高井寺)가 있다. 또 읍 서남쪽에는 남산(176m)이 있다.
- 대원면(大遠面)
- 관할 리: 덕산(德山), 가양(可陽), 굴륭(屈隆), 당오(堂梧), 당전(堂田), 망암(望巖), 복사(伏獅), 봉성(鳳城), 상산(上山), 송산(松山), 엄곶(嚴串), 원룡(元龍), 월암(月巖), 하금(下金)
- 대행면(大杏面)
- 관할 리: 한봉(鷳峰), 광풍(光楓), 굴산(屈山), 생근(生芹), 석운(石雲), 송당(松堂), 월촌(月村), 저도(猪島)[5], 적둔(滴屯), 창운(倉雲), 추산(楸山), 풍곡(楓谷)
- 면 남쪽 산지에는 월촌저수지, 운봉저수지가 있다. 운봉저수지는 은홍면과의 사이에 있다.
- 문산면(文山面)
- 관할 리: 금강(金岡), 감문(甘門), 상당(上堂), 송간(松間), 신당(新唐), 신촌(新村), 안랑(安浪), 원성(遠城), 유성(楡城)
- 서하면(西河面)
- 관할 리: 초정(椒井), 덕일(德日), 매천(梅泉), 복두(卜頭), 상보(上保), 상요(上要), 상촌(上村), 신장(新長), 중기(中基), 중도(中島)
- 초정리에 16세기부터 알려진 초정약수(안악초정)가 있다.
- 안곡면(安谷面)
- 관할 리: 학포(鶴浦), 금정(金亭), 낙암(洛巖), 당석(堂石), 동양(東陽), 동파(東波), 만월(萬月), 봉곡(鳳谷), 북삼(北三), 상룡(上龍), 상사(上寺), 신덕(新德), 용천(龍泉), 장월(長月), 제중(濟中), 중하(中下), 학산(鶴山)
- 용문면(龍門面)
- 관할 리: 동창(東倉), 덕학(德鶴), 매화(玫花)[6], 상덕(上德), 상무(上茂), 석양(石陽), 송곡(松谷), 신오(新梧), 용운(龍雲)
- 용순면(龍順面)
- 관할 리: 유설(柳雪), 가정(柯亭), 노암(路巖), 신곡(新谷), 신율(新栗), 옥정(玉井), 유순(兪順), 장산(長山)
- 안악읍과 접한 북쪽 지대를 제외하면 전 지역이 재령평야 지대이다. 유순리에 안악 3호분이 있다.
- 은홍면(銀紅面)
- 관할 리: 온정(溫井), 광석(廣石), 내평(內坪), 두양(斗陽), 매석(梅石), 보광(寶光), 상홍(上紅), 신창(新倉), 약봉(藥烽), 용덕(龍德), 운봉(雲鳳), 원봉(院鳳), 청천(淸川), 학산(鶴山)
- 동북단 운봉저수지는 대행면과의 사이에 있다.
[1] 다만 남한학계에서는 3호분의 경우 동수의 묘로 거의 확실시하는 분위기이다. 애초에 딴거 떠나서 국내성에서 500km 떨어진, 그것도 갓 확보한 영토인 안악에다 왕릉을 지을 이유가 없다. 조선으로 치면 조선왕릉을 함경북도에다 설치한거나 마찬가지다...[2] 북한 행정구역상으로는 안악군이 아닌 은천군[3] 조선 정부에서 공식으로 편찬한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 '양규는 안악군 사람'이라고 못박고 있다.[4] 1944년 인구총조사[5] 원래는 말 그대로 섬이었으나, 1930년대 초에 간척되어 육지화됐다.[6] 가톨릭 신앙촌이었다. 위 지도도 그렇고 문헌에 따라 민화(玟花)라고도 잘못 적혀 있는데 이는 옥돌 민(玟)과 매괴 매(玫)가 매우 비슷한데서 오는 착오로, 충북 음성군 감곡 매괴 성모순례지의 매괴(玫瑰)와 같은 한자다. 가톨릭대사전이나 가톨릭계 언론도 이 곳에 있는 본당 이름을 매화동본당(玫花洞本堂)이라 적고 있다. 아무튼 이 이름은 묵주('매괴'가 묵주의 옛말이다)에서 유래한 것#이고, 황해도 최초의 본당이 1896년에 일개 마을인 이 곳에 세워졌을 정도. 북한이 끔찍히도 싫어하는 가톨릭 유래의 지명임에도 의외로 없어지거나 개명되지 않은채 은천군의 리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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