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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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오나라의 인물에 대한 내용은 장패(손오)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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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구(奴寇) 臧霸 장패 | |
위후(威侯) | |
열후(列侯)→도정후(都亭侯)→무안향후(武安鄕侯)→개양후(開陽侯)→양성후(良成侯) | |
집금오(執金吾) 겸 위특진(位特進) 겸 행태위사(行 太尉事) | |
장(臧) | |
패(霸) | |
선고(宣高) | |
아버지 | 장계(臧戒) |
생몰기간 | ?년 ~ ?년 |
고향 | |
태위대리 재임기간 | 230년 8월 ~ ?년 |
18살 때 태산군 화현의 옥리로 있었던 장패의 아버지 장계(臧戒)가 태수의 죄수들을 사사로이 처형하라는 명을 거역하자 태수는 그를 체포해 호송하였는데 장패가 동료들과 함께 산길에서 습격하여 부친을 구해낸 것으로 무용담이 널리 퍼진다.
그렇게 한 뒤 서주 동해국으로 망명했는데,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그 용맹함을 높게 산 서주목 도겸에게 초빙되어 황건적을 격파하는 공적을 세우고 기도위에 임명된다. 이후 동료인 손관, 오돈, 윤례, 창희 등과 군사를 모아 서주 낭야국 개양현에 주둔했으며 태산의 산맥지대에 근거해 독자 세력화한다.
이후 여포가 서주를 점거하자 장패는 여포의 휘하로 들어갔다.[2]
동해 사람 소건이 낭야상이 되어 서주 낭야국 거현에 치소로 삼아 성을 보전해 스스로 지키면서 여포와 통하지 않았는데, 여포가 서신을 보내 투항을 권하자 소건은 주부를 보내 서신을 지니고 가게 하면서 좋은 말 5필을 바치자, 장패는 소건을 격파하고 군수물자를 노략질했다. 여포가 그 일을 듣고 분개해 장패를 공격했는데, 장패는 여포의 노략질을 두려워하여 과연 성 위에서 맞서자 끝내 여포는 함락하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고 그 후에 다시 화해했다.
조조가 쳐들어왔을 때 여포를 지원했다가 여포가 조조에게 패해 죽자 후환이 두려워 잠적했지만, 조조는 장패의 행방을 수색하는 한편 장패를 부르기도 하면서 기어이 장패를 찾아낸다.
애초에 조조는 장패를 죽일 생각은 없었는지 장패를 직접 만나게 되자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우두머리 격이었던 장패가 손관, 오돈, 윤례, 창희 등을 모두 불러들이게 했으며, 장패를 낭야상으로 임명하는 한편 청주와 서주를 감독하게 했고, 나머지도 제각기 태수로 임명하며 장패의 지휘를 받도록 한다.
물론 별도로 자사를 임명해 장패를 감독하는 형태를 취하긴 했지만, 이는 독자적인 군벌을 형성하고 있던 장패의 세력권을 중앙 정부의 권위를 통해 합법적인 형식으로 인정하면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비슷한 경우로 예주 남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이통이 있었는데, 조조는 이런 형태의 아웃소싱을 통해 현지의 반발을 줄이고[3], 이들로 청주의 원담, 형주의 유표 등 인접한 경쟁 세력을 견제토록 하며 군비 지출을 절감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패전>에서는 당시 장패의 위상을 알 수 있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과거 조조의 부장이었던 서흡, 모위는 장막과 여포에게 호응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조조가 연주를 회복하자 달아나 장패에게 보호를 받고 있었다. 조조는 장패에게 유비를 보내 이들을 넘길 것을 요구했지만, 장패는 유비에게 '조공에게 거역할 생각은 없지만 자신의 보호를 받는 자들도 내버릴 수 없으니 그 점을 중재해달라.'고 했고, 유비가 이를 조조에게 말하자 조조는 장패를 칭찬하며 서흡, 모위를 사면하고 태수로 삼았다고 한다. 이는 동맹국의 군주에게 사신을 보내 외교를 하는 모양새에 가깝고, 조조는 결국 장패의 뜻을 받아들임은 물론 입장을 완전히 바꿔 서흡, 모위를 2천석의 고관으로 임명하기까지 했다. 조조로서도 최대한 장패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게 노력했던 셈.
조조가 이토록 장패의 회유에 힘쓴 결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원소와 관도에서 대치하면서 드러났는데, 장패가 별동대를 이끌고 청주로 여러차례 침입해 조조는 동쪽에 대한 방위에 신경쓰지 않고 원소와의 대결에 전념할 수 있었다.
조조가 남피에서 원담을 격파해 참수하고 기주와 청주를 평정하자 장패는 대세가 결정났다고 봤는지 조조에게 와서 축하하며 자신의 가족을 업에 이주시키겠다고 했고 조조는 그의 충성심을 칭찬한다.[4] 원담 사후 청주의 혼란을 틈타 청주 제남군 일대에서 서화, 사마구 등의 황건적 잔당들이 난리를 피우자 하후연과 함께 이를 토벌했으며 창희가 모반했을 때도 우금과 함께 이를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다.
적벽에서 참패하자 진란, 매성이 남양 일대[5]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손권이 한당을 파견하여 이에 호응하였다. 장패는 한당과 싸워 격파하고 서둘러 서구로 이동하였는데 손권은 자신의 수군을 이끌고 서구를 점령해 이곳으로 계속 진란을 지원할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손권의 수군은 장패가 이미 지키고 있는 것을 보자 철수한다. 손권이 철수하자 장패는 자신의 군으로 하루만에 백리를 행군하여 장료군과 합류, 진란을 격파한다.
그 뒤 조조가 유수구에서 손권과 싸울 때[6] 장패는 장료와 함께 선봉을 맡았으나 불리하였다. 장료가 군을 철수하려 하자 장패는 조조의 철수 명령이 내려올테니 기다리자고 하였고 과연 다음날 조조가 철수 명령을 내린다. 조조는 이에 감탄하여 장패의 벼슬을 높인다.
조조가 한중에서 패배한 뒤 관우가 북상하고 손권이 비밀리에 조조와 손잡자 조조가 동쪽의 부대를 중앙에 집결시킨 일이 있었다. 장료도 부대를 이끌고 이동하였고 장패 역시 별군을 보내 조조가 있는 곳으로 집결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후 조조가 죽자 장패가 인솔하는 부대가 자진해산해서 청주로 가버렸다. 이는 하필 그가 이끌던 부대가 전직 황건적 출신으로 이루어진 청주병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야사에는 애초에 조조한테 주워질 때부터 그가 살아있는 동안 한정으로만 충성을 바치고, 그가 죽거든 농업으로 돌아가기로 약속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진위는 불명. 확실한 것은 이들의 해산으로 인해 장패는 직접 인솔하는 부대가 반토막도 더 나버렸다는 거다. 이를 장패가 용인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어찌되었건 군세가 약화된 장패는 그대로 하락세를 타게 된다.
훗날 조비가 조휴를 청주, 서주의 도독으로 삼자 장패는 그의 지휘를 받아 여범을 격퇴시켰다.[7] 그 뒤 조비는 동쪽으로 순행하여 장패를 만났는데 장패가 과거 멋대로 병력을 청주로 되돌려보내 해산시킨 걸 의심하였기에 장패의 병력을 빼앗고 집금오의 벼슬을 주어 수도로 소환했다. 장패는 조예 시절까지 살았는데 그의 식읍은 3500호에 이르렀다. 230년에는 조예가 번창으로 행차하는 도중 장패에게 태위의 일을 대신하게 해 제사를 지내게 했다. 웬만한 무장으로서의 행적을 보이다가 의외로 말년에는 태위 대리까지 오른 인물.
그렇게 한 뒤 서주 동해국으로 망명했는데,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그 용맹함을 높게 산 서주목 도겸에게 초빙되어 황건적을 격파하는 공적을 세우고 기도위에 임명된다. 이후 동료인 손관, 오돈, 윤례, 창희 등과 군사를 모아 서주 낭야국 개양현에 주둔했으며 태산의 산맥지대에 근거해 독자 세력화한다.
이후 여포가 서주를 점거하자 장패는 여포의 휘하로 들어갔다.[2]
동해 사람 소건이 낭야상이 되어 서주 낭야국 거현에 치소로 삼아 성을 보전해 스스로 지키면서 여포와 통하지 않았는데, 여포가 서신을 보내 투항을 권하자 소건은 주부를 보내 서신을 지니고 가게 하면서 좋은 말 5필을 바치자, 장패는 소건을 격파하고 군수물자를 노략질했다. 여포가 그 일을 듣고 분개해 장패를 공격했는데, 장패는 여포의 노략질을 두려워하여 과연 성 위에서 맞서자 끝내 여포는 함락하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고 그 후에 다시 화해했다.
조조가 쳐들어왔을 때 여포를 지원했다가 여포가 조조에게 패해 죽자 후환이 두려워 잠적했지만, 조조는 장패의 행방을 수색하는 한편 장패를 부르기도 하면서 기어이 장패를 찾아낸다.
애초에 조조는 장패를 죽일 생각은 없었는지 장패를 직접 만나게 되자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우두머리 격이었던 장패가 손관, 오돈, 윤례, 창희 등을 모두 불러들이게 했으며, 장패를 낭야상으로 임명하는 한편 청주와 서주를 감독하게 했고, 나머지도 제각기 태수로 임명하며 장패의 지휘를 받도록 한다.
물론 별도로 자사를 임명해 장패를 감독하는 형태를 취하긴 했지만, 이는 독자적인 군벌을 형성하고 있던 장패의 세력권을 중앙 정부의 권위를 통해 합법적인 형식으로 인정하면서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비슷한 경우로 예주 남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이통이 있었는데, 조조는 이런 형태의 아웃소싱을 통해 현지의 반발을 줄이고[3], 이들로 청주의 원담, 형주의 유표 등 인접한 경쟁 세력을 견제토록 하며 군비 지출을 절감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패전>에서는 당시 장패의 위상을 알 수 있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과거 조조의 부장이었던 서흡, 모위는 장막과 여포에게 호응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조조가 연주를 회복하자 달아나 장패에게 보호를 받고 있었다. 조조는 장패에게 유비를 보내 이들을 넘길 것을 요구했지만, 장패는 유비에게 '조공에게 거역할 생각은 없지만 자신의 보호를 받는 자들도 내버릴 수 없으니 그 점을 중재해달라.'고 했고, 유비가 이를 조조에게 말하자 조조는 장패를 칭찬하며 서흡, 모위를 사면하고 태수로 삼았다고 한다. 이는 동맹국의 군주에게 사신을 보내 외교를 하는 모양새에 가깝고, 조조는 결국 장패의 뜻을 받아들임은 물론 입장을 완전히 바꿔 서흡, 모위를 2천석의 고관으로 임명하기까지 했다. 조조로서도 최대한 장패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게 노력했던 셈.
조조가 이토록 장패의 회유에 힘쓴 결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원소와 관도에서 대치하면서 드러났는데, 장패가 별동대를 이끌고 청주로 여러차례 침입해 조조는 동쪽에 대한 방위에 신경쓰지 않고 원소와의 대결에 전념할 수 있었다.
조조가 남피에서 원담을 격파해 참수하고 기주와 청주를 평정하자 장패는 대세가 결정났다고 봤는지 조조에게 와서 축하하며 자신의 가족을 업에 이주시키겠다고 했고 조조는 그의 충성심을 칭찬한다.[4] 원담 사후 청주의 혼란을 틈타 청주 제남군 일대에서 서화, 사마구 등의 황건적 잔당들이 난리를 피우자 하후연과 함께 이를 토벌했으며 창희가 모반했을 때도 우금과 함께 이를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다.
적벽에서 참패하자 진란, 매성이 남양 일대[5]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손권이 한당을 파견하여 이에 호응하였다. 장패는 한당과 싸워 격파하고 서둘러 서구로 이동하였는데 손권은 자신의 수군을 이끌고 서구를 점령해 이곳으로 계속 진란을 지원할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손권의 수군은 장패가 이미 지키고 있는 것을 보자 철수한다. 손권이 철수하자 장패는 자신의 군으로 하루만에 백리를 행군하여 장료군과 합류, 진란을 격파한다.
그 뒤 조조가 유수구에서 손권과 싸울 때[6] 장패는 장료와 함께 선봉을 맡았으나 불리하였다. 장료가 군을 철수하려 하자 장패는 조조의 철수 명령이 내려올테니 기다리자고 하였고 과연 다음날 조조가 철수 명령을 내린다. 조조는 이에 감탄하여 장패의 벼슬을 높인다.
조조가 한중에서 패배한 뒤 관우가 북상하고 손권이 비밀리에 조조와 손잡자 조조가 동쪽의 부대를 중앙에 집결시킨 일이 있었다. 장료도 부대를 이끌고 이동하였고 장패 역시 별군을 보내 조조가 있는 곳으로 집결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후 조조가 죽자 장패가 인솔하는 부대가 자진해산해서 청주로 가버렸다. 이는 하필 그가 이끌던 부대가 전직 황건적 출신으로 이루어진 청주병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야사에는 애초에 조조한테 주워질 때부터 그가 살아있는 동안 한정으로만 충성을 바치고, 그가 죽거든 농업으로 돌아가기로 약속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진위는 불명. 확실한 것은 이들의 해산으로 인해 장패는 직접 인솔하는 부대가 반토막도 더 나버렸다는 거다. 이를 장패가 용인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어찌되었건 군세가 약화된 장패는 그대로 하락세를 타게 된다.
훗날 조비가 조휴를 청주, 서주의 도독으로 삼자 장패는 그의 지휘를 받아 여범을 격퇴시켰다.[7] 그 뒤 조비는 동쪽으로 순행하여 장패를 만났는데 장패가 과거 멋대로 병력을 청주로 되돌려보내 해산시킨 걸 의심하였기에 장패의 병력을 빼앗고 집금오의 벼슬을 주어 수도로 소환했다. 장패는 조예 시절까지 살았는데 그의 식읍은 3500호에 이르렀다. 230년에는 조예가 번창으로 행차하는 도중 장패에게 태위의 일을 대신하게 해 제사를 지내게 했다. 웬만한 무장으로서의 행적을 보이다가 의외로 말년에는 태위 대리까지 오른 인물.
- 아버지 장계(臧戒)
- 아들 장애(臧艾)
- 아들 장순(臧舜)
이외에도 열후로 임명된 아들 한 명이 더 있지만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다.
100만인의 삼국지 | 삼국지 9, 10 | 삼국지 11 |
삼국지 12, 13, 14 |
도겸, 유비[9], 여포, 조조군 소속의 무장로 등장하고 영웅집결 시나리오에서는 최종적으로 도겸 소속의 무장로 설정되며 정사대로 독립세력으로 나온 적은 없다. 능력치 자체는 통솔, 무력이 70대 중반에 지력, 정치가 50대, 매력이 70대인 B급 지용겸비 무장이다. 조조군은 말할 것도 없고 유비군, 여포군의 각각 투탑인 관우, 장비, 장료, 고순에 비하면 많이 처지는 편이고 시리즈에 따라서 실적이 비교도 안되는 송헌, 위속, 후성보다도 대우가 나쁜 시리즈도 있다. 그나마 최근작에 갈수록 여러 무장들이 상향되나 장패는 상향된 것이 그게 다라서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 저평가된 인물 중 하나이다. 그래도 빠지는 능력치가 없어서 다용도로 굴리기 좋으며, 무관이 적은 도겸군 입장에서는 에이스이고 서주 시절의 유비군도 투톱인 관우, 장비 외에는 무관이 적어서 초반엔 장패도 주력으로 사용하게 된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5/무력 72/지력 46/정치력 52. 분전, 돌파를 가지고 있다. 도겸군 아니면 안 쓸 그저 그런 장수.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3/무력 72/지력 49/정치력 56/매력 69에 특기는 징병, 돌격, 기습, 기염 4개. 매력69가 미묘한 수치긴 해도 아쉬운대로 징병 특기가 효과를 발휘할 수는 있다.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4/무력 75/지력 52/정치력 56/매력 71에 특기는 위압. 없는 것보다는 좋은 특기이기는 하나 영웅집결 기준으로는 같은 도겸군 장수인 손관도 특기가 위압이다.
삼국지 12에서의 전법은 대타격. 장패의 무력이 어중간하고, 여포군에서는 여포의 인중여포 때문에 말할 것도 없으며, 도겸군에서도 진등의 매복의 독이 더 무섭기 때문에 장패의 대타격을 쓸 일은 많지 않다. 일러스트는 말을 타고 고삐를 쥔 채 돌격하고 있는데 오른손 뒤로 검을 들고 있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8/무력 75/지력 53/정치력 56이고 중신특성은 없다. 전법은 소침공작이고 병과적성은 창병 A/기병 A/궁병 C이며 특기는 훈련 4, 순찰 1, 신속 6으로 전수특기는 신속이다. 이번 작에서 주군이 상당히 자주 바뀌는 장수로도 유명하다. 반동탁연합에서는 도겸의 수하로 등장하며, 군웅할거에서는 여포, 조조 어느 쪽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고, 여포토벌전에서는 여포, 관도대전부터는 조조군에 소속된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6, 무력 75, 지력 53, 정치력 56, 매력 70으로 전작에 비해 통솔력이 2 하락했다. 개성은 산전, 숲전, 위무, PK에서는 금강 개성이 추가되었고 주의는 패도, 정책은 군제개혁 Lv 4, 진형은 봉시, 장사, 추행, 전법은 분전, 대갈, 교란, 도발, 친애무장은 손관, 오돈, 윤례, 창희, 혐오무장은 없다. 게임 특성상 전투요원으로도 그럭저럭 쓸 만하고, 지역담당관으로도 어느 정도 굴릴 수 있는 올라운더 타입인데다가 위무 개성도 있어서 도시에 배치했을 때 도적의 출현을 막을 수 있다. 그런데 연주 태산군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성씨패란 시나리오에서 허창의 재야로 등장한다.
자세한 내용은 장패(삼국전투기) 문서 참고하십시오.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는 조조에게 투항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아 존재가 짤렸다.
영걸전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조조전에서만 등장한다. 영걸전에서 등장할 만한데 등장하지 않은 것이 조금은 의외. 조조전에서는 여포군에 소속된 적으로만 나오는데 병과는 적병계, 레벨도 다른 적군 네임드보다 2 낮고 능력치도 별로이지만 몰우전을 장착하고 있어서 원거리 공격이 가능하기 때문에 아군이 불리한 복양 전투 1, 2에서 꽤나 귀찮은 적. 그런데 하는 말마다 허세뿐인데다, 강한 적을 만나거나, 패하거나 죽을 때 하는 대사가 하나같이 늘 핑계만 대는 것들 뿐이다. 아니면 정신승리를 시전하거나... 이래저래 비호감. 서주 구원전에서 퇴각시키면 사망하며 허저 전용템인 몰우전을 남긴다.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는 조조전 뿐 아니라 여포전과 장료전에서도 등장한다. 장료전에서는 도적 출신이었으나 여포 일행에게 토벌당한 후 죽을 뻔 했으나 여포가 부하로 삼으면서 살아남는다. 견희를 보고 첫눈에 반해 적극적으로 대시하지만 견희는 그런 장패를 매우 싫어한다. 이후 조비가 견희를 취하자 조비를 미워하며 이후 조비가 견희를 내치고 견희가 자결하자 더욱 증오하게 된다. 다만 딱히 조비에게 무슨 짓을 하지는 않는다. 조비를 증오하지 말라는 장료의 유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는 조조전 뿐 아니라 여포전과 장료전에서도 등장한다. 장료전에서는 도적 출신이었으나 여포 일행에게 토벌당한 후 죽을 뻔 했으나 여포가 부하로 삼으면서 살아남는다. 견희를 보고 첫눈에 반해 적극적으로 대시하지만 견희는 그런 장패를 매우 싫어한다. 이후 조비가 견희를 취하자 조비를 미워하며 이후 조비가 견희를 내치고 견희가 자결하자 더욱 증오하게 된다. 다만 딱히 조비에게 무슨 짓을 하지는 않는다. 조비를 증오하지 말라는 장료의 유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진삼국무쌍 BLAST 등장인물 | ||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는 주로 여포군과 위군 클론 무장으로 나오는데 어째 여포군으로 나오는 비중이 더 많다. 그것때문일까... 진삼국무쌍 블라스트에서 여포군 무장으로 참전. 하지만 넘버링 작품에서는 장료처럼 처음에 여포군이었다가 나중에 조조군이 될 수 있다. 일단 무쌍 내에서의 입지는 여포군 취급이며 2016년 초 드디어 무쌍무장만 나온다는 슈퍼레어 승급을 하면서 차기작 참전 확률이 상당히 높아졌다. 성우는 요시다 켄지. 일단 SR판도 여포군 소속이다. 일단 이미지에서 들고 있는 무기는 4편까지 장료가 들던 구겸도(?!?!)다. 일단 구겸도는 7편엔 없는 무기종인 만큼 노멀카드판과 SR판 둘다 무기는 장도계열인 언월도를 사용한다. 그 점은 미안한지 무쌍난무는 차별화시켜줬다. 차기작에서 구겸도 모션 복귀를 시사하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신 무장은 7명으로 끝으로 결국 클론 무장 탈출을 실패하고 말았다. 심지어 DLC 추가도 본인이나 고순이 아닌 화웅이 꿰차는 바람에 차기작 등장은 현재까지도 요원하다.
군웅할거 캠페인에서 도겸 휘하에 등장하는 클론 무장으로 구현되었다. 타입은 용장.
배신당한 천하 캠페인에서는 동군 지역을 점거한 상태로 등장하며, 유비 및 정강과 전쟁 상태다. 또한 1.5.0 패치로 추가된 도적 세력으로 분류된다.
배신당한 천하 캠페인에서는 동군 지역을 점거한 상태로 등장하며, 유비 및 정강과 전쟁 상태다. 또한 1.5.0 패치로 추가된 도적 세력으로 분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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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존호주(上尊號奏)에 의하면 사지절(使持節)이다.[2] 연의처럼 여포의 직속 부하가 아닌 독립 군벌로서 여포와 협력했다.[3] 위나라는 특유의 인명경시적인 정책기조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반란이 일어나는 고질병이 있는 나라였는데, 특히 서주는 서주 대학살의 업보 때문에 조조가 직접 다스리면 반란각이 어느 지역보다도 날카롭게 설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장패를 통해 간접적으로 지배하는 형태로 놔둔 것.[4] 표면상으론 장패가 조조에게 복종하고 있었지만, 사실상 자신의 독립적인 세력을 자주적으로 굴리고 이해타산에 따라 협력하는 관계였으며,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장패가 조조가 수도로 삼은 업에 가족을 두겠다는 것은 조조에게 자신의 가족을 사실상 볼모를 두는 것이자 신하로서 섬기겠다는 복종의 뜻을 비춘 것이었다. 그래서 조조에게 충성심이 있다고 칭찬받은 것이다.[5] 원술이 과거 세력을 잡은 곳이다.[6] 조조는 세 번 유수구에서 손권과 싸웠는데 213년, 214년, 그리고 217년에 싸웠다. 이때는 217년의 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무제기>에 철수하면서 하후돈, 조인, 장료를 거소에 남겼다고 하고 <장패전>에선 하후돈과 장패를 거소에 남겼다고 하므로 하후돈이 거소에 남긴 시기였던 217년의 일로 추정이 가능하다. 또한 <장패전>에서는 손권이 항복했다고 했는데 손권이 이렇게 저 자세를 보였던 적은 213년과 217년의 일이었는데 213년에는 하후돈을 거소에 주둔시켰다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7] 손권이 이릉대전에서 유비를 격파하고 조비가 대규모로 손권을 공격했을 때의 일이었다.[8] 연의에서 주요 군웅의 부하로 소개되는 인물들 중 이런 경우가 상당히 많은데, 관서의 군벌들은 모조리 한수의 부하로 묘사되었다.[9] 도겸에게 서주를 물려받은 이벤트 또는 시나리오 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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